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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커피 in 가요] 그룹 ‘무당’의 <멈추지 말아요>

끝내 멈출 수 없었던, 뮤지션의 절규

[커피 in 가요] 그룹 ‘무당’의 <멈추지 말아요>.

1980년 6월 14일, 중장년들에게 아련한 추억으로 남아있는 레이프 가렛(Leif Per Garrett)의 첫 내한공연이 열린 날이다. 남산 숭의음악당 일대는 하루 종일 발 디딜 틈 없는 인파로 몸살을 앓았다. 아이돌 팬덤의 원조라 할 수 있는 미소년 팝스타를 만나려는 일념으로 전국 각지에서 몰려든 소녀팬들은 경찰의 제지에도 불구하고 공연장에 운집해 종일 레이프 가렛의 이름을 소리 높여 외쳤다. 

예정 시간보다 1시간 20분 늦은 8시 50분에 막을 올린 레이프 가렛의 공연은 그날 밤 남산 자락을 발칵 뒤집어 놓았다. 새로 지은 음악당 의자는 여지없이 파손됐고 유리창은 모두 깨져 나갔으며 주변 화단은 폭격이라도 맞은 듯 쑥대밭이 되었다. 공연 내내 레이프 가렛의 몸짓 하나 하나에 열광하던 여학생들은 북받치는 감정을 주체할 수 없어 오열했고, 여기저기서 실신하는 소녀들이 속출했다. 

레이프 가렛 내한공연이 남긴 것

전 세계 소녀 팬들의 우상이던 레이프 가렛에게도 한국 팬들의 열광적인 환호는 좀처럼 드문 경험이었을 것. 8일 동안 한국에 머물며 총 12회의 공연을 펼친 그의 공연은 전회 전석 매진을 기록했고, 숭의음악당의 두꺼운 철문이 부서져 나갈 정도로 매 공연마다 구름처럼 인파가 몰렸다. 특히 공연 중 일어난 소녀 팬들의 속옷투척 사건은 한국 공연사에 두고두고 회자된다.  

십대 소녀들이 흥분에 못 이겨 입고 있던 속옷을 벗어던지는 광경은 당시로서는 용납되기 힘든 일탈이었다. 신문 방송들이 이를 더 자극적으로 포장해 ‘10대의 광란’이니 ‘10대들의 타락’(그 10대가 2023년 현재 60대이다) 운운하는 기사들을 쏟아내면서 한동안 이미 예정돼 있던 해외 뮤지션들의 공연까지 줄줄이 취소되기도 했다. 1969년 클리프 리처드(Cliff Richard), 1992년 뉴 키즈 온 더 블록(New Kids On The Block)의 내한공연과 함께 ‘대한민국 3대 내한공연’으로 평가되는 레이프 가렛의 방문은 이렇듯 한국의 공연 역사에 적지 않은 화제를 남긴 사건이었다.

불과 몇 달 전 쿠데타로 정권을 탈취한 전두환 군사정권은 애초 레이프 가렛의 방한을 달갑지 않게 여겨 ‘공연 불허’ 결정을 내렸다고 한다. 10명 이상이 모이는 집회는 모두 불법으로 간주하던 계엄령 하의 군사정권은 이 행사가 대규모 정치집회로 이어지지 않을까 우려했을 것이다.
하지만 교착 상태에 놓여 있던 레이프 가렛의 방한은 당시 미국문화원 원장이 대통령을 만나 문화 교류의 필요성을 설득하면서 급물살을 탄다. “문화교류는 포탄이 왔다 갔다 하는 전시에도 막을 수 없다”는 말에 더 이상 불허 입장만 고집할 수가 없게 된 정부는 어쩔 수 없이 레이프 가렛의 내한을 승인한다. 

결국 당대 최고의 팝스타는 공연 당일인 6월 14일 아침 11시 45분에야 김포공항에 도착한다. 예정시간을 4시간이나 넘긴 지각 입국인 데다 열 시간이 넘는 비행의 피로를 풀 틈도 없었다. 그대로 저녁 무대에 오른다는 건 불가능해 보였다. 하지만 열여덟 살의 팝 스타는 예정대로 공연을 강행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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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장년들의 기억 속에 아련한 추억으로 남아있는 레이프 가렛(Leif Per Garrett)

오프닝 밴드 <무당>의 뜨거웠던 존재감

환영 인파를 뜨겁게 달군 레이프 가렛의 일거수일투족은 전 국민적 관심사였다. 그에 대한 관심 덕분에 일약 최고의 스타덤에 오른 밴드가 <무당>이다. 무명이었지만 레이프 가렛의 본 공연에 앞서 오프닝 무대를 장식했다. 당초 오프닝 무대에 서기로 한 것은 록 밴드 <사랑과 평화>였다. 하지만 공연을 앞두고 사운드가 더 풍부한 밴드로 교체해달라는 레이프 가렛의 갑작스런 요청으로 긴급 발탁된 게 미 서부 한인사회를 중심으로 활동하던 헤비메탈 밴드 <무당>이었다. 레이프 가렛 내한공연의 가장 큰 수혜자였던 셈이다.  

