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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렉터 다이어리] 사랑의 증거

안나의 마음속에서 무슨 일이 일어났는가

<안나 카레니나>는 <전쟁과 평화>와 함께 톨스토이의 가장 대표적인 소설로 꼽힌다. 같은 시대를 살았던 또 다른 러시아의 대문호 도스토예프스키는 <안나 카레니나>를 일컬어 ‘완벽한 예술작품’이라 평하기도 했다. 얼마 전 국내 어느 유명 소설가도 만일 무인도에 간다면 가지고 갈 책으로 이 책을 꼽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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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5년 영화 <안나 카레니나>의 주인공인 그레타 가르보(Greta Garbo)

그녀에게 사랑이란 ‘그런 것’

그런데 명성과는 달리 소설 <안나 카레니나>를 완독한 사람들은 그리 많지 않다. 아마도 소설의 방대한 분량 때문일 것이다. 보통 사람들이 <안나 카레니나>에 대해 알고 있는 일반적인 내용이란 사랑에 빠진 어느 유부녀가 열차에 몸을 던져 생을 마감한다는 정도일 것이다. 아래의 글은 안나가 열차에 몸을 던져 생을 마감하는 장면이다.

그녀는 첫 번째 차량의 한가운데가 자기의 정면에 왔을 때, 그 밑에다 몸을 던지려고 했다. 그러나 손에서 놓으려고 했던 빨간 손주머니가 그녀를 붙잡았으므로 기회를 놓치고 말았다. 한가운데는 이미 지나가버렸던 것이다. 그래서 다음의 차량을 기다리지 않으면 안 되었다. 해수욕을 하면서 마악 물속으로 뛰어들려고 할 때에 여러 차례 경험했던 것과 흡사한 느낌이 그녀를 사로잡았다. 그녀는 성호를 그었다. 성호를 긋는 이 익숙한 동작이 그녀의 마음에 처녀 시절과 어렸을 때의 일련의 추억을 온전하게 불러일으켰다. 그러자 갑자기 그녀를 위해서 삼라만상을 뒤덮고 있던 어둠이 걷히고 한순간, 생이 그 모든 빛나는 과거의 환희와 더불어 그녀 앞에 나타났다. 그러나 그녀는 다가오는 두 번째 차량의 바퀴에서 눈을 떼지 않았다. 그리고 바퀴와 바퀴 사이의 한가운데가 그녀 앞까지 온 바로 그 순간에 그녀는 빨간 손주머니를 내던지고 두 어깨 사이에 머리를 틀어박고 두 손을 짚고 차대 밑으로 넘어지면서, 그리고 곧 일어나려고 하는 듯한 가벼운 동작으로 무릎을 꿇었다. 그러자 그 순간 그녀는 자기가 저지른 일에 대해서 공포를 느꼈다. ‘나는 어디에 있는 것일까? 나는 무슨 짓을 하고 있는 것일까? 무엇 때문에?’ 그녀는 몸을 일으켜 뛰어나오려고 했다. 그러나 무언가 거대하고 무자비한 것이 그녀의 머리를 꽝 하고 떠받고 그 등을 할퀴어 질질 끌어갔다. ‘하느님, 저의 모든 것을 용서해주소서!’ 그녀는 이미 저항하기엔 늦었음을 느끼면서 중얼거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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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나는 왜 달리는 열차에 몸을 던졌을까? 앞에서 말했듯이 안나는 유부녀이다. 따라서 그녀의 사랑은 사회적으로 금지된, 소위 불륜이다. 불륜 같은 사회적으로 금지된 금단의 사랑은 비극으로 결말지어질 가능성이 높다. 그녀가 비극적인 운명에서 벗어날 수 있는 방법은 그녀의 가슴에서 불타오르는 사랑을 멈추는 것이다.

그러나 그녀는 그러지 않았다. 아니 그럴 수 없었다. 왜냐하면 사랑이란 그녀의 의지로 시작되지도 않았으며 또한 그녀의 의지로 멈출 수도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바로 그런 이유 때문에 불륜과 같은 금단의 사랑은 비극적인 결말로 마무리 될 확률이 높다. 단, 그(그녀)가 진정 사랑에 빠져있다면.

주인공 안나는 브론스키라는 이름의 젊은 장교를 사랑했다. 안나 카레니나가 꼭 자살이라는 극단적인 결론을 선택해야했을까? 그녀의 사랑은 반드시 비극적인 결말로 종결될 수밖에 없는가? 어떤 사람들은 이런 의문을 제기할지도 모른다. 그 질문에 대한 나의 대답은 ‘그렇다!’이다. 이유는 그녀에게 사랑이란 ‘그런 것’이기 때문이다.

평범하고 통속적인 것에 숨어있는 증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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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일 누군가 “당신은 누군가를 사랑한 적이 있습니까?”라고 묻는다면, 질문을 받은 사람 대부분은 대답에 앞서 우선 자존심부터 상할 것이다. ‘지금 누군가를 사랑하고 있느냐?’도 아니고 ‘지금까지 단 한번이라도 누군가를 사랑해 본 적이 있냐’라니…. 사람을 무시해도 이만저만이 아니다. 그렇다면 질문의 내용을 이렇게 바꿔보자. “당신이 누군가를 사랑했다는 증거는 무엇인가요?”

