웹진 카페人  
카페의 서재
[산티아고 길노래] 길에서 먹고 마신 것

빵과 포도주, 함께 바라보는 별처럼

바로 이거지! 와인을 한 모금 마시자 목에 걸렸던 빵이 넘어갔다. 역시 빵에는 포도주. 순례길을 걷는 내내 어디서나 쉽게 구할 수 있는 바게트 빵을 즐겨 먹었다. 서양 사람들의 주식답게 싸고 맛나다. 와인도 쉽게 구할 수 있다. 순례길을 걷다보면 주위에 포도밭이 지천이다. 와인이 비쌀 까닭이 없다.

1.산티아고길노래.jpg

평소 아무거나 가리지 않고 잘 먹는 편이지만 순례길이라고 해서 꼭 수도사처럼 거칠고 검소하게 먹어야 한다고 생각하지는 않았다. 그래도 가능한 한 식비를 절약하고 싶어서 주로 요리를 해먹거나 도시락을 싸서 다니곤 했는데, 떠나올 때 챙겨온 ‘락앤락(플라스틱 밀폐용기)’이 신의 한수, 탁월한 선택이었다.

로마에 가면 로마법을 따르듯 산티아고 순례길에서는 순례자들이 즐겨 먹는 음식과 스페인 음식을 먹기로 했다. 한국 음식은 짐이 될 것 같아 따로 준비하지 않았다. 다행히 걷는 동안 빵에 잘 적응했다. 긴 바게트를 반으로 잘라 배낭 앞주머니에 나란히 꽂으면 마음이 든든했다. 곁들일 잼이나 버터, 끼워먹을 햄과 치즈, 토마토가 있으면 나무랄 데 없는 한 끼 식사가 되었다.

걸으면서 가볍게 먹을 비스킷과 견과류, 초콜릿, 거기에 사과나 천도복숭아 같은 과일을 조금 챙기면 어디를 걷든지 든든했다. 걷다가 배가 고프고 좋은 풍경이 있으면 아무데나 털썩 주저앉아 꺼내 먹었다. 물은 플라스틱 생수통에 담아 마셨고, 생수통은 며칠에 한 번씩 다른 생수를 사서 바꿨다. 물통 무게가 부담스러워서 한 결정인데 다음에는 가볍고 쓰기 좋은 텀블러를 쓰는 게 더 좋겠다고 생각한다. 먹고 마시는 것으로 큰 탈이 나지 않아 다행이었다.

스페인식 샌드위치인 ‘보까디요(Bocadillo)’ 만드는 법을 배웠을 때 신세계가 열렸다. 성당 앞 알베르게에서 침대를 배정받으려고 기다릴 때, 순례자 친구 프랜치스에게 배운 것이다. 돼지 뒷다리살로 만든 하몽이나 스페인식 소시지인 초리소를 사이에 끼워 먹으면 그만이다. 그렇지만 보까디요는 사먹기를 권하고 싶다. 그리 비싸지도 않고, 스페인의 대표음식답게 어디서나 괜찮은 맛을 낸다. 잘 모르는 한식당에 가서도 비빔밥을 시키면 기본적인 맛이 보장되듯이 보까디요를 시키면 거의 실패하지 않는다. 물론, 전주의 맛집에서 먹는 전주비빔밥이 남다른 경험인 것처럼 보까디요도 잘 하는 집에서 먹으면 감동이 배가된다. 산티아고로 들어가기 며칠 전 아르주아(Arzua)에서 먹었던 또르띠아(감자를 넣은 스페인식 오믈렛) 보까디요가 그랬다.

2.산티아고길노래_GettyImages-1152206240 (1).jpg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가 속해있는 갈리시아 지방의 공립 알베르게에서는 음식을 만들어먹기가 어려웠다. 지역 상권을 살린다는 취지 때문인지 주방은 있지만 식기가 없었다. 냄비가 없으니 뭘 만들어먹을 수가 없다. 인천 앞바다에 사이다가 떠도 ‘고뿌(컵)’가 없는 상황이랄까.

