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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산책] 영원한 문학청년, 백석과 기형도

‘흰 바람벽’이 있는 ‘빈집’을 찾아서

우리 문단에는 영원한 청년으로 기억되는 두 명의 시인이 있다. 백석(白石, 본명 백기행, 1912-1996) 시인과 기형도(1960-1989) 시인이다. 두 사람을 영원한 청년이라고 지칭한 이유는 두 가지 이유에서다. 하나는 삶의 자취 때문이다. 백석은 분단으로 남한문단에서 사라진 문인이었다. 그의 대표작들은 분단 이전에 발표된 것들로 모두 청년기에 쓰였다. 기형도는 서른을 넘기지 못하고 일찍 생을 마감했다. 또 하나는 그들의 독창적인 작품 세계가 청년의 서슬 푸른 정신과 닮아있기 때문이다. 공교롭게도 두 시인 모두 한 편의 시집만을 남겼다는 공통점이 있다.

백석 시인은 후대의 많은 문인들이 그의 시 정신과 서정성을 재조명하기 위해 연구되고 있는 대표적인 1930년대 시인이다. 백석의 시집 《사슴》(1936)에 대해 시인이자 문학평론가였던 김기림은 서평에서 “백석의 시 세계는 그 시인의 기억 속에 쭈그리고 있는 동화와 전설의 나라”라고 평하며 “주착 없는 일련의 향토주의와는 명료하게 구별되는 ‘모더니티’를 품고 있다”고 극찬했다. 한편 기형도 시인의 시집 《입 속의 검은 잎》(1989)의 비평을 썼던 문학평론가 김현은 그의 시 세계를 ‘그로테스크 리얼리즘’이라고 평가하며 시인의 독창적인 시 세계를 추모한 바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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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구초심, 아련하게 그리운 고향을 향해

그런데 또 이즈막하야 어는 사이엔가
이 흰 바람벽엔
내 쓸쓸한 얼골을 쳐다보며
이러한 글자들이 지나간다
- 나는 이 세상에서 가난하고 외롭고 높고 쓸쓸하니 살어가도록 태어났다
그리고 이 세상을 살아가는데
내 가슴은 너무도 많이 뜨거운 것으로 호젓한 것으로 사랑으로 슬픔으로 가득 찬다
그리고 이번에는 나를 위로하는 듯이 나를 울력하는 듯이
눈질을 하며 주먹질을 하며 이런 글자들이 지나간다
- 하늘이 이 세상을 내일 적에 그가 가장 귀해하고 사랑하는 것들은 모두
가난하고 외롭고 높고 쓸쓸하니 그리고 언제나 넘치는 사랑과 슬픔 속에 살도록 만드신
것이다
초생달과 바구지꽃과 짝새와 당나귀가 그러하듯이
그리고 또 ‘프랑시스 쨈’과 도연명(陶淵明)과 ‘라이너 마리아 릴케’가 그러하듯이

_ 백석, <흰 바람벽이 있어> 중

 

이 시는 고향을 떠나 있는 화자가 쓸쓸한 흰 바람벽을 보며 자신과 주변 사람들의 삶을 떠올려 보는 감상을 한 편의 영상물처럼 그려 낸 작품이다. 어렵게 살아가는 ‘늙은 어머니’, ‘사랑하는 사람’이 스쳐 지나가면서 삶이 힘들지라도 좌절하기보다는 ‘가장 귀하고 사랑하는 것’을 모두 ‘넘치는 사랑과 슬픔 속에 살도록 하늘이 낸 것’이라는, 삶의 본질에 대한 긍정적인 인식을 드러낸다. 시는 현재 자신의 외롭고 힘든 처지를 극복하고자 하는 모습을 보여 주고 있다. ‘흰 바람벽’라는 시어에는 다양한 이미지가 포함되어 있다. 외풍을 겨우 막고 있는 초라한 집의 이미지가 드러나기도 하고, 가족과 헤어진 후의 쓸쓸한 모습이 표현되어 있다. 또한 고결함을 상징하는 하얗고 깨끗한 이미지가 투영되어 있기도 하다. 이 바람벽이 하나의 스크린이 되어 화자는 자신의 정서와 처지를 표현해 가치관을 집약시키기도 한다. 아울러 이 시어는 유리나 거울, 우물처럼 그것을 바라보는 사람의 모습을 비추며 내면을 성찰하게 하는 매개체의 기능도 한다.
 

