웹진 카페人  
카페의 서재
[삶이라는 빙판의 두께]

내 안에 도사린 이중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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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여 년쯤 전 고 마광수 교수의 작품을 처음으로 접했다. 그의 첫 소설집 《권태》는 당시의 사회적 통념을 한참 벗어나는 그야말로 파격적 내용이었기에 솔직히 읽기가 편치 않았다. 사디즘과 마조히즘, 페티시즘, 관음증적 묘사가 연속되는 그의 글은 품행만큼은 당시 기준에 부합하려 노력하던 내게 큰 충격을 안겼다. 지금이야 그 정도는 아무것도 아니지만 강요된 엄숙주의가 팽배하던 시절이었으니 그럴 만도 했다. 

시대를 앞서간 그에게 던진 돌

그의 문제작 《즐거운 사라》의 출간과 판매금지 조치가 1991년 일이고 강의 도중 구속된 게 1992년 일이니, 그가 본격적으로 필화를 당하기 전에 나는 마광수 교수의 문학세계 일부를 접한 셈이다. 아무튼 그는 법정에서 유죄판결을 받았고 대학에서 쫒겨났다가 김대중 정부에서 사면 복권되어 복직했으나 다시 해직되는 등 숱한 고초를 겪어야 했다.
지금 생각해 보면 그의 유일한 죄목은 시대를 앞서 살았다는 것 그 하나로 요약할 수 있을 듯하다. 통제와 억압이 횡행하던 시절 자유를 부르짖었고, 성적 담론 제기를 금기시하던 시절에 자유로운 연애와 성적 해방을 부르짖었으니 말이다. 특히 문학적 상상력과 표현의 자유를 부르짖고 지켜야 할 문인을 비롯한 지식인 사회의 냉담한 외면과 배척은 자유로운 영혼의 소유자인 그에게는 견디기 힘든 시련이었을 것이다. 

시대를 앞서간 탓에 그처럼 온갖 박해와 냉대 속에서 불행한 삶을 살았던 그가 2017년 스스로 목숨을 끊어 고난으로 점철된 삶을 마감했다. 그의 쓸쓸한 죽음을 계기로 소위 지식인입네 하는 사람들의 양면성과 이중성에 대해서 다시금 생각하게 되었다.

대세, 시류에 편승했던 지난 날

스스로는 일관성 있는 사람이라 주장해왔지만 이런 사안에 대해서는 나 또한 어중간한 태도를 나타냈던 것 같다. 분명한 입장 표명 없이 대세를 따르거나 시류에 편승하는 형태를 취했다. 회색분자 또는 기회주의자처럼 굴던 때가 많았다는 말이다. 

그건 명확한 태도를 드러내는 게 두려워서였을 수도 있고, 논리적 주장을 펼칠 만한 실력이 없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옹색하게 변호하자면 내게는 자기 현시욕이 없었노라는 허망한 논리나 꺼낼 수밖에 없겠다. 사실 그렇다면 의견 표출을 보류하거나 모르쇠 전략을 쓰는 게 더 정직했을 터이다. 아무튼 어정쩡하게 자신을 지식인의 카테고리에 끼워 넣으려던 얕은 생각이 현실과의 틈 속에 끼어 이중성을 드러내게 했는지도 모른다. 이만큼 살아오면서 이미 굳어버린 강고한 의식구조나 불명확한 생활 태도 같은 걸 지금 와서 바꾸기란 거의 불가능하다. 그렇다면 같은 잘못을 반복하지 않기 위해서 차라리 침묵하는 게 현명한 처신일지도 모르겠다. 비록 그런 태도가 기회주의적 처신이라 비난받더라도 말이다. 외면 또는 회피가 비겁한 행태일지라도 최소한 맹목적으로 추종하거나 시류에 편승하는 건 아닐 테니 그것을 작은 위안으로 삼을 수밖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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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카페의 서재> 제1권 《삶이라는 빙판의 두께》 중

 

삶이라는 빙판의 두께

《삶이라는 빙판의 두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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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 정충화
정충화 님은 국립원예특작과학원에서 식물해설사로 일하고 있습니다. 한눈에 척척 식물, 나무의 이름을 불러줍니다. 정년이 얼마 남지 않았지만 언제든 산과 들에서 만날 수 있는 식물들이 있어 든든합니다. 정년을 준비하며 썼던 글들을 모아 《삶이라는 빙판의 두께》를 출간했습니다.
“어정쩡하게 자신을 지식인의 카테고리에 끼워 넣으려던 얕은 생각이 현실과의 틈 속에 끼어 이중성을 드러내게 했는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