스스로 확신하는 사랑의 증거가 무엇이냐는 질문을 받았을 때 아마도 꽤 많은 사람들이 즉각적으로 사랑을 입증할 증거들을 떠올리지 못할 것이다. 설사 떠오르는 그런 기억이 있더라도 한두 가지로 그치는 경우가 많을 터이다. 이건 어디까지나 개인적인 추측일 뿐이지만.

아무튼 사실은 마음 깊은 곳에 처박아 두었던 사랑의 증거들을 세상 밖으로 끄집어내면 더욱 당황스러운 일들이 벌어진다. 평소 가지고 있던 믿음이나 기대와는 달리 그 증거라는 게 너무나 평범하고 통속적이어서 스스로의 사랑을 초라하게 느끼게 만들 수도 있다. 그때 우리는 자신도 모르게 첫 번째 질문을 다시 떠올리게 된다. ‘나는 과연 누군가를 진정 사랑한 적이 있었던가?’

세상은 온통 사랑으로 넘쳐난다. 사랑 없는 인생은 ‘앙꼬 없는 찐빵이며, 오아시스 없는 사막’이기 때문이다. 그렇게 믿기 때문이다. 오직 사랑만이 부조리하고 고통스러운 인생살이를 반짝반짝 빛나게 해주는 유일한 희망이기 때문이다. 그렇게 믿기 때문이다. 오직 사랑만이 먼지같이 하찮고 허무한 존재인 인간을 우주같이 위대하고 영원한 존재로 만들어주기 때문인 것이다. 그래서 어느 시대, 어느 곳에서나 사람들이 부르는 노래는 거의 대부분이 사랑의 찬가이거나 사랑의 비가였고, 사람들이 글로 쓰고 입에서 입으로 전해지는 이야기의 대부분은 은밀하고 비밀스런 러브스토리였다.

그렇다면 왜 이토록 수많은 노래와 시와 소설과 영화가 열광적으로 사랑을 이야기하는 것일까? 이처럼 위대한 사랑은 누구에게나 찾아오거나, 설사 찾아온다 할지라도 쉽게 감당할 수 있는 사건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래서 현실에서는 이룰 수 없는 사랑의 판타지를 노래와 시와 소설과 영화를 통해 표현하고, 관객과 독자들은 그것들을 통해 간접적으로 체험하길 원하기 때문이다.

7080 노래 가운데 함중아의 <내게도 사랑이>라는 노래가 있다. 필자가 노래방에서 자주 부르는 노래이다. 반복되는 후렴구의 가사는 다음과 같다.

내게도 사랑이/ 사랑이 있었다면/ 그것은 오로지/ 당신뿐이라오.

남자는 ‘좋아’했고, 여자는 ‘사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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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시절 어떤 여학생과 잠시 연애를 한 적이 있었다. 그때 그 여학생이 나에게 물었다. “당신은 날 사랑하나요?”

나는 그 질문에 곧바로 대답할 수 없었다. 좋아하긴 하는데 그게 사랑인지 확신할 수 없었다. 질문을 받은 순간 이미 나는 그녀에 대한 나의 감정이 사랑이 아니라고 판단했기 때문에 나는 즉각 대답하지 못하고 주저했던 것이다. 그렇다면 나는 왜 그녀에 대한 감정이 사랑이 아니라고 생각했을까? 아마도 소설이나 영화를 통해 내가 간접적으로 학습한 사랑이란 그녀에게서 느꼈던 감정보다 훨씬 더 강렬하고 더 황홀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현재 연인관계로 지내는 수많은 커플들도 그녀가 나에게 던진 이 질문 앞에서 꽤 많은 사람들이 주저하고 망설일 것이라 나는 감히 장담한다. 물론 그(그녀)의 질문에 약간의 과장을 섞어 “네, 사랑합니다”라고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난 그러지 못했다. 사랑은 거룩하고 경건한 그 무엇이기에, 확신도 없이 사랑한다고 말하는 건 용서받지 못할 죄를 짓는 듯한 기분이 들었기 때문이다.

학창시절 어느 여인이 나에게 사랑의 고백을 요구했을 때 내가 무심결에 떠올렸던 노래가 바로 <내게도 사랑이>이다. 정확하게 기억은 나지 않지만 노래 가사와 비슷한 의미의 대사를 그녀에게 날렸던 거 같다.

“당신에 대한 지금 나의 감정이 사랑인지 아닌지 잘 모르겠지만, 만일 나에게도 사랑이라는 것이 있었다면 그것은 당신뿐입니다.” 그리고 얼마 후 그녀는 내 곁을 떠났다.

돌이켜 생각해보면 그녀는 나를 사랑했다. 젊은 청춘 남녀가 만나 함께 연애를 했는데, 남자는 여자를 ‘좋아’했고 여자는 남자를 ‘사랑’했다. 데이트를 하는 두 사람의 모습을 바라보는 사람들은 두 사람의 차이를 알 수 없었겠지만, 두 사람 사이에는 하늘과 땅 만큼 엄청난 차이가 있었던 것이다.

나는 그녀를 사랑하지 않았지만, 그녀가 나를 사랑했다고 판단할 수 있는 건 그녀는 자신의 사랑에 대한 증거를 내게 보여주었지만, 나는 그런 증거를 가지고 있지 못했기 때문이다.

글 | 최종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