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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커피 in 가요] 최초 민족가요 <목포의 눈물>

조선이 사랑했던, 목포를 사랑했던 이난영

얼굴을 가린 채 가창력만으로 기량을 겨루는 TV 프로그램 <복면가왕>의 인기가 꾸준하다. 가수들에게 노래 잘 한다는 칭찬이야 말로 세상에서 가장 듣고 싶은 칭찬일 터. 그래도 일개 무명가수부터 흘러간 왕년의 스타들까지 공평하게 한 무대에 올라 목이 터져라 열창하는 모습을 지켜보는 재미가 제법 쏠쏠하다.  

무대에 오른 출연진은 가수든 배우이든 노래라면 저마다 한가락 하는 탄탄한 내공을 자랑한다. 심금을 울리는 목소리에 대중들은 넋을 잃고 빠져든다. 그러면서도 정작 가면 뒤의 정체를 알고 나면 대개는 정말 저이가 그리 노래를 잘했던가, 하는 놀라움에 말문이 막히곤 한다. ‘아니 정말 저런 정도의 실력을 갖고도 지금껏 무명으로 지내왔단 말야? 저렇게 노래를 잘하는데 왜 벌써 화려한 스포트라이트의 뒤편으로 사라져버리고 만 거야?’  

타고난 음색과 성량으로 주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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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수의 재발견’이라 불러도 좋을 <복면가왕>을 시청할 때마다 내게도 자연스럽게 뇌리에 떠오르는 한 인물이 있다.
80여 년 전 모든 조선인들이, 아니 현해탄 건너 일본 사람들까지 이구동성으로 “노래 하나는 기가 막히게 잘 한다”는 찬사를 보내던 전설의 가수 이난영(1916∼1965). 공전의 히트곡 <목포의 눈물>로 유명한 그녀는 한창 왕성하게 활동하던 1930∼40년대 ‘이난영 앞에 이난영 없고, 이난영 뒤에 이난영 없다’란 말을 들을 만큼 출중한 가창력을 자랑하던 당대의 대스타였다.  

본명이 이옥례(李玉禮)인 이난영은 일제강점기였던 1916년 전남 목포시 양동에서 1남1녀의 막내로 태어났다. 당시 목포는 호남선 열차들이 싣고 온 쌀을 고베로 실어 보내기 위해 숱한 조선인들이 날품팔이를 하고 있던 서남해의 거점 항구도시였다. 그녀의 아버지 이남순 역시 목포항 부두에서 막일을 하던 노무자였는데 그는 툭하면 처자식에게 주먹을 휘두를 만큼 분별없는 술주정꾼이었다. 남편의 학대를 견디다 못한 어머니가 열 살 때 집을 나가버리는 바람에 이난영은 두 살 터울의 오빠 이봉룡에 의지해 불우한 성장기를 보냈다.  

어려운 가정환경 탓에 보통학교 4학년을 마친 뒤 방직공장 직공으로 일하던 이난영은 결국 제주도의 한 일본인 가정에서 식모로 일하던 어머니를 찾아가게 된다. 허드렛일을 도우며 그 집에 머물던 이난영은 때때로 주인집 유성기에서 흘러나오는 노래를 따라 흥얼거리곤 했다. 그녀의 노래솜씨를 눈여겨 본 일본인 주인은 마침 제주도로 공연을 하러 와 있던 삼천리극단 단장을 만난 자리에서 자기 집에 머물고 있는 조선 처녀의 노래 솜씨를 입이 마르게 칭찬했다. 호기심이 동한 단장은 막간가수로 이난영을 무대에 올려보았는데 콧소리 섞인 비음과 애절하고 낭랑한 목소리가 예사롭지 않았다. 이난영도 이때부터 자신의 노래 실력에 자신감을 갖고 가수의 꿈을 키우게 되었다. 

이후 다시 목포로 돌아온 1932년 가을, 이난영은 순회공연을 와 있던 태양극단에 정식 단원으로 입단해 본격적으로 가수의 꿈을 키우게 된다. 옥례라는 이름이 촌스럽다는 이유로 난영(蘭影)이란 예명을 쓰기 시작한 것도 이때부터였다. 토월회 후신인 태양극단 활동은 그녀의 인생에 중요한 분기점이었다. 1933년 일본 오사카 등지로 순회공연을 나선 태양극단은 그곳에서 태평레코드란 현지 음반사와 계약을 맺고 음반을 녹음했는데, 단원이었던 이난영도 처음으로 <시드는 청춘>, <지나간 옛 꿈> 등 노래 두 곡을 녹음할 기회를 얻게 되었다. 태평레코드에서 녹음한 그 음반은 그 해 9월에 발매되었다. 