이렇게 하여 여러 날이 지나는 동안에,
내 어지러운 마음에는 슬픔이며, 한탄이며, 가라앉을 것은 차츰 앙금이 되어 가라앉고,
외로운 생각만이 드는 때쯤 해서는,
더러 나줏손에 쌀랑쌀랑 싸락눈이 와서 문창을 치기도 하는 때도 있는데,
나는 이런 저녁에는 화로를 더욱 다가 끼며, 무릎을 꿇어 보며,
어니 먼 산 뒷 옆에 바우섶에 따로 외로이 서서,
어두워 오는데 하이냐니 눈을 맞을, 그 마른 잎새에는,
쌀랑쌀랑 소리도 나며 눈을 맞을,
그 드물다는 굳고 정한 갈매나무라는 나무를 생각하는 것이었다.

_ 백석, <남신의주 유동 박시봉방> 중


이 시의 제목은 남신의주 시에 있는 유동이라는 동네에서 목수 일을 하는 집주인 박시봉의 집에 방 한 칸 세 들어 있다는 뜻이다. 평안도 정주가 고향인 시인이 고향을 떠나 살고 있다는 것을 제목에서 알 수 있다. 일제강점기에 이루어진 가족공동체 해체라는 불가항력적인 절망과 무력감을 극복하고 자신의 삶도 나아지기를 바라는 마음은 ‘갈매나무’라는 상징적 시어를 낳았다. ‘갈매나무’는 ‘굳고 정한’ 나무로 제시되어 시련에도 꺾이지 않는 의연함을 상징한다.

또한 이 시는 다양한 사물들과 자연물들을 평안도 지방의 독특한 사투리로 표현하고 있어 향토성을 강하게 드러낸다. 모더니즘의 세례를 받았지만 자신의 고향 언어로 시를 쓴다는 건 일제강점기에 우리 모국어를 지켜내야 한다는 시인의 소신을 엿볼 수 있다.

부정적 현실에서 꿈꾸는 아름다운 사랑

가난한 내가
아름다운 나타샤를 사랑해서
오늘 밤은 푹푹 눈이 나린다

나타샤를 사랑은 하고
눈은 푹푹 날리고
나는 혼자 쓸쓸히 앉어 소주를 마신다
소주를 마시며 생각한다

나타샤와 나는
눈이 푹푹 쌓이는 밤 휜 당나귀 타고
산골로 가자 출출이 우는 깊은 산골로 가 마가리에 살자

_ 백석, <나와 나타샤와 흰 당나귀> 중

 

이 시는 필자에게는 매우 특별한 순간을 떠올리게 한다. 고등학교를 다닐 무렵 봄으로 기억된다. 동아리 활동으로 참여하고 있던 문예부 시간이었다. 담당 선생님이 프린트 몇 장을 나누어 주셨다. 그리고는 아무 말씀도 하지 않으셨다. 그때 이 시를 읽으면서 코끝이 찡해질 정도로 충격을 받았다. 시험문제로 출제되는, 누군가가 중요하다고 밑줄로 자르고, 시험에 꼭 나온다고 단정하던 그런 시가 아니었다. 아마 그런 의미에서 스스로 느끼고, 스스로 시를 들여다보라고 선생님은 아무런 말도 없으셨던 것 같다.

눈이 푹푹 내리는 겨울밤을 배경으로 부정적인 현실로 인해 고뇌하는 화자의 사랑하는 여인을 향한 간절함이 시에 드러난다. 필자가 정서적 충격을 받았던 부분은 1연에 3행으로 제시된 한 문장이다. 문법시간에 배운 바로는 ‘~(어)서’는 인과관계를 나타내는 종속적 연결어미이다. 이 문장은 문법적으로는 분명 비문이다. 형식적인 문법의 틀이 파괴될 때 정서적 파급력은 극대화된다. ‘가난한 내가 아름다운 나타샤를 사랑’하는 것과 ‘오늘 밤은 푹푹 눈이 나리’는 것과는 인과적 관계가 없다. ‘가난한’ 사랑이지만 얼마나 간절하면 ‘눈이 내리’게도 할 수 있는지, 그 때 곰곰이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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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사 재직 시절의 백석(1937년)


백석 시인의 여러 일화 중 하나를 소개한다. 시인은 연인이었던 김자야 여사와 분단으로 이별을 해야 했다. 많은 부를 축적했던 여사는 1980년대 당시 1천억 원에 가까운 재산을 기부하며 사람들을 놀라게 했다. 재산이 아깝지 않느냐는 어느 기자의 질문에 이렇게 답했다고 한다. “내가 번 돈 전부를 다 합쳐도 백석 시인의 시 한 줄의 값어치도 되지 못합니다.”

