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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로스 인문학] 마리안네의 ‘그 일’

‘말도 안 돼, 어떻게 그럴 수가 있어!’

에로스인문학1.jpg<마리안네의 ‘그 일’>은 사르트르로부터 ‘전후 독일문학의 대표적 작가’로 극찬을 받은 한스 노삭(Hans E. Nossack)의 장편소설,《늦어도 11월에는》에 대한 글이다.

그녀의 이름은 마리안네.

그녀의 가족이나 친구들은 ‘마리안’이라고 불렀다. 1930년대, 독일 함부르크에 ‘헬데겐’이라는 이름의 회사가 있었다. 직원이 3,000명이 넘는 헬데겐사의 사장은 막스인데, 마리안네는 막스의 아내이다. 마리안네는 엄마의 자장가를 듣고야 잠이 드는 어린 아들 ‘권터’와 헬데겐사의 창업주인 시아버지와 함께 살고 있다. 마리안네는 커다란 집의 안주인 역할을 하며 6년 동안 살았다. 하루하루를 견디면서 무엇인가를 기다리던 시간이었지만, 그렇다고 불행이라고도 말할 수 없는 그런 일상들이었다.

그녀에게는 자신을 잘 숨기는 재주가 있었다. 그래서 주위 사람들은 그녀가 행복한 줄 알았다. 마리안네는 세상 사람들이 다들 그렇게 산다고 생각했다.

마리안네는 그녀의 운명을 결정지었던 그 때 일련의 사건들을 ‘그 일’이라고 표현했다. 그리고 그녀는 ‘그 일’에 관해 이렇게 생각했다. ‘그 일에 대한 설명은 쉽지가 않다. 사람들은 고개를 저으며 이렇게 말할 것이다. 말도 안 돼. 어떻게 그럴 수가 있어!’

그녀의 예측은 옳다. 그녀가 경험한 ‘그 일’에 대해 이야기를 들으면 대부분의 사람들은 말도 안 되는 일이라고 말할 것이다. ‘그 일’이 일어나던 그 때, 마리안네는 아무런 계획도 대책도 없었지만 그 순간 다른 어떤 생각도 끼어들 수 없는 자명한 선택이라고 확신했다. 하지만 시간이 흐른 뒤 그녀조차도 다른 사람들처럼 ‘그 일’은 변명의 여지가 없는, 말도 안 되는 일이라고 고백한다.

마리안네의 ‘그 일’은 ‘조촐한 다과모임’에서 시작되었다.

함부르크 상공인협회에서는 기업의 사회공헌차원에서 문학상을 제정하고 시상식을 거행했다. 문학상의 공식적인 주관사는 상공인협회였지만, 행사에 소요되는 비용은 막스의 회사 에서 지불했다. 따라서 막스는 가장 중요한 후원자로서 문학상 시상식에 참석해야 했다. 그러나 사회적 체면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돈을 대기는 했으나, 문학에 대해서는 눈곱만큼도 관심이 없던 막스는 회사 업무를 핑계로 시상식에 참석하지 않고 대신 아내 마리안느를 보냈다.

시상식이 끝나고 다과모임은 미술관 강연회장에서 열렸다. 사람들은 음식 접시를 들고 얘기를 주고받고 있었으며, 마리안느도 남편을 대신하여 아는 사람들과 인사를 나누고 있었다. 그녀의 손에는 음식접시와 함께 시상식 프로그램이 인쇄된 구겨진 종이가 들려져 있었는데, 거기에는 이번에 문학상을 받게 된 ‘베르톨트 묀켄’이라는 소설가의 이름이 적혀있었다.

이미 눈치 챘겠지만, 마리안네의 ‘그 일’은 베르톨트와의 만남에서 시작된다. 여기서 한 가지 밝혀두자면, 마리안네의 ‘그 일’은 크게 두 단계로 나뉘어 진행된다. 첫 번째 단계는 지금 이야기가 진행되고 있는 시상식 이후 다과모임에서 일어나게 되고, 두 번째는 그 후 일어난다.

