웹진 카페人  
카페의 서재
스페인 산티아고 길에서

철십자가 ‘나는 이걸 알고 있었어’

‘나는 이걸 알고 있었어’ 내 뺨으로 하염없이 눈물이 흘러내렸다. 레온 산맥 중간 산티아고 순례길에서 가장 높은 1,500m 언덕 한가운데. 힘들게 숲을 헤치고 오르막길 끝에 서자 별안간 ‘철십자가(Cruz de Ferro)’가 눈앞에 나타났다. 그 십자가를 보자마자 둑이 터지듯 울음이 나왔다. 왜인지는 지금도 모르겠다. 나도 모르게 입에서 말이 흘러나왔다. “난 이걸 알아.”

철십자가는 11세기부터 산티아고 순례길의 명소였다고 한다. 높은 언덕 가운데 돌을 쌓아 안전을 비는 켈트족의 풍습과 기독교 문화가 만나 순례자들이 반드시 들르는 명소가 되었다. 우리도 산에 가면 돌을 놓아 탑을 쌓지 않는가. 순례자들이 자기 고향의 돌을 챙겨 와서 여기 철십자가 앞에 놓으며 소원을 빈다. 이 돌은 순례자들이 저지른 죄를 상징하며, 돌을 놓고 떠나면 죄를 용서받는다는 뜻도 있었다.

흔히 산티아고 순례길은 세 고비를 넘는다고 한다. 첫날 ‘나폴레옹 루트’라 부르는 피레네 산맥을 힘겹게 넘으며 자신의 잘못을 깨닫고, 다음은 ‘용서의 언덕’을 지나며 다른 사람의 잘못을 용서하고 신에게 용서를 구한다. 마지막으로 산티아고 닿기 전 여기 ‘철십자가’ 앞에서 마음 속 근심들을 다 내려놓는다고 한다. 순례자들이 마지막으로 내려놓은 근심들이 십자가 아래로 돌무더기가 되어 흘러내리고 있었다. 그리고 내 뺨에서는 이유를 알 수 없는 눈물이 흘러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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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티아고 순례길의 명소인 ‘철십자가’

아침부터 비가 내렸다. 어제는 폭우였다. 우비를 단단히 챙겨 입고 고어텍스 신발도 신었지만 젖은 산길은 걷기가 쉽지 않았다. 어제 묵었던 아스토르가(Astorga)를 출발해서 20㎞ 쯤 걸어 숙소가 있는 라바날 데 까미노(Rabanal del Camino)에 도착했다. 순례자들은 대체로 여기서 하룻밤 묵고 다음날 산을 넘는다. 그런데 좀 더 걸을 수 있을 것 같았다. 우비를 두드리는 빗소리와 내 숨소리만 들으며 걷는 일이 힘들지만 묘하게 즐거웠다. 숨 쉴 때 느껴지는 젖은 숲 내음도 좋았다. 별안간 경사가 심해졌고, 빗줄기는 가늘어졌다. 그러다 예상치도 못한 순간 갑자기 숲이 끝났고 눈앞에 철십자가가 나타났다.

도대체 난 왜 이리 서럽게 우는 걸까, 그리고 왜 이걸 안다고 말했을까. 궁리해 보아도 울음은 멈추지 않았다. 다만 내가 이미 이곳을 알고 있었고, 지금 여기서 다시 만났다는 느낌이 들었을 뿐이다. 그 와중에 혼자 엉엉 우는 모습이 부끄러워서 근처에 다른 순례자들이 없어서 다행이라는 생각도 잠깐 했다. 그렇게 얼마를 울었는지 지쳐서 울음도 멎었고, 비도 그쳤다. 근처에서 잘 생긴 돌을 하나 골라 흘러내리는 돌무더기에 더하며 소원을 빌었다. ‘좀 덜 울게 해주세요. 울 일도 좀 덜하게 해주세요. 울더라도 좀 덜 창피해하는 마음을 갖게 해주세요’ 기도를 마치자 창피한 느낌이 좀 덜한 걸 보니 소원 중 하나는 이루어진 것 같았다.

젖은 벤치의 물기를 손으로 닦고 배낭을 놓고 앉았다. 기운이 없고 멍했다. 앉은 채 두 손을 모으고 그냥 있었다. 정말, 아무것도 하지 않고 있었다. 뭘 보는 것도 무언가를 생각하는 것도 아니었다. 그냥, 앉아, 있었다. 아무것도 아니구나 싶었다. 운 일도, 내가 겪어온 일도, 아무것도 아니었다. 소원이랄 것도, 잘못이랄 것도, 용서랄 것도, 아무것도 아니다, 다 아무것도 아니구나 싶었다. 툭툭 털고 일어나 배낭을 멨다. 그래, 오늘은 꽤 걸었다. 배도 고프고, 쉬고 싶다. 뜨신 물로 샤워하고 마른 옷으로 갈아입고 싶다. 언제 비가 왔었는지 모르게 맑게 갠 하늘과 철십자가를 뒤로 하고 걸었다.