순례자들은 투덜거리며 근처 식당으로 갔고, 나도 투덜거리며 아르주아를 떠났다. 걷다보니 오후 1시가 훌쩍 넘었고 배가 고팠다. 그러다 숲 근처 식당에서 인생 보까디요를 만난 것이다. 그날 먹은 또르띠아 보까디요의 맛은 말로 설명할 수가 없다. 시장이 반찬이기도 했겠지만 살아서 이런 음식을 먹을 수 있다는 사실에 그저 감사하며 먹었다. 지금도 생각하면 침이 고인다. 그런 보까디요를 만들어보겠다 결심하고 틈틈이 시도했지만, 아무래도 지역 상권 살리기에 협조하는 쪽으로 방침을 바꾸는 게 나을 듯했다.

밥이 먹고 싶을 땐 쌀을 사다 밥을 지었다. ‘빠에야(Paella)’를 즐겨먹는 나라니 쌀은 흔했다. 몇 종류의 쌀을 사다가 밥을 지어보니 냄비 밥이라 뜸이 안 들었는데도 먹을 만했다. 갓 지은 밥에 올리브유를 두르고 야채와 계란, 햄을 듬뿍 넣어 볶음밥을 만들었다. 그렇게 만든 볶음밥을 ‘락앤락’ 도시락에 가득 채우고 어디서나 풍경 좋은 곳에서 꺼내 먹었다. 김치 대신 올리브 절임을 곁들였다. 볶음밥을 해서 먹고 다닌다는 소식을 ‘카카오톡’으로 전했더니 전직 순례자 친구가 ‘살딘’이라는 정어리 통조림을 소개해주었다. 굴 통조림과 더불어 요긴한 곁들이였다. 스페인도 우리처럼 삼면이 바다라 해산물이 풍요롭다. 갈리시아 특산물인 문어요리 ‘뽈뽀(Polpo)’도 좋았고 산티아고에 도착해서 먹었던 바닷가재도 다시 생각하니 침이 고이는 음식이다.

순례길의 거의 모든 식당에는 순례자들의 식사인 ‘페레그리노(Peregrino) 메뉴’가 있다. 샐러드 같은 전채와 메인요리 한 가지, 디저트 하나로 양이 꽤 푸짐하다. 와인도 병째 가득 나온다. 그래도 해먹는 것에 비하면 값이 꽤 비싼 편이라 밥 지을 기운이 없을 때에나 사먹었다. 사실 만족스러운 페레그리노 메뉴는 한 번도 먹어보지 못했다. ‘속죄의 길(?)’을 걷는 순례자 처지에 먹을 것을 불평한다는 게 가당치 않은 일이기는 할 터였다.

돌아보니 홍천 어르신 부부와 함께 걸을 때의 식탁이 풍성했다. 당신들도 먹는 걸 중요하게 여기셨고, 같이 걷는 친구들에게 아낌없이 베풀기도 하셨다. 온타나스부터 며칠을 동행할 때 하나 둘 일행이 늘어나 함께 밥을 나눠 먹는 식구들이 늘었다. 축구선수를 하다가 스포츠용품 회사에 합격하고 산티아고 길을 걷던 친구, 대안학교 출신으로 친구들과 함께 걷다 합류한 종수 씨, ‘빠란떼’를 가르쳐준 루치아노와 여자친구 레이첼, 호텔리어 프랜치스와 단짝 안토니오, 한국통인 캐나다 친구 제시, 이렇게 하나 둘씩 늘어난 다국적 멤버들이 날마다 잔치처럼 음식을 차려 함께 먹었다.

어느 날 누군가 삼겹살이 먹고 싶다고 하자 정육점에서 고기를 떼어와 굽고 삶아 푸짐하게 먹었다. 의자에 등을 깊이 기대고 배를 두드리며 이건 ‘한국식’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모두 함께 넉넉하게 배불리 먹어야 좀 먹은 것 같은 느낌이 드는 식사가 한국식이라고 하면 좀 이상한가? 함께한 스페인, 캐나다 친구도 흡족한 얼굴이었다. 다음날 아침 출발하기 전에 어제 남은 누룽지를 끓여서 나누어 먹었다. 이것도 한국식이 아닐까? 개운하고 든든했다.