마리안네는 시상식에 참석하기 전 베르톨트의 소설을 읽었으나 대단한 감흥 같은 것은 느낄 수 없었다. 그리고 축하모임에서 베르톨트의 모습을 처음 보았다. 그 때에는 ‘그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시간이 흐를수록 다과회의 분위기는 무르익고 더욱 많은 사람들이 베르톨트에게 주목했다. 하지만 마리안네는 너무나 지루해서 십분 후에는 무슨 핑계든 대고 행사장을 나가야겠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 때까지의 시간은 마리안네에게는 헬데겔사의 사장 아내로서 수없이 반복했던 권태로운 일상일 뿐이었다.

그 무렵 베르톨트가 연단에 올라가 수상소감을 곁들인 간단한 강연을 시작했다. 그 때에도 마리안느는 베르톨트의 말을 듣지 않았다. 날씨 탓인지 너무나 피곤했다. 하지만 헬데겔사 사장 아내로서 피곤하고 지루한 기색을 노골적으로 드러낼 수는 없었다. 마리안느는 마음을 고쳐먹고 베르톨트의 강연을 열심히 듣는 척이라도 하기로 했다.

‘그 일’은 마리안네 조차도 눈치 채지 못할 만큼 고요하고 섬세하게 시작되었다.

강연을 하는 베르톨트의 모습을 가만 보고 있노라니 그가 조금씩 다르게 보이기 시작했다. 이유는 모르겠지만 그에게 호감이 느껴졌다. 한번 관심을 갖기 시작하자 그의 사소한 동작들도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 이상은 아니었다. 그러나 주목해야할 점은 베르톨트의 강연이 끝날 때까지 그녀의 시선은 계속 그에게 머물러 있었다는 사실이다. 그것이야말로 바로 ‘그 일’의 시작이었다.

강연이 끝나고도 그녀의 시선은 베르톨트에게 머물러 있었다. 도대체 그녀는 베르톨트에게서 눈을 뗄 수 없었다. 그녀는 다른 사람들과 이야기를 하면서도 계속 그를 지켜보았다. 그 사이 몇 번인가 베르톨트가 쳐다보는 것 같은 느낌이 들자 그녀는 자신도 모르게 몸이 움츠러들었다. 그녀를 바라보는 그의 시선을 담담히 받아들일 수 없었다. 그러다 그녀가 용기를 내서 쳐다보면 그는 재빨리 시선을 돌렸다. 그녀는 문득 그녀를 바라보는 그의 시선이 어쩌면 그녀의 착각일지도 모른다는 생각도 들었다. 그러나 그런 그의 눈길이 점점 자주 느껴지자 그의 시선도 그녀에게 머물러 있음을 확신할 수 있었다. 그녀 자신도 모르게 숨겨져 있던 에너지가 작은 틈새로 빠르게 새어나와 그녀의 감성과 육체를 서서히 장악해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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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그 때, 그가 그녀 쪽으로 다가왔다.

아주 천천히... 그러나 거침없이 똑바로 그녀를 향해 걸어왔다. 그녀는 그 시간이 너무나 길게 느껴졌다. 그리고 마치 감독의 지시를 받은 배우처럼 그녀도 그를 향해 걸어갔다. 두 사람은 무척 가까운 거리에서 걸음을 멈추고 서로 마주 보고 서 있었다. 다과회장은 여전히 시끄럽고 혼잡했지만, 그녀의 주변에는 뿌연 안개로 가득 덮여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았다. 그녀는 그 순간이 영원처럼 느껴졌다. 영원과 같은 순간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남아있는 전생애와 바꿀 수 있는 그런 순간이다. 다른 어떤 것도 그 순간만큼 두 사람을 행복하게 만들지 못한다는 걸 두 사람 모두 깨닫고 있었다. 그리고 그가 그녀에게 말했다.