<무당>의 리더 최우섭은 국내에선 거의 알려지지 않은 무명의 연주자였다. 더욱 특이한 건 그가 레이프 가렛의 내한공연을 성사시킨 프로모터이기도 했다는 점이다. 미국은 물론 국내에서도 거의 무명이나 다름없던 그는 대체 어떻게 세계 최고의 팝스타를 한국으로 데려올 수 있었을까?  

최우섭은 미8군을 무대로 연주 활동을 해온 뮤지션 출신이었다. 고등학교 입학 기념으로 형에게 선물 받은 야마하 통기타를 만지기 시작하면서 10대 시절부터 음악에 빠졌다. 1968년 미8군 무대 오디션을 통과한 최우섭은 미군 부대가 밀집한 경기도 파주 장파리의 한 클럽에서 그룹 <라스트 찬스> 멤버로 활동하면서 본격적으로 연주자의 길로 나섰다.
하지만 그가 활동하던 시기는 미8군 무대가 쇠락하고, 일반 무대도 크게 활성화되지 않았던 시절이었다. 더욱이 당시는 군사정권에 의해 록 밴드가 퇴폐의 온상으로 낙인찍혀 활동 무대가 점점 줄었다. 자유로운 활동이 힘들어지자 미8군 연주인들은 미국 한인사회로 활동무대를 옮겼다.  

결국 최우섭도 1975년 음악공부를 위해 미국 이민을 선택한다. 그곳에는 이미 많은 미8군 시절의 연주자들이 아메리칸 드림을 꿈꾸며 음악 활동을 이어가고 있었다. 최우섭은 곧 샌프란시스코에서 재회한 옛 동료 김태화, 차종면과 함께 3인조 록밴드를 결성한다. 그게 바로 한인 최초의 헤비메달 밴드 <무당>. 동양의 작은 나라에서 온 뮤지션들에게 한국적인 이미지가 선명한 밴드 이름을 선물한 이는 열성팬을 자처하던 버클리대 교수였다. 뛰어난 연주 실력을 자랑하는 동양인 밴드에 관심을 보인 이 미국인은 “내가 듣기론 한국의 무당은 춤도 잘 추고 노래도 잘하는 만능 연예인이나 다름없더라”며 그들에게 ‘무당’이란 이름을 지어주었다고 한다.  

강력한 사운드에 놀란 한국 가요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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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당>의 리더 최우섭


<무당>은 샌프란시스코를 근거지로 삼아 시애틀, LA 등 교민사회를 중심으로 연주 활동을 했다. 1979년 보컬 김태화가 한국으로 돌아갈 무렵 무당은 리드 기타 겸 보컬 최우섭, 드럼 차종면, 키보디스트 장화영, 베이스 기타 정진 등 4인 체제로 개편돼 활동을 이어갔다.  

그러던 어느 날 최우섭에게 한국에서 한 통의 국제전화가 걸려온다. 발신자는 국내 최초의 팝 칼럼니스트이자 <빌보드>지(紙) 한국특파원으로 활동하고 있던 서병후였다. 당시 TBC에 적을 두고 있던 서병후는 뜻밖에도 최우섭에게 “당대 최고의 팝스타인 레이프 가렛의 내한공연을 추진해 달라”고 한다. 하지만 최우섭은 절대 불가능하다고 대답했다. 적지 않은 초청 개런티는 둘째 치고, 일분일초가 금쪽같은 세계 최고의 팝스타가 태평양 건너 작은 나라를 찾기 위해 공연 스케줄을 비워줄리 없었기에. 하지만 서병후의 고집도 만만치 않았다.  

계속되는 서병후의 채근에 최우섭은 반신반의하는 마음으로 겨우 얼굴이나 알고 지내던 프로모터 다니엘 베납에게 레이프 가렛의 섭외를 부탁한다. 아마 얼마 뒤 “와우, 알렉스 최! 당신은 행운아야. 레이프 가렛이 한국 공연을 승낙했어”라는 얘기를 듣고 가장 놀란 건 어쩌면 최우섭 자신이었을지도….  