일제치하 식민지 백성의 설움을 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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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개월간의 순회공연을 마치고 돌아온 조선에는 애타게 그녀를 기다리고 있던 이가 있었다. 일본에 있는 조선레코드 특약점 주인으로부터 기가 막히게 노래를 잘하는 신인 가수가 있다는 얘기를 듣고 몸이 달아 있던 오케(Okeh)레코드 사장, 이철이었다. 이난영의 노래를 듣고 넋이 나간 이철은 그녀에게 전속가수를 제안했다. 이 과정에서 먼저 녹음을 했던 태평레코드와 분쟁이 일었으나, 오빠 이봉룡의 지원으로 결국 오케레코드가 내민 계약서에 도장을 받아낼 수 있었다.  

오케레코드를 통해 발매된 이난영의 데뷔곡은 1933년 10월에 출시된 <향수>였다. 음반 발매와 함께 서서히 이름을 알리기 시작한 그녀는 여세를 몰아 <고적(孤寂)>과 <불사조>를 연이어 발표했는데 이 가운데 <불사조>가 기대 이상의 큰 인기를 얻어 그녀의 필모그래피에서 최초의 히트송을 기록하게 된다. 1934년에는 신민요 계열의 <신강남>과 <밤의 언덕을 넘어>이란 음반으로 이어졌다. 바로 그 해에 이난영은 <봄맞이>란 음반으로 또 한 번 히트를 기록하는데 십대 중반의 여가수라고는 믿기지 않을 만큼 완숙한 창법은 당시 활동하던 여가수들에게서는 볼 수 없는 신선한 매력으로 다가왔다. 이 무렵 이난영은 벌써 조선 최고의 가창력을 가진 가수로 인정받고 있었다. 1934년 동경 히비야공회당(日比谷公会堂)에서 ‘전국명가수음악대회’가 열렸는데 이난영은 이 대회에도 조선인 가수로는 유일하게 참가해 만장일치의 박수와 갈채를 받았다.  

데뷔와 함께 승승장구하던 이난영은 1935년, 마침내 자신의 운명과도 같은 불멸의 히트곡 <목포의 눈물>을 만나게 된다. 이 곡의 노랫말은 원래 조선일보사가 한 해 전 전국 6대 도시를 대상으로 기획한 ‘향토노래 현상모집’에서 3,000여 편의 응모작을 제치고 당선작으로 뽑힌 가사였다. 이복룡의 친구이기도 한 목포 출신의 무명시인 문일석은 원래 이 곡의 제목을 ‘목포의 노래’로 지어 응모했는데 가사를 접한 이철 사장이 이 애절한 노랫말을 몹시 마음에 들어 했다. 때마침 그에게는 <타향살이> 등을 만든 작곡가 손목인의 ‘갈매기 항구’라는 곡의 멜로디가 있었다. 이 때문에 원래 남자가수 고복수에게 주려던 멜로디는 급히 이난영을 위한 곡으로 탈바꿈되었고 제목 또한 <목포의 눈물>로 개작되어 그해 8월 음반으로 출시되었다.  

사공의 뱃노래 가물거리면
삼학도 파도 깊이 숨어드는데
부두의 새악씨 아롱젖은 옷자락
이별의 눈물이냐 목포의 설움  

삼백년 원한 품은 노적봉 밑에
님 자취 완연하다 애달픈 정조
유달산 바람도 영산강을 안으니
님 그려 우는 마음 목포의 노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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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달산에서 내려다본 목포시 전경

음반 발매와 함께 빅히트, 모던음악 ‘원 톱’ 

<목포의 눈물>은 제목에서 알 수 있는 것처럼 목포라는 공간적 배경과 단단히 밀착되어 있다. 사실상 노래의 탄생 과정부터가 목포라는 지역을 떠나서는 형상화될 수 없는 것이었다. 일제의 식민지로 전락해버린 수탈의 현장, 왜적의 침입을 막아내던 수 백 년 역사의 추락을 극명하게 보여주는 것이 바로 목포의 모습이었다. 목포 출신의 이난영이야말로 모든 면에서 이 노래의 주인공이 될 조건을 갖추고 있었다. <목포의 눈물(1935)>을 위시해 훗날 그녀가 <목포의 추억(1939)>, <목포는 항구다(1942)> 등 유독 고향에 관련된 레퍼토리를 많이 보유하게 된 것도 목포 출신이라는 상징성에서 이유를 찾을 수 있다.  

