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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커피 in 가요] <목로주점>의 싱어송라이터 이연실

‘그 고왔던 연실 씨는 어디에 있나!’

낭중지추(囊中之錐)라는 말처럼 뛰어난 재능은 아무리 감춰도 언젠가 밖으로 드러나기 마련이다. 1970년대에 들어서자 남자 뮤지션들이 주도하던 국내 가요계에도 재능 있는 여성 싱어송라이터가 송곳처럼 날카로운 존재감을 드러냈다. 
대표적인 가수로는 1970년 5월부터 일본 유학생 출신의 이필원과 혼성듀엣 ‘뚜아에무아’로 활동을 시작해 솔로가수로 독립한 숙명여대 불문과 출신의 박인희, 숱한 히트곡을 내놓으며 ‘1세대 여성 싱어송라이터’의 대표주자로 불리게 된 이화여대 미대생 방의경, 가수 양희은이 불러 크게 히트한 <세노야>의 작곡가인 서울대 음대생 김광희 등을 꼽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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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연실 <고운노래 모음집> 앨범(1975)


그리고 이들과 앞서거니 뒤서거니 등장했던 또 한 사람, 홍익대 미대에 재학 중이던 이연실(1950~) 역시 여성 싱어송라이터로 한 시대를 뜨겁게 풍미했던 뮤지션이다. 늘씬한 키와 짙은 쌍꺼풀의 서구적 외모, 청순하고 지적인 분위기를 풍기던 여대생 가수 이연실은, DJ로 활동하며 ‘노래하는 시인’이란 애칭으로 사랑받은 박인희와 더불어 단시간에 청춘남녀 팬들이 사랑하는 가요계의 신데렐라로 떠올랐다.

포크의 저변을 넓힌 여성 싱어송라이터

1960년대 미국 팝 시장을 강타한 ‘포크의 여왕’ 존 바에즈의 등장이 그러했듯 뛰어난 음악적 재능과 지성을 갖춘 여성 싱어송라이터의 출현은 남자 가수들이 주도하고 있던 국내 포크 씬(scene)에도 신선한 변화를 몰고 왔다. 화려하진 않지만 이들의 등장은 한대수, 송창식, 윤형주, 서유석 등 젊은 남자가수들의 아성을 위협하기엔 충분했다. 
음악적 재능에 관한한 이들은 남자가수에 전혀 꿀릴 게 없었고, 여성들이 뚫기 힘든 ‘유리 천정’ 또한 다른 분야에 비해선 사정이 나았다. 보컬리스트로서의 영역을 넘어 스스로 작사, 작곡까지 담당하는 싱어송라이터의 능력을 보여준 이들에 의해 70년대 청년문화는 더욱 화려한 꽃을 피우게 된다.

그런데 돌이켜 보면, 70년대 활동했던 여러 싱어송라이터 중에서도 이연실에게선 말로 표현하기 힘든 특유의 아우라가 전해짐을 부인하긴 힘들다. 통기타로 음악을 만들고 부르는 포크 가수라는 공통점은 있지만 어쩐지 그녀는 또래 여가수들처럼 다소곳한 막내여동생이 아니라 매사 똑 부러지게 자기주장을 할 줄 아는 당찬 둘째딸 같은 분위기로 대중의 마음을 추동시켰다. 이런 성향은 이후 이연실이 가수로서 자신의 음악적 목표를 정립하는 데도 상당한 영향을 미쳤다.   

1950년 전북 군산 태생인 이연실(학생 때 이름은 이영화로 알려져 있다)은 고등학교 국어교사인 아버지 덕분에 비교적 유복한 어린 시절을 보내며 성장했다. 4남2녀 중 차녀였던 그녀는 지역 명문인 군산여고를 졸업하고 홍익대에 진학해 서울로 올라오면서 잠재돼 있던 자신의 음악적 재능을 드러내기 시작한다. 

그녀가 처음 대중의 주목을 받게 된 것은 1970년 열린 ‘가수 팔도대항전’이란 가요제 때부터였다. 전북 대표로 출전해 입선한 이연실은 소공동 조선호텔 근처의 라이브클럽 ‘훠(포) 시즌’에서 아르바이트로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는데 아마도 이때부터 은연 중 가수의 꿈을 꾸었던 것으로 짐작된다. 
이때 긴 생머리 휘날리는 미모의 여대생 가수를 눈여겨 본 이가 서울대 철학과 출신으로 가수 배호의 <누가 울어>를 비롯해 <안개 속에 가버린 사람> 등의 히트곡을 작사한 전우 선생이다. 1천여 곡의 노래를 만든 중견 작사가이자 ‘히트곡 제조기’로 유명했던 그는 소공동 포시즌 무대에 오른 이연실의 재능을 알아보고 후원을 자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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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4년 발매 앨범

시대가 사랑했던 그 시절 ‘아름다운 그녀’ 

전우 작사가의 주선으로 음악 관계자들의 눈에 띈 이연실은 1971년 9월 12일 DJ 박원웅이 진행하던 MBC라디오 ‘뮤직다이얼 팝 패밀리 콘서트’를 통해 마침내 자신의 데뷔 무대를 갖는다. 명동 소재 ‘코스모스살롱’에서 열린 이날 콘서트에는 6백여 명의 관객이 몰려 성황을 이뤘다. 훤칠한 키와 빼어난 미모, 새하얀 피부 때문에 뭔가 색다른 아름다움이 느껴지던 여대생 가수의 데뷔무대는 이례적으로 다음날 일간지 문화면에도 적잖은 비중으로 소개됐다. 
 