 

가장 가까운 마을인 만하린(Manjarin)에 도착해서 알베르게를 보고 여긴 좀 어렵겠다 생각했다. 템플기사단의 유물과 깃발이 가득 걸린 만하린 유일의 알베르게는 외딴 폐가를 개조한 곳인데 샤워실이 없었다. 방에 묵고 있는 순례자들의 표정도 그리 밝아보이지는 않았다. 다음 마을은 7㎞ 앞에 있으니 한 시간 반 거리인데 가파른 내리막길이다. 비온 뒤 미끄러운 내리막 산길을 한 시간 반 걸어가는 건 쉽지 않은 일처럼 느껴졌다. 아침에 떠나온 아스트로가부터 계산하면 36㎞를 걷게 되는 셈인데, 나이트워킹 했던 날을 제외하면 하루 걷는 거리로는 신기록이다. 1,500m 산을 방금 올라온 상황. 허나 템플기사단 마니아가 아니라면 만하린의 알베르게에서 묵는 건 어려울 성 싶었다. 어떻게든 내려가자고 마음을 굳히고 배낭을 단단히 멨다. 피할 수 없으면 즐기자는 마음 때문이었을까, 아니면 실컷 울고 근심이 풀려서일까. 의외로 쉽게 다음 마을인 엘 아세보(El Acebo)에 도착했고, 적당한 알베르게를 찾았다.

2층 침대가 가득한 넓은 공립 알베르게였는데 묵는 사람은 나를 포함해서 딱 세 사람이었다. 영화 <맨인블랙>의 토미 리 존스를 쏙 빼닮은 호스피탈레로가 내 크레덴시알(순례자여권)에 탕, 하고 가볍게 스탬프를 찍어 내밀었다. 윌 스미스가 된 느낌이 들었다. 짐을 풀고 샤워를 마치자 그가 저녁 식사 준비를 거들어달라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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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탈리아에서 온 순례자가 삶은 스파게티를 넷이서 배 터지게 나눠먹은 뒤, 호스피탈레로는 알베르게 문을 잠궈 버리고 우리를 으슥한 동네 뒷골목으로 데려갔다. 골목 끝에 닫힌 문을 두드리자 바텐더가 나와 문을 열어 주었다. 외계인들은 없었지만 톰 웨이츠(Tom waits; 미국의 싱어 송 라이터이자 배우)가 버번을 올려놓고 피아노를 칠 것 같은 분위기의 카페에서 스페인의 이름 모를 독주를 한 잔씩 나누며 호스피탈레로의 이야기를 들었다. 영어와 스페인어가 섞여있어 대충 알아들은 바로는 호스피탈레로도 전에는 순례자였다고 했다. 산티아고 길을 걷다가 깨달음을 얻었고, 이 근처에 정착하기로 마음을 먹은 뒤 알베르게를 열어 꽤 오래 운영해왔다고 했다. 예전의 순례자들은 진지한 믿음을 가지고 이 길을 걸었는데 요즘은 그런 분위기가 점점 옅어지고 찾아오는 사람도 줄어서 이 일을 계속 해야 할지 잘 모르겠다는 이야기였다. 꽤 오래 잔들이 오갔고, 기분 좋게 술이 오른 우리는 바텐더의 배웅을 받으며 알베르게로 다시 돌아왔다.

2층 침대에 올라 이불을 덮고 누웠다. 산티아고 길을 걷기 시작한 뒤 평범한 날은 하루도 없었지만 이렇게 특별한 하루도 드물었다. 비 오는 날 높은 산에 올라 철십자가를 보며 이유도 모른 채 펑펑 울었고, 그게 다 아무것도 아니라는 마음의 이야기를 들었고, 잘 생긴 돌을 놓고 이제는 좀 덜 울게 해달라고 빌었다. 템플기사단의 깃발이 휘날리는 만하린의 알베르게를 지나, 토미 리 존스를 닮은 호스피탈레로와 두 동료 순례자들이 함께 알베르게를 잠그고 땡땡이치듯 뒷골목 카페로 가서 스페인의 독주를 마시며 호스피탈레로의 살아온 이야기를 들었다. 그래, 평범한 하루란 없지. 현실은 늘 상상을 훌쩍 뛰어넘곤 하니까. 이런 하루는 도대체 어떤 노래가 될까 생각하다 문득 옛 노래 하나가 떠올랐다.

까마득히 오래 전, 그야말로 청춘 시절에 지은 노래다. 사당동에서 후배와 함께 작은 녹음실을 운영하던 시절, 술을 마시면 관악산 자락을 타고 관음사로 올라가곤 했다. 그날, 절 담장에 기대 앉아 스님의 독경에 맞춰 간절하게 밤새 절을 올리던 어느 어머님을 바라보다 돌아와 노래를 썼다. 이 노래를 맘에 들어 해서 녹음하려던 후배는 이른 나이에 먼저 세상을 떠났다. 소식을 듣고 뭐가 그리 급했니, 라고 생각했다.

어쩌면 나는 철십자가의 수많은 돌무더기 앞에서 내 것과 내 것이 아닌 슬픔과 사연들을 같이 느꼈던 것인지도 모르겠다. 그리고 그 수많은 슬픔과 사연들 사이에서 까무룩 잠이 들었다.

관음사 가는 길

길 옆 나무들에게 나는 물었지
난 왜 이 세상에 왔나 나무야 말해줘
다가온 별들에게 나는 물었지
난 왜 이 세상에 있나 별아 말해줘
너는 홀로 왜 그렇게 우뚝 서있고 그렇게 찬란히 빛나나
나는 홀로 왜 이 어지러운 아스팔트 위에 외롭게 서있나
이 세상 모든 슬픔이 모두 다 내게 몰려와
얘기해달라고 하네 사람들에게 말해달라고

_ 안석희 (1995)

_ <카페의 서재> 제2권 《산티아고 길노래》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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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 안석희
안석희 님은 ‘유인혁’이라는 필명으로 1990년대를 풍미한 <바위처럼>을 비롯해 많은 노래를 지었습니다. 2016년 산티아고 순례길을 걸었고, 여행에서 만든 노랫말에 곡을 붙였고, 최근 《산티아고 길노래》를 출간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