웹진 카페人  
카페의 서재
[문학산책] 유배(流配)가 잉태한 문학

몸은 갇혔으나 글은 천년을 가리라

조선 시대에는 어떤 형벌 제도가 있었을까? 기록에 의하면 크게 5가지로 구분되는 형벌이 있었다. 우선 가장 처벌이 약했던 태형은 회초리나 가벼운 체벌 도구로 종아리 등 신체의 일부를 때리는 형벌이다. 다음으로 태형보다 무거운 죄를 다스리는 것으로 장형이 있다. 사극에서 많이 본, 곤장으로 볼기를 때리는 형벌이다. 실제 이 형벌을 당한 사람들은 상당한 고통을 받았다고 한다. 곤장 100대를 맞은 사람은 죽는 경우도 있었다고 한다. 형편이 괜찮았던 집에서는 매를 대신 맞아주는 사람에게 품삯을 제공하기도 했다. 흥부가 매품을 팔기 위해 형장을 찾아가는 장면이 나오는 <흥부전>의 장면은 조선 시대에 실제 있었던 일이다. 또한 노동력을 제공해야 했던 형벌에 해당하는 도형은 강제 노역을 하는 것으로, 장시간의 노동을 감당해야 하는 매우 무거운 형벌이었다.

언제 끝날지 모르는 귀양살이의 고통

네 번째에 해당하는 형벌이 유형, 즉 유배를 가는 것이다. 정치적 견해가 맞지 않아 탄핵의 대상이 된 정치인들이 주로 이 형벌에 해당한다고 알고 있지만 실제로는 다양한 계층이 유배를 갔다. 귀양살이할 곳을 정하여 죄인을 유배시키는 것을 정배라고도 한다. 언제 유배가 풀리는 해배가 될지 모르는 상태로 귀양을 가기 때문에 육체적 고통뿐만 아니라 가족과 평생 떨어져 살아야 할지도 모른다는 정신적인 고통도 엄청났을 것이다.

유배를 가는 대상은 양반 사대부를 비롯해 비리를 저지른 중인계급도 포함되었다. 이외에 평민들도 대상이 되었으며 심지어는 노비들도 중죄를 범한 경우 유형을 치러야 했다. 흔히 귀양간다고 표현하는 이 형벌은 죄인들이 겪는 고통이 극심했던 조선의 대표적인 형벌 제도이다. 물론 가장 극단적인 형벌로 목을 옭아매어 죽이는 교형과 목을 베는 참형이 포함된 사형이 있기는 했지만, 인간적인 삶을 내려놓아야 한다는 측면에서는 상당한 중형에 해당하는 것만은 분명했다.

유배는 주로 환경이 열악한 북쪽 지방으로 가거나 남쪽의 먼 섬으로 가는 게 보통이었다. ‘삼수갑산을 가더라도 그 일만은 못하겠다’라고 할 때, 삼수와 갑산 지역은 대표적인 북쪽의 유배지인 셈이었다. 땅끝마을이라고도 부르는 해남이나 강진을 비롯해 보길도나 추자도, 제주도 등은 남쪽의 대표적인 유배지였다. 흥미로운 것은 유배가 신체를 가두는 형벌이었지만 정신마저 가둘 수는 없었다는 점이다. 유배를 살던 인물들이 유배지에서 성취한 정신의 결과물을 문학이라고 부른다면, 조선시대 우리 고전문학의 걸작들은 단연 유배문학이었다.
 

유배가 낳은 고전문학의 대표작들

육신이 유폐되면 정신이 더욱 살아나는 것인지도 모른다. 제목만 들어도 알만한 고전문학의 대표작들 상당수가 유배지에서 창작된 것들이다. 흔히 유배문학이라고 부르는 이런 작품들은 작가의 유배 체험을 배경으로 한다는 공통점이 있다. 시조와 가사로 상징되는 운문과 소설, 산문 등의 갈래에서 유배문학은 이론의 여지없이 고전문학의 맨 앞자리에 자리한다. 시조를 대표하는 문인인 윤선도는 유배 생활 중에 <견회요>라는 연시조를 비롯해 무려 40수에 달하는 <어부사시사>를 창작했다. 우리 고전문학의 중요한 갈래인 가사를 대표하는 정철의 <사미인곡> <속미인곡> 역시 유배지에서 창작된 것이었다.

비단 운문문학에서만 이런 경향이 드러나는 것은 아니다. 소설에서는 유배문학의 가치와 영향력이 더욱 두드러진다고 해도 지나친 말이 아니다. 물론 개인적인 판단이 끼어든 것이기는 하지만, 작품 면면을 살펴보면 크게 잘못된 말은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다. 가정사 소설의 최고작으로 꼽히는 <사씨남정기>와 후대의 소설에 크게 영향을 끼친 <구운몽>은 모두 유배지에서 창작된 작품들이다. 두 작품을 쓴 김만중은 단언컨대 조선 최고의 이야기꾼이었다. 이 외에도 뛰어난 산문을 여럿 썼던 정약용 역시 유배지에서 몇 백 권의 책을 썼다는 점을 상기하면 유배지는 우리 문학이 태동하고 성장해 온 가장 기름진 흙이었다.