“홍대 조소과(편집자 주 : 실제로는 서양화과에 다니던 화가지망생이었지만 이 기사를 포함해 여러 매체에서 그녀를 ‘조소(彫塑)과’로 잘못 소개하고 있다) 재학 중인 신인 이연실(21)의 경우 <조용한 여자> 등 자작곡을 통해 퍽 진지한 무대를 보여줬고 최근 국내 팬들 사이에 선풍적인 인기를 얻기 시작한 멜라니型(편집자주: 우수에 젖은 듯한 목소리로 사랑받던 미국 여가수 멜라니 사프카)의 여유와 기교를 과시하는데 일단 성공. 여성 포크싱어 기근의 국내 팝스계 입장에서 볼 때 큰 기대를 가져봄직한 유망주라는 게 참석했던 전문 종사자들의 공통된 견해였다.”_1971. 9. 13 신문기사 중

 하지만 대중에게 보인 것은 그녀의 일부분뿐이었다. 노래뿐 아니라 작사, 작곡에 이르기까지 다재다능한 재능을 뽐냈던 그녀는 여리여리한 외모와는 달리 인생과 음악을 더 깊이 탐구해 보겠다며 6개월간 학교를 휴학하고 대구에서 다방레지 생활을 자청했을 만큼 당찬 구석이 있는 신인 가수였다. ‘오비스캐빈’이나 포시즌에서 노래하던 시절, 술에 취해 시비를 걸어오는 취객과 피하지 않고 맞붙어 싸운 일화도 유명했다.

여세를 몰아 이연실은 그해 11월, 자신의 첫 앨범 《새색시 시집가네》를 내놓으며 일약 스타덤에 올랐다. 유니버살레코드에서 제작한 이 LP앨범은 모두 10곡의 노래가 담겨 있는데 이연실은 A, B면의 타이틀곡인 〈비둘기 집〉과 〈새색시 시집가네〉를 비롯해 모두 5곡의 노래를 불렀다. 
아직은 음반 전체를 자작곡으로 채울 여력이 부족했던지 이석, 정우, 박재란, 이찬, 조영남 등 여러 가수들과 함께한 옴니버스 형태로 제작된 데뷔 음반은 아직 20대 초반이었던 그녀의 해맑은 목소리를 다시 확인할 수 있는 명반으로 평가된다. 앨범의 성공으로 스타덤에 오른 이연실은 일약 한국을 대표하는 여성 포크 가수로 떠올랐다. 

색깔 있는 가수, 서정성에 저항성을 더하다

김신일 작사 작곡의 <새색시 시집가네>뿐만 아니라 <둘이서 걸어요> <비둘기 집> <조용한 여자> 등 삶의 체험을 통해 체화한 한국적 정서는 이연실의 트레이드 마크였다. 특히 그녀의 대표곡 중 하나인 <조용한 여자>에서 이연실은 특유의 청아한 음색으로 새로운 시대의 도래를 알렸다. 
 

어젯밤 꿈속에서 보랏빛 새 한 마리를/ 밤이 새도록 쫓아 해마다 잠에서 깨어났다오
나는 괴롭힐 사람 없는 조용한 여자/ 나는 괴롭힐 사람 없는 깔끔한 여자랍니다
봄이 되어서 꽃이 피니 갈 곳이 있어야지요/ 여름이 와도 바캉스 한번 가자는 사람 없네요
나는 괴롭힐 사람 없는 조용한 여자/ 나는 괴롭힐 사람 없는 얌전한 여자랍니다(하략)
_ 자작곡 <조용한 여자> 가사 일부 

 
1972년 발표한 <찔레꽃>도 대중의 열렬한 환영을 받았다. 자작곡은 아니지만 이 노래는 이연실의 탁월한 음악성을 보여주는 명곡으로 지금도 높게 평가된다. 원래 이 노래의 원곡은 1920년대 이태선이 쓴 동시에 박태준이 곡을 붙인 <가을밤>인데 이연실은 아동문학가 이원수가 1930년 잡지 《신소년》에 발표했던 ‘찔레꽃’이란 동시의 노랫말을 조금 바꿔 가을밤의 선율에 맞춰 불러 크게 히트시켰다. 훗날 여러 가수들이 리메이크해서 불렀지만 올드팬들은 지금도 대부분 이 ‘이연실 버전’을 첫손에 꼽는다. 