피엘의 초대로 함께했던 비야프랑카(Villafranca) 알베르게의 식사는 프랑스식이었다. 샐러드에 발사믹 소스를 넣고, 토마토를 으깨 넣어 샐러드만으로도 풍성한 느낌이 들었다. 스파게티를 곁들였는데 어딘지 모르게 섬세한 맛이 났다. 페레그리노 메뉴에 나오는 스파게티는 좀 거칠면서 건조했고, 이탈리안 친구가 만들어준 스파게티는 풍성한 느낌이었지만, 피엘이 만든 스파게티는 섬세하고 맛깔스러워서 부드럽게 목을 타고 넘어갔다. 빵에 곁들이는 꿀과 버터도 왠지 프랑스의 느낌이 났다. 순례자들의 소박한 식탁에서도 나라에 따른 차이가 드러난다는 게 재미있었다.

순례길 메뉴로 ‘카페 콘 레체(café con leche)’를 빼놓을 수 없다. 우리 식으로는 ‘카페라떼’인데 묘하게 맛이 달랐다. 어느 틈엔가 중독되어 길을 출발하거나 쉴 때는 꼭 한 잔씩 마셨다.

오래 걷는 날은 역시 맥주다. 오 세브레이로(O cebreiro)로 가는 가파른 언덕길 카페에서 마신 맥주를 능가할 맛은 아직 세상에 없다. 가을 햇볕이 따갑게 내려 쪼이는 더운 날 1,300m 산 정상에서 마시는 맥주가 맛이 없다면 그게 더 이상하겠지만.

3.산티아고길노래.JPG
산티아고 순례길의 명소인 ‘철십자가’>

다시 빵과 포도주 이야기로 돌아와서, 사모사(Samosa)로 가는 길 시끌벅적한 시골장에서 빵을 팔고 있었다. 치즈 덩어리처럼 둥글게 생겼는데 만져보니 머리에 한 대 맞으면 기절할 것처럼 단단했다. 양이 좀 많을 듯해서 절반만 달라고 했더니 톱 같은 빵 칼로 쓱쓱 잘라주었다. 단단한 겉과 달리 안은 쫄깃해서, 제대로 구은 빵이란 이런 맛이구나 싶었다. 그야말로 빵의 ‘원형’을 만난 느낌이랄까, 뜸이 잘 든 밥처럼 감칠맛이 났다. 허겁지겁 빵을 먹다 그만 목이 막혔고, 그러자 앞에 놓인 와인에 절로 손이 갔다.

예수는 열두 제자들과 함께 한 마지막 만찬에서 빵(정확히는 효모가 없는 떡 같은 빵, 한자로 ‘무교병’이라 한다)을 떼며 “이것은 내 몸이다”라고, 포도주를 들고는 “이것은 새로운 계약을 맺는 내 피다”라고 말했다고 한다. 앞으로도 떡을 떼고 잔을 들면서 이것을 기념하라고 했단다. 이것이 복음서에 나오는 성체성사의 기원이다.

정말 멋진 비유와 상징이나 무겁기 짝이 없다고, 빵을 우물거리며 생각했다. 이렇게 맛난 빵과 와인에 그런 의미를 두시면 어찌 편하게 먹을 수 있겠어요. 저는 그저 ‘밥 노래’처럼 생각하란 말로 듣겠습니다.

 

밥은 하늘입니다.

하늘의 별을 함께 보듯이

밥은 서로 나누어 먹는 것

글. 사진 | 안석희
안석희 님은 ‘유인혁’이라는 필명으로 1990년대를 풍미한 <바위처럼>을 비롯해 많은 노래를 지었습니다. 2016년 산티아고 순례길을 걸었고, 여행에서 만든 노랫말에 곡을 붙였고, 최근 《산티아고 길노래》를 출간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