문학산책1-2.jpg

남도의 풍광을 시의 언어로 채색한 윤선도

 

우는 것이 뻐꾸기인가 푸른 것이 버들 숲인가

노 저어라 노 저어라

어촌 두어 집이 안개 속에 들락날락

지국총 지국총 어사와

맑고도 깊은 소(연못)에 온갖 고기 뛰어논다.

_ <어부사시사> 중 ‘춘사 4수’

고려 시대부터 이어져 온 ‘어부가(漁父歌)’의 전통을 완성했다고 평가받는 이 작품은 작가가 전라남도 보길도로 유배갔을 때 창작한 것이다. 이 작품은 사계절을 배경으로 각 계절마다 10수씩, 모두 40수로 구성된 연시조이다. 유배지인 보길도의 풍광과 작가의 지향점을 아름다운 우리말로 표현하고 있다.

누구나 한 번쯤은 들어봤을 ‘지국총 지국총 어사와’라는 구절은 우리 문학에서 특별한 의미를 지닌다. 기존의 시조형식은 후렴구가 없다. 작가는 파격적인 형태를 창조함으로써 새로운 가치를 찾아낸다. 초장과 중장 사이에 후렴구 형식으로 쓰인 문장은 배를 타는 과정을 출항에서 귀항까지 각 수마다 달리 표현하고 있다. 종장 이후에 쓰인 후렴구에서는 노를 저을 때 나는 ‘찌끄덕 찌끄덕’하는 소리를 비슷한 한자어인 ‘지국총 지국총’으로 제시해 독창적인 문학성을 표현해 낸 것이다. 전원의 이상형에서 유유자적한 물아일체의 삶을 꿈꾸던 작가의 삶이 작품 전반에 손에 잡힐 듯이 구체화되어 있다. 제목에 소개된 어부(漁父)는 직업으로 물고기를 잡는 ‘어부(漁夫)’와 한자어가 다른 말이다. 사대부로서 어촌 마을의 자연을 즐기는 작가의 의도가 단어 하나하나에 섬세하게 표현되어 있다.

그의 또 다른 대표작인 <견회요>는 조선 광해군 때, 윤선도가 함경도 경원에서 귀양살이하면서 지은 다섯 수의 연시조이다. 견회는 ‘시름을 쫓다’ 또는 ‘회포를 품다’의 뜻으로, 사대부로서 그의 유교적 충효관이 드러나고 있다. 성 밖을 흘러가는 시냇물에 감정을 투영해서 임금을 향한 그의 사랑은 시냇물이 멈추지 않듯 밤낮없이 이어지고 있다고 고백한다.

추성(秋城) 진호루(鎭湖樓) 밖에 울며 흘러가는 저 시냇물아

무엇 하려고 밤낮으로 흘러가는가

임 향한 내 뜻을 좇아 그칠 줄을 모르는구나

_ <견회요> 중 ‘제3수’

정철, 가사문학의 품격을 완성하다

시조는 고려 말에 생겨나서 현재까지도 쓰고 읽는 갈래이지만 가사는 조선 시대에 발생해 개화기까지만 쓰이다 소멸된 장르이다. 가사문학을 대표하는 정철은 유배지에서 그의 문학을 정립한다. ‘전후미인곡’으로도 불리는 <사미인곡>과 그 속편인 <속미인곡>은 그가 선조 21년(1588년)에 전라남도 창평(지금의 담양)에 유배되어 있을 때 쓴 작품이다. 수능시험에도 단골로 출제되어 위키백과에 검색을 해보면 ‘대한민국 수험생의 뒷골브레이커’라는 재미있는 닉네임이 소개돼 있다. 이 말 한 마디가 이 작품의 가치를 단적으로 입증한다.

이 몸 태어날 때 임을 따라 태어나니 / 한평생의 연분임을 하늘이 모를 일이던가 / 나 하나 젊어 있고 님 하나 날 사랑하시니 / 이 마음 이 사랑 견줄 데가 전혀 없다 / 평생에 원하되 함께 지내자 하였더니 / 늙어서야 무슨 일로 외따로 두고 그리워하는고

…… <중략> ……

하루도 열두 때 한 달도 서른 날 / 잠깐 동안 생각을 말고 이 시름을 잊자 하니 / 마음에 맺혀 있어 뼛속까지 사무쳐 있으니 / 명의가 열명이 와도 이 병을 어찌하리 / 아아 내 병은 이 임의 탓이로다 / 차라리 사라져서 호랑나비가 되리라 / 꽃나무 가지마다 가는 데 족족 앉았다가 / 향기 묻은 날개로 임의 옷에 옮으리라 / 임이야 나인 줄 모르셔도 나는 임을 쫒아가려 하노라