이연실의 낭랑한 목소리로 노래를 듣고 있으면 자박자박 외로이 산길을 서성이는 아이의 모습이 떠올라 눈시울이 시큰해진다. 밥이 없어 아이 혼자 집에 두고 일 나갔던 엄마는 깊은 밤 얼마나 마음 졸이며 허겁지겁 달려 왔을까. 그녀의 목소리는 가만가만 아이와 시대의 아픔을 어루만져주는 엄마의 자장가라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엄마 일 가는 길에 하얀 찔레꽃/ 찔레꽃 하얀 잎은 맛도 좋지
배고픈 날 가만이 따먹었다오/ 엄마엄마 부르며 따먹었다오
밤 깊어 까만데 엄마 혼자서/ 하얀 발목 바쁘게 내게 오시네
밤마다 보는 꿈은 하얀 엄마 꿈/ 산등성이 너머로 흔들리는 꿈 
_ <찔레꽃> 가사 일부

 

1973년 김민기, 한대수와 함께 ‘3대 저항가수’로 꼽히던 양병집의 도움을 받은 세 번째 앨범을 계기로 이연실은 자신의 노래 색깔을 완전히 탈바꿈한다. 이른바 저항적 색채를 조금 더 적극적으로 표출하기 시작한 것이다. 이 앨범에선 밥 딜런의 노래 ‘A Hard Rain's a-Gonna Fall’을 번안한 <소낙비>가 큰 인기를 모았다.
1975년 12월, 대마초 파동에 휘말려 가수 활동의 고비를 맞았던 이연실은 이듬해 《고운노래 모음집》을 발표하며 재기를 노렸지만 이런저런 이유로 한 동안 음악 활동을 멈췄다가 1981년 드디어 자신의 최대 히트곡이라 할 수 있는 <목로주점>으로 화려하게 복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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멋드러진 친구 내 오랜 친구야/ 언제라도 그곳에서 껄껄껄 웃던
멋드러진 친구 내 오랜 친구야/ 언제라도 그곳으로 찾아오라던
이왕이면 더큰잔에 술을 따르고/ 이왕이면 마주 앉아 마시자 그랬지
그래 그렇게 마주 앉아서/ 그래 그렇게 부딪혀 보자
가장 멋진 목소리로 기원 하려마/ 가장 멋진 목소리로 화답 해줄께
오늘도 목로주점 흙바람 벽엔/ 삼십촉 백열등이 그네를 탄다
_ 자작곡 <목로주점> 1절
 

 

이 노래는 싱어송라이터로서 그녀의 뛰어난 재능을 완벽하게 증명하는 노래였다. 대학가 주변에서 가볍게 마실 수 있는 학사주점들이 인기를 끌던 무렵이라 경쾌한 컨트리풍의 멜로디와 꾸밈없는 가사가 인상적인 이 노래는 세대를 뛰어넘는 인기를 모았다. 

홀연히 자취를 감춘 ‘낭중지추’

1985년 그룹사운드 ‘검은바비와 호랑나비’의 키보디스트였던 김영균과 결혼해 가정을 이룬 이연실은 그 뒤에도 <노란 민들레>처럼 저항성 짙은 노래들을 꾸준히 발표하며 90년대 초반까지 가수 활동을 이어나갔다. 하지만 90년대 중반 자식을 잃은 슬픔과 이어진 가정불화로 남편과 결별한 것으로 알려진 그녀는 어느 날 홀연히 모습을 감추고 말았다. 일설에 의하면 이연실은 그 뒤로 방송국의 섭외에 응하지 않는 것은 물론, 2000년대 들어 유행처럼 번진 ‘7080 콘서트’류의 섭외에도 일절 응하지 않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심지어 이제는 동료 가수들조차 그녀의 연락처를 아는 사람이 없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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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후 들려오는 그녀에 관한 소식들은 진위를 확인할 수 없는 풍문뿐이다. 누군가는 그녀가 강원도에서 감자농사를 짓는다고 하기도 하고, 누군가는 서울 상계동에 살고 있는 걸 목격했다고 하기도 하며, 제부도에서 도예작가로 활동하고 있는 걸 발견했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그 밖의 다른 풍문들도 대부분 누군가 지어낸 뜬소문이거나 동명이인을 착각한 해프닝으로 밝혀져 실망만 커졌다. 

생존해 있다면 올 해로 일흔 두 살이 된 그녀는 어떤 모습으로 지내고 있을까? 생사조차 알지 못하는 잠행 역시 송곳처럼 단호한 자신의 의지를 알리려는 신데렐라식 퇴장이었을까? 지금도 많은 7080들은 그 곱디고운 ‘연실 씨’를 다시 볼 수 있기를 간절히 바라고 있다.

글 | 김정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