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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산책] 사춘기에 만났던 시인 백석

가족이여, 사랑이여

[문학산책] 사춘기에 만났던 시인 백석.

고등학교 2학년 때의 일이다. 서울에서 올림픽이 열리고 해외로 여행가는 것이 자유로워지면서 경직됐던 사회 분위기가 많이 유연해지고 있었다. 물론 이런 일들은 정당한 권위를 인정받지 못하던 당시 정권의 의도되고 기획된 연출이었다. 이유야 어찌되었던 그 덕분에 내게도 잊지 못할 기억이 하나 생겼다. 

고등학교 동아리 활동이란 게 지금의 학생들처럼 자신의 개성과 취미를 좇아 자유롭게 이루어지던 시절은 아니었다. 그나마 문학에 조금 관심이 있었던 터라 문예반에 별 고민 없이 가입했다. 지금 생각해보면 거의 제비뽑기처럼 이루어지던 동아리 선택에서 문예반에 가입했던 건 참 괜찮은 선택이었다. 내실보다는 생색내기에 급급했던 대부분 다른 동아리와 달리 젊은 문예반 선생님의 열정은 우리들에게 문학에 좀 더 많은 관심을 가지게 해 주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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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주변에 없던 존재들이 떠올라

여름 방학을 얼마 앞두고 있던 때로 기억한다. 문예반 지도 선생님께서 두툼한 서류 봉투를 들고 들어오시더니 누런 시험지 색깔이 나는 갱지 몇 장씩을 나누어 주셨다. 그때는 지금처럼 복사가 쉬운 일이 아니었다. 인쇄물을 만들자면 원고를 준비해 업무를 보시는 분께 미리 부탁해 등사기로 일일이 밀어야 했다.

선생님께서 나누어주신 복사지 위에는 그 까칠까칠했던 종이의 질감만큼이나 낯선 시인들의 시가 인쇄되어 있었다. 나중에 설명을 들어서 안 사실이지만 북녘 문인들의 작품이 이른바 ‘해금’된 것이다. 그렇게 해금이 되자마자 선생님께서는 작품을 직접 골라 등사를 해서 우리들에게 그 시인들의 존재를 처음 알려 준 것이었다. 정지용, 백석, 이용악 시인 등의 이름이 생판 처음 들어보는 북한 사투리와 함께 그곳에 가득히 자리 잡고 있었다.

세 명의 시인들 시 중에서 단박에 내 눈길을 이끌었던 사람은 백석의 <국수>라는 시였다. 어머니가 일찍 돌아가시기도 했지만 다른 상황들도 여의치 않아 도시락을 못 싸고 학교에 다니던 상황이었다. 그래서 인지 나는 늘 배가 고팠다. 용돈으로 식당에서 밥을 사먹을 수는 있었지만 그 밥은 늘 허기졌고 혼자 사먹는 밥은 서둘러 해결해야 할 하나의 ‘한 끼’에 불과했다. 먹고 싶은 음식을 먹을 수 없다는 점에서 내게 식사시간은 생존의 한 수단이었지 여유를 가지고 누군가와 나누는 음식은 아니었다.

그런 상황에서 읽은 백석의 <국수>는 그때 내 주변에 없던 존재들을 하나하나 새롭게 떠올리게 했다. 부모님이 모두 돌아가신 상태의 가족, 어쩔 수 없는 이유로 고향을 떠나 서울로 이주해 적응해야 했던 상황 등이 울컥하며 마음 깊은 곳에서 스멀스멀 올라왔다. 모든 게 부족하고 결핍되었던 현실에서 고등학생의 신분으로 혼자서는 어찌하지 못하는 막막함이 끝내 서러움으로 터져버린 것이다.

친구들에게 눈물이 고인 눈을 감추느라 고개를 푹 숙이고 몇 번을 읽었던 그 시는 가려진 눈물 때문인지 뿌옇게 보였고, 몽롱해 보였고, 드디어는 함께 식구들이 온전히 모여 살았던 때의 기억을 마치 별이 빛나는 것처럼 느끼게 했다.