공포와 절망에서 끌어올린 보석

기형도 시인이 가난과 가족의 죽음 등 유년기의 상처에 대해 쓴 시들을 읽으면 체험이 시로 구체화되는 과정을 깊이 이해할 수 있다. 특히 독창적인 시 정신을 구체적 언어로 표현하는 부분에서 시적인 매력이 강력하다. 무차별적으로 가해지는 폭력이 미세한 일상에까지 스며들어 있음을 감지하는 시인의 시들은 부조리한 현실과 조화를 이루지 못하는 현대인들의 삶을 보여준다. 특히 감각적 이미지와 밀착된 시들을 통해 시적 구조를 이해하면 시를 좀 더 깊게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기형도 시에 나타나는 촉각은 대상에 대한 구체적인 느낌을 있는 그대로 드러내는 정직한 지각 방식도 아니며, 대상에 가까이 다가가는 친밀한 감각도 아니다. 오히려 차갑고 축축한 촉각에 의해 사물은 변형된 형태로 나타나며, 그 결과 외부 세계는 기괴한 풍경으로 그려진다.”라는 한 평론가의 언급은 그의 시 세계를 잘 대변하고 있다.

내 유년 시절 바람이 문풍지를 더듬던 동지의 밤이면 어머니는 내 머리를 당신 무릎에 뉘 고 무딘 칼끝으로 시퍼런 무우를 깎아주시곤 하였다. 어머니 무서워요 저 울음소리, 어머니 조차 무서워요. 얘야, 그것은 네 속에서 울리는 소리란다. 네가 크면 너는 이 겨울을 그리워 하기 위해 더 큰 소리로 울어야 한다. 자정 지나 앞마당에 은빛 금속처럼 서리가 깔릴 때까 지 어머니는 마른 손으로 종잇장 같은 내 배를 자꾸만 쓸어 내렸다. 처마 밑 시래기 한줌 부스러짐으로 천천히 등을 돌리던 바람의 한숨. 사위어 가는 호롱불 주위로 방 안 가득 풀 풀 수십 장 입김이 날리던 밤, 그 작은 소년과 어머니는 지금 어디서 무엇을 할까?

_ 기형도, <겨울판화1 - 바람의 집> 전문

 

기형도 시인은 불우한 유년 시절을 보낸 것으로 알려져 있다. 복잡한 가정사가 그의 삶에 도사리고 있었고, 극심했던 경제적 어려움의 그의 유년기를 감쌌다. 그런 이유때문인지 그의 시는 주로 어둡고 비참한 세계를 그리고 있다. 이 시 역시 감각적 이미지를 통해 유년 시절을 생생하게 그리고 있다. ‘어머니조차 무섭다’는 공포감과 절망적 인식은 그를 그로테스크(음울한, 기괴한)한 시 세계로 이끌었을 것이다.

‘종잇장 같은 내 배’와 ‘방 안 가득 풀풀 수십 장 입김이 날리던 밤’의 이미지가 환기하는 극단적인 가난은 그가 떨쳐 버릴 수 없었던 삶의 환경이었다. ‘은빛 금속처럼 서리가 깔릴 때까지’라는 표현은 그의 공포감을 극명하게 드러낸다. 그럼에도 시인은 ‘그 작은 소년과 어머니’를 그리워한다. 공포와 절망적 상황에서도 시인은 모성에 대한 그리움을 토로하고 있다.

그의 대표작 중의 하나인 <빈집>을 읽어보면 그의 세계관은 더욱 극명하게 드러난다. 시인은 과거의 사랑과 관련된 아름다운 추억을 빈집에 넣고 문을 잠그려고 한다. 이 폐쇄적인 공간에 사실은 시인이 갇혔던 것은 아닐까. 사랑을 잃은 화자의 공허한 내면은 그렇게 허무하지만 강인한 자기부정으로 독자에게 강렬하게 다가선다. 이미 고인이 된 시인의 젊은 시절의 고통을 생각하면 가슴이 뻐근할 정도로 아파올 따름이다.

사랑을 잃고 나는 쓰네

잘 있거라, 짧았던 밤들아
창밖을 떠돌던 겨울 안개들아
아무것도 모르던 촛불들아, 잘 있거라
공포를 기다리던 흰 종이들아
망설임을 대신하던 눈물들아
잘 있거라, 더 이상 내 것이 아닌 열망들아

장님처럼 나 이제 더듬거리며 문을 잠그네
가엾은 내 사랑 빈집에 갇혔네

_ 기형도, <빈집> 전문

글 | 오형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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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집 《입속의 검은 잎》(문학과지성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