하지만 하나의 난관이 더 있었다. 공연을 코앞에 두고 갑자기 레이프 가렛이 오프닝 밴드를 바꿔달라고 요구한 것. 다른 밴드들을 추천해 보아도 레이프 가렛은 계속 난색을 표했다. 급기야 “알렉스 최, 당신이 오프닝 무대를 맡아주세요”라고 말한다.
하지만 무당은 멤버 각자의 사정 때문에 오리지널 멤버들이 한국으로 들어오는 게 불가능했다. 어쩔 수 없이 최우섭은 한봉, 김성관, 정진으로 팀을 급조해 레이프 가렛에 앞서 한국으로 들어오게 됩니다. 당시 그들은 TBC 공개홀의 리허설에 대형트럭 두 대분의 음향 시스템을 공수해 와 국내 음악 관계자들을 놀라게 했다.  

결과적으로 무당은 서울 정동에 있던 MBC의 특집 프로그램을 통해 우물 안 개구리에 불과하던 한국 음악계에 커다란 충격을 던져준다. 최첨단 음향장비로 무장한 무당이 강력한 디스토션(distortion; 일렉트릭 기타의 거친 효과음) 사운드를 뿜어내자 연출을 맡은 PD가 “기타 소리가 이상하다”며 세 번이나 녹화를 중단시킬 정도로 무당의 사운드 출력은 어마어마했다고 한다. 마샬 앰프를 통과하면서 증폭된 강렬한 사운드와 리듬은 내로라하는 음악 전문가들에게도 생소하기만 했기 때문이다.
이렇듯 숱한 화젯거리를 만들어낸 <무당>의 존재는 다가올 레이프 가렛의 공연을 성공으로 이끈 조력자였다. 그리고 그들의 존재감은 오프닝 무대에서도 뚜렷한 존재감을 각인시켰다. 

사전심의로 엉망이 된 음악

레이프 가렛의 공연이 전례 없는 성공으로 끝나자 에너지 넘치는 하드록 사운드를 선보인 <무당>에게 오아시스레코드에서 음반 취입 제안이 들어온 건 예상된 수순이었다. 애초 그들의 제안은 레이프 가렛과 무당이 함께 참여하는 공동음반이었지만 레이프 가렛 측의 반대로 이 제안은 무산되고, 무당 음반만 따로 제작하기로 한다. 계약금으로 당시로는 업계 최고 수준인 1,000만 원이 지급되었다.  

녹음을 앞두고 비자 문제로 멤버들이 미국으로 돌아가자 혼자 남은 최우섭은 실력파 연주인으로 이름나 있던 기타리스트 이중산과 베이스 박찬용, 드럼 황종수를 수소문해 1집 음반을 녹음한다. 하지만 개인적 역량은 출중했지만 급조한 멤버들의 사운드로는 헤비메탈 본연의 사운드를 충분히 살려낼 수 없었던 게 아쉬웠다.

무엇보다 그를 절망하게 한 건 창작욕을 꺾어버리는 당시 사전심의제도였다. ‘프리랜서’, ‘투 레잇’, ‘슈퍼스타’ 등 8곡이 심의에서 문제로 지적되더니 그 뒤로도 사사건건 꼬투리가 잡혀 음반 전체가 만신창이로 잘려나간다. 어떤 곡은 아예 클라이맥스 전체를 잘라내라는 지시가 내려오기도 했다. 훗날 최우섭은 한 인터뷰에서 “당시 돈 여유가 있었다면 계약금 1천만 원을 돌려주고 음반 제작을 때려치우고 싶은 마음뿐이었다. 모든 곡이 심의에 탈락하고, 통과한 곡들도 가위질당해 동요 수준이 되어버린지라 1집은 고통 그 자체였다”고 털어놓았다.

우여곡절 끝에 최우섭은 1980년 오아시스레코드에서 1집 앨범을 발매하고 미국으로 돌아간다. 그리고 3년 뒤 그는 계약 이행을 요구하는 레코드사의 압박에 못 이겨 2집 앨범 《멈추지 말아요》를 내놓는다. 여기에 <무당> 최고의 히트곡이라 할 수 있는 동명의 곡이 수록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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멈추지 말아요 당신 뜻대로
사랑을 하세요 진실한 마음에
후회를 말아요 지난날 추억을
노래를 불러요 추억의 노래를
희미한 불빛 속에 온 세상이 잠들면
저 멀리서 들려오는 추억의 종소리(중략)
_ <멈추지 말아요> 중
 

1980년대 후반 연주 활동을 그만두고 공연 프로모터로 변신한 최우섭의 행보와 맞물려 이 노래는 지금도 많은 팬들의 가슴에서서 애잔한 추억으로 기억되고 있다. 어쩌면 그것은 냉혹한 군사정권 아래에서도 끝내 멈출 수 없던 뮤지션 최우섭의 한 맺힌 절규일지도….

 [노래듣기] https://youtu.be/PlNLQiHulcg

글 | 김정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