눈이 와서 / 산엣새가 벌로 나려 멕이고 / 눈구덩이에 토끼가 더러 빠지기도 하면 / 마을에는 그 무슨 반가운 것이 오는가보다 / 한가한 애동들은 어둡도록 꿩사냥을 하고 / 가난한 엄매는 밤중에 김치가재미로 가고 / 마을은 구수한 즐거움에 사서 은근하니 흥성흥성 들뜨게 하며 / 이것은 오는 것이다. / 이것은 어늬 양지귀 혹은 능달쪽 외따른 산옆 은댕이 예데가리밭에서 / 하로밤 뽀오얀 흰김 속에 접시귀 소기름불이 뿌우현 부엌에 / 산멍에 같은 분틀을 타고 오는 것이다 / 이것은 아득한 옛날 한가하고 즐겁든 세월로부터 / 실 같은 봄비 속을 타는 듯한 녀름볕 속을 지나서 들쿠레한 구시월 갈바람 속을 지나서 / 대대로 나며 죽으며 죽으며 나며 하는 이 마을 사람들의 으젓한 마음을 지나서 텁텁한 꿈을 지나서 / 지붕에 마당에 우물둔덩에 함박눈이 푹푹 쌓이는 여늬 하로밤 / 아배 앞에 그 어린 아들 앞에 아배 앞에는 왕사발에 아들 앞에는 새끼사발에 그득히 사리워 오는 것이다 / 이것은 그 곰의 잔등에 업혀서 길여났다는 먼 옛적 큰마니가 / 또 그 집등색이 서서 자채기를 하면 산넘엣 마을까지 들렸다는 먼 옛적 큰 아바지가 오는 것같이 오는 것이다 // 아, 이 반가운 것은 무엇인가 / 이 히수무레하고 부드럽고 수수하고 슴슴한 것은 무엇인가 / 겨울밤 쩡하니 닉은 동티미국을 좋아하고 얼얼한 댕추가루를 좋아하고 싱싱한 산꿩의 고기를 좋아하고 / 그리고 담배 내음새 탄수 내음새 또 수육을 삶는 육수국 내음새 자욱한 더북한 삿방 쩔쩔 끓는 아르굴을 좋아하는 이것은 무엇인가 / 이 조용한 마을과 이 마을의 으젓한 사람들과 살틀하니 친한 것은 무엇인가 / 이 그지없이 고담(枯淡)하고 소박(素朴)한 것은 무엇인가

_ 백석, <국수> 전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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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름철이면 더욱 생각나는 ‘국수’ 같은 시

시인의 이름만큼이나 독특했던 시, <국수>는 음식과 관련한 화자의 기억을 통해 공동체의 향토적 정감을 개성적으로 드러내고 있었다. 시란 뭔가 의미심장하고 철학적인 사색과 같은 쉽게 범접하기 어려운 고상한 것이라고 생각했던 시절이라 그 흔한 국수를 가지고 시를 쓴다는 자체가 특히나 충격적이었다. 선생님의 설명을 들으며 무엇보다 북한의 실제 생활과 관련한 감각적인 시어가 연이어 제시되면서 북방지역의 식생활을 마치 눈앞에서 보듯이 생생하게 재현해 내는 것이 신기할 정도였다.

평화롭고 정감 있는 고향 마을의 정경을 펼쳐 보임으로써 북한을 한 번도 경험한 적이 없는 나에게도 적지 않은 공감을 불러일으켰다. 평안도 방언에 담긴 토속성이, 사는 곳을 넘어 국수라는 음식에 대한 애정을 충분히 표현해 내는 점은 시에 대한 근본적인 생각을 바꾸게 했다. 별다를 것 없는 소재에서 시인의 인식이 얼마나 아름다운 상상력으로 빛날 수 있는지를 여실히 보여준 점에서 특별한 시였다. 다만 지금도 그렇지만 평안도 지역의 사투리가 많아 읽는 데 약간의 어려움이 있을 뿐이다.

시의 이해를 돕기 위해 몇 개의 시어를 풀이하자면 이러하다. ‘김치가재미’는 북쪽 지역의 김치를 넣어 두는 창고를 이른다. ‘양지귀’는 햇살의 바른 가장자리이며, ‘은댕이’는 가장자리를 의미한다. 한자어에 감염되지 않은 우리의 고유어는 언제나 질박하지만 따뜻한 어감과 의미로 우리에게 다가온다는 것을 또 한 번 느끼게 해준다. ‘예대가비밭’은 산의 맨 꼭대기에 있는 오래된 비탈밭을, ‘산멍에’는 이무기의 평안도 토속 사투리이다. ‘분틀’은 국수를 뽑아내는 틀이고, ‘큰마니’는 할머니를, ‘삿방’은 갈대를 엮어서 만든 자리인 삿을 깐 방을 뜻하며 ‘아르굴’은 아랫목을, 탄수는 식초, 당추가루는 고춧가루를, 고담은 속되지 않고 담담함을 뜻한다.

여름철 시원한 메밀국수나 맛깔스런 평양냉면을 먹을 때면 이 시는 여지없이 톡 쏘는 식초처럼 기억을 자극한다. 음식은 단순히 허기를 때우는 요깃거리가 아니다. 한 개인을 넘어 집안으로 확대되고 나아가 민족의 동질성과 문화를 지배한다는 것을 생각해보면 성스러운 상징이 될 수도 있다. 음식이 맞지 않아 외국여행에서 고생을 해 본 사람이라면 아마도 충분히 공감할 수 있을 것이다.