“당신과 함께라면 이대로 죽을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만일 그가 그녀에게 다가와 “당신과 함께 영원히 살고 싶습니다”라고 말했다면 그녀는 곧바로 그의 말이 거짓임을 알았을 것이다. 하지만 그는 그녀에게 “당신과 함께라면 이대로 죽을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라고 말했다. 그러자 그녀는 그저 담담히 “네”라고 대답했다. 그녀는 그의 말이 진실이라는 걸 알았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의 말이 너무나 자연스럽고 당연하게 들렸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그가 그녀에게 한 말은 그녀가 이미 마음속으로 그에게 한 말이기도 했기 때문이다.

그의 말을 듣고 그의 얼굴을 바라보면서 그녀는 또 다른 신비를 경험한다. 그 때 그녀가 본 그의 얼굴은 지금까지와는 완전히 다른 얼굴이었다. 무어라 말로 표현할 수는 없지만 그의 얼굴은 무척 행복해 보였고, 그녀는 그것이야말로 그의 진짜 얼굴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녀가 본 그의 또 다른 얼굴은 그녀의 사랑이 만든 환상이 결코 아니다. 그녀의 예측은 옳았다. 그의 얼굴이 이전과 다른 이유는 그 순간 베르톨트, 그는 가장 순수하고 가장 완전한 행복에 빠져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행복이 그의 눈빛과 그의 미소를 통해 그녀에게 보인 것이다. 마치 태고적 에덴동산에서 완전한 행복과 함께 잃어버렸던 우리의 진짜 얼굴이 사랑을 통해 그에게 드러난 것이다.

그녀가 그의 진짜 얼굴을 보게 된 것은 ‘그 일’이 창조한 또 다른 신비인 것이다.

완전한 행복으로 빛나는 그의 진짜 얼굴을 보는 신비로움 속에 그녀는 갑자기 두려운 마음이 들었다. 처음으로 겪어보는 신비로운 체험의 소용돌이 속으로 발가벗겨진 채 무방비로 던져진 자신의 모습을 발견했기 때문이다. 너무나 거센 소용돌이에서 벗어날 수 없을 것 같았기 때문이다. 그녀가 가장 두려웠던 것은 그녀 앞에 서 있는 그가 누구인지 그녀는 전혀 알 지 못한다는 사실이었다.

그녀에게 그는 무엇인가. 아무런 정보도 없고, 아무런 인연도 없고, 아무런 이해관계도 없는 완전한 타인, 완전한 이방인이지 않은가. 그녀에게 그는 가늠할 수 없고, 예측할 수 없고, 분류할 수 없는 완전한 타자, 무소(無所)의 아토포스(Atopos; 정체를 알 수 없는)인 것이다. 여기까지가 마리안네가 겪은 ‘그 일’의 첫 번째 단계이다. 사실 사람들이 마리안네의 ‘그 일’에 관해 말도 안 된다고 하는 건 다과회 이후 벌어지는 ‘그 일’의 두 번째 단계 때문이다. 사람들이 ‘그 일’이 말도 안 된다고 하는 이유는 ‘그 일’을 말로 설명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런 의미에서라면 다과회에서 마리안네와 베르톨트 사이에서 벌어진 일이야말로 말로 설명할 수 없는 일이다.

이 정도라면 ‘그 일’이 말도 안 된다고 말하는 사람들도 ‘그 일’이 자신의 인생에서도 한번쯤 일어나길 기다리게 될 것이다. 하지만 ‘그 일’의 두 번째 단계에서 전개되는 상황을 보면 ‘그 일’에 대한 호기심보다 두려움이 더 커질 것이다. 그리고 또 한 번 “말도 안 돼. 어떻게 그럴 수가 있어!”라고 말할 것이다. 

글 | 최종태
최종태 님은 영화감독으로서 <플라이 대디>, <해로>를 연출했으며 뛰어난 영상미와 절제된 연출력을 인정받아 2012년 대종상 신인감독상을 수상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