_ <사미인곡> 중

이 노래는 후속편인 <속미인곡>과 더불어 우리의 말과 글이 문학성을 얼마나 잘 구현할 수 있는가를 증명하는 대표적인 작품이다. 여성 화자를 내세워 겉으로는 남녀 사이의 사랑을 표현하고 있지만 실제로는 임금에 대한 충절을 노래하는 충신연주지사의 대표작이다. 사계절의 시간 흐름에 임금에 대한 연모의 정을 얹음으로써 유기적 구성을 갖추고 있으며, 다양한 비유와 상징을 비롯해 문학적 표현 기법을 활용하여 화자의 정서를 효과적으로 드러낸다. 특히 첫 문장에 등장한 ‘임을 좇아 태어난’ 화자가 마지막 문장에서 ‘죽어서라도 임을 쫒아가려 하노라’고 마무리 짓는 데서 내용의 완결성을 갖춘 글의 구조가 돋보인다.

문학산책2-2.jpg
<구운몽> 원본(서울대 규장각 소장)

김만중이 간파한 세속적 욕망의 덧없음

<구운몽>은 김만중이 남해 유배 시절 어머니 윤씨 부인을 위로하고자 지었다고 전해지는 한글소설이다. 주인공 성진이 하룻밤 꿈에서 겪은 일을 작품의 골격으로 삼고 있다. 조선 숙종 때의 문신인 김만중은 1689년 숙종의 폐비 사건에 반대하다가 남해에 유배되어 그 곳에서 병사했다.

‘국문 가사 예찬론’을 비롯해 우리말에 대한 애착을 담고 있는 문학세계를 펼친 그는 자신의 호를 딴 <서포만필(西浦漫筆)> 등의 문집을 남겼다. 불제자 성진이 꿈속에서 현세적 공명주의를 좇아 국가와 군왕에게 충성을 다하고 세상의 온갖 영화를 누리고 깨어나지만 인간의 부귀영화는 하룻밤의 일장춘몽(一場春夢)에 불과하다는 불법의 진리를 깨닫는다는 내용이다.

이 이야기는 몇 가지 형식적 특징이 있다. 우선 ‘몽(夢)’자로 끝나는 계열의 소설을 뜻하는 몽자류 소설의 효시이다. 또한 이야기 안에 이야기가 들어 있는 일종의 액자 소설로 현실과 꿈이 교차하는 구성이다. 그리고 현실의 공간이 천상으로 설정되어 있고 꿈의 공간이 지상 세계로 설정되어 있는 독특한 구조를 취하면서 주인공의 꿈의 이야기가 소설의 주요 내용을 이룬다.

‘구운몽’이라는 제목부터가 ‘~전’ 일색인 고전소설과 다르다. ‘구(九)’는 주인공인 성진과 인연을 맺는 여덟 명의 여인을 가리키며 소설 구성 요소 중 하나인 ‘인물’을 뜻한다. ‘운(雲)’은 구름의 속성을 차용해 속세의 부귀공명이 모두 부질없다는 소설의 ‘주제’를 의미하고, ‘몽(夢)’은 꿈을 꾸면서 시작한 이야기가 꿈을 깨는, 이른바 입몽(入夢)부터 각몽(覺夢)까지를 의미하는 소설의 ‘구조’를 뜻한다. 제목에 인물, 주제, 구조적 형식을 표현하고 있는 셈이다.

한국문학을 연구하는 외국인 학자들이 자국의 언어로 번역하고 싶은 작품에 <구운몽>이 언제나 언급되는 것은 주목할 만하다. 풍속이나 지명, 이름 등 단순히 언어를 옮기는 번안과 달리 번역은 사상 체계를 이해하고 시대를 이해해야 한다. 유불선으로 표현되는 고전문학의 사상은 외국인들이 보기에 충분히 매력적일 수 있다.

생각해보면 꿈만큼 기묘하고 환상적인 서사 장치는 없다. 중국이 <삼국지>나 <손오공> 등의 텍스트를 다양한 영화적 모티프로 변주하는 것을 본다. 우리도 문화적 자신감을 가질 때가 되었다. 어쩌면 늦었을 수도 있다. <구운몽>은 영화적 서사로도 충분한 요소를 갖추었다. 상상해보라. 컴퓨터 그래픽으로 구현된 이 기묘하면서도 아름다운 사랑과 깨달음에 관한 이야기를. 우리의 문화적 역량이 제대로만 발휘된다면 최근 개봉된 <뮬란>의 가능성을 훨씬 넘어설 수 있을 것이다. 소설을 포함한 서사가 시대와 지역을 넘어서는 인간들의 욕망에 관한 이야기라면, <구운몽>은 이런 욕망이 철학적 사색과 가장 행복하게 만나는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유배를 창작의 배경으로 했던 문학적 성취들은 몸을 유배하는 순간, 정신이 살아서 튀어 올라 온 것들이다. 코로나바이러스가 언제까지 우리의 육체를 ‘유사(類似) 유배’에 묶어둘지 알 수 없다. 고전은 이럴 때일수록 우리에게 많은 것을 깨닫게 한다. ‘정신’ 차리면 우리도 무엇인가를 할 수 있지 않을까.

 

글 | 오형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