그래서였을까? 시인은 국수를 먹으면서 ‘국수는 어떤 것이다’고 정의를 내려 의미를 제한하지 않고 국수를 ‘이것’이라고 부름으로써 국수가 불러일으키는 정서를 더 크게 열어 놓는다. 또한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반복해 제기하는 것은 느낌을 단순히 강조하기 위한 문장의 꾸밈을 넘어서 민족적 동질성에 대한 확장을 통해 공감이 확인되는 것이다.

열여덟 살 고등학생이 시를 완벽히 이해했다고 할 수 없지만 북한 어느 지역에서 사람들이 국수를 먹는 모습이 어렴풋하게나마 이미지로 그려지면서 좋은 시가 어떠해야 하는지를 조금이나마 알게 해준 잊지 못할 작품이었음에는 분명하다.

서정시, 비논리와 직관의 아름다움

가난한 내가 / 아름다운 나타샤를 사랑해서 / 오늘밤은 푹푹 눈이 나린다 // 나타샤를 사랑은 하고 / 눈은 푹푹 날리고 / 나는 혼자 쓸쓸히 앉어 소주(燒酒)를 마신다 / 소주(燒酒)를 마시며 생각한다 / 나타샤와 나는 / 눈이 푹푹 쌓이는 밤 흰 당나귀 타고 / 산골로 가자 출출이 우는 깊은 산골로 가 마가리에 살자 // 눈은 푹푹 나리고 / 나는 나타샤를 생각하고 / 나타샤가 아니올 리 없다 / 언제 벌써 내 속에 고조곤히 와 이야기한다 / 산골로 가는 것은 세상한테 지는 것이 아니다 / 세상 같은 건 더러워 버리는 것이다 // 눈은 푹푹 나리고 / 아름다운 나타샤는 나를 사랑하고 / 어데서 흰 당나귀도 오늘밤이 좋아서 응앙응앙 울을 것이다

_ 백석, <나와 나타샤와 흰 당나귀> 전문

시에 등장하는 화자는 가난하고 쓸쓸한 사람이다. 화자는 아마 러시아인으로 추정되는 ‘나타샤’라는 여인을 사랑하지만, 현실에서는 그 사랑을 이루기 어렵다. 그래서인지 화자는 현실을 떠나 깊은 산골로 가려고 한다. 그러면서 사랑을 이룰 수 없는 세상한테 지는 것이 아니라 화자는 자신의 행위를 더러운 현실과 타협하지 않겠다는 의지라고 말한다. 그다지 어렵지 않게 쓰인 이 시는 특히 ‘나타샤’, ‘흰 당나귀’ 등의 이국적인 이미지를 통해 한 편의 아름다운 서정시를 완성하고 있다.

정작 내 눈길을 사로잡은 것은 시의 내용이 아니다. 소위 말하는 ‘연애시’ 부류야 굳이 백석이 아니어도 얼마든지 있다. 내게 정서적 충격을 안겨준 것은 백석의 시가 보여준 문장이었다. ‘가난한 내’가 ‘아름다운 나타샤’를 사랑하는 것과 ‘오늘 밤에 눈이 내리’는 것과는 어떤 논리적 인과관계나 과학적 근거의 연관성이 전혀 없다.

그런데도 시인은 두 사실을 연결시킴으로써 정서적 충격을 준다. 가난한 내가 나타샤를 사랑하는 것이 얼마나 우주적이고 근원적인 것인지를 논리를 파괴함으로써 당연시 해버린다. 지극히 주관적이지만 나는 이보다 위대한 사랑의 토로와 고백을 아직까지 본 적이 없다.

특히 매력적인 것은 이른바 종속적 연결어미의 탁월한 선택이 환기하는 아름다움이다. ‘가난한 내가 / 아름다운 나타샤를 사랑해서 / 오늘밤은 푹푹 눈이 나린다’라는 시의 한 문장은 사랑에 빠진 다른 사람들이 읽을 때도 그 감정을 대신 표현하는 데에 충분하리라. 이런 문장은 고치고 수정해서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라 시인의 천부적인 언어감각에서 우러나오는 게 아닐까.

‘비가 와서 땅이 젖었다’처럼 객관적 사실을 인과적으로 설명하는 문장에서 쓰이는 연결어미 ‘~서’가 이 시에서는 비논리적으로 쓰였지만 일상적이고 평범한 인식에 균열을 일으킨다. 자연현상인 눈을 끌어들였지만 그들의 사랑이 더욱 절절하게 전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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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이켜보면 이십 대에 한두 번 위태위태했던 사랑이 있었던 것 같다. 어쩌면 그게 사랑이었을까 싶은 경우도 있다. 그때마다 이 시를 읽었던 기억이 난다. 전체가 기억 나지 않아도 불쑥 “가난한 내가 / 아름다운 나타샤를 사랑해서 / 오늘밤은 푹푹 눈이 나린다”는 구절을 읊곤 했다.

논리를 넘어서는 아름다운 문장 하나를 가져보고 싶은 욕심은 비단 나만의 것은 아닐 것이다.

글 | 오형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