예상대로 이 노래는 전국에서 가히 폭발적인 반응을 이끌어냈다. 당시로써는 거의 천문학적이라고 할 수 있는 수 만 장의 음반이 금방 동이 났다. 목포와 호남 사람들, 더 나아가 일제 치하에 신음하던 조선 백성들에게 <목포의 눈물>처럼 나라 잃은 설움을 달래주는 민족가요의 등장은 가히 광풍이라고 불러도 좋을 만한 것이었다. 이 인기를 발판으로 이난영은 ‘오카란코(岡蘭子)’란 예명으로 일본에 진출해 데이지쿠(帝蓄)레코드에서 <이별의 뱃노래>란 곡을 발표하기도 했는데 이 노래 또한 <목포의 눈물>의 일본어 버전이었다. 이로써 이난영은 명실공이 조선과 일본을 아우르는 대중가요 스타로 발돋움해 폭발적인 인기를 누리게 된다.
그해 10월 잡지 『삼천리』에서 집계한 ‘레코드가수 인기투표’에서 이난영은 당당히 여가수 부문 3위에 올랐는데, 1위와 2위를 차지한 왕수복과 선우일선이 모두 신민요 계열의 기생출신 가수였다는 점을 감안하면 그녀는 명실공이 ‘모던음악 계열의 원 톱(One Top)’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삼백년 원한 품은 노적봉’ 일화 

이 노래의 가사에 대해서는 재미있는 일화가 전해진다. 당초 문일석이 쓴 2절 첫머리의 가사는 ‘삼백년 원한 품은 노적봉’이었다. 노적봉은 목포 유달산 기슭에 있는 큰 바위의 이름으로 우리에게는 임진왜란 당시 이순신 장군이 왜적에게 노적가리(한 곳에 수북이 쌓아놓은 곡식더미)처럼 보이게 하려고 짚과 섶으로 둘러씌웠다는 승전의 기록이 전해지는 곳이다. 즉 ‘삼백년 원한 품은 노적봉’은 말 그대로 임진왜란 때부터의 이어져온 일본에 대한 원한을 노골적으로 드러내고 있는 표현이었다.

당시는 1933년 발동된 취체령(取締令)에 의해 모든 공연, 노래, 영화가 조선총독부의 사전검열을 받고 있던 때였다. 이 때문에 오케레코드 사장 이철은 총독부에 가사를 제출할 때 ‘삼백년 원한 품은’을 ‘三栢淵 願安風(삼백연 원안풍)’으로 바꿔 제출했다. 일본인들이 한글은 알아도 받침이 있는 발음을 쉽게 구분하지 못한다는 점을 역이용한 것이었다.  

하지만 우려했던 것처럼 일제총독부가 이 부분을 문제 삼았다. 이철은 이때도 ‘삼백연’은 우리나라의 어떤 민간 설화에 등장하는 연못의 이름이며, ‘원안풍’은 연못을 감싸 안은 부드러운 바람이란 뜻이라고 둘러댔다. 이철이 하도 정색을 하고 우기는 통에 가사 내용이 자연스럽게 연결되지 않는다고 윽박지르던 검열관도 더 이상은 꼬투리를 잡을 수가 없었다.
총독부의 검열은 넘겼지만 그 일로 언제 다시 잡혀갈지 몰라 불안했던 이철은 총독부를 나오자마자 당시로는 흔치 않은 노이즈 마케팅을 시도한다. 즉 조선총독부의 검열이 하도 심해 조선인 가수들은 노래 한 곡 편히 부르기 힘들다는 헛소문을 퍼뜨린 것이다. 조선인들의 관심과 분노가 끓어오르자 총독부에서도 더 이상은 간섭을 할 수 없었다. 노래 한 곡 때문에 조선인들이 공분을 일으킬 위험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훗날 작곡가인 손목인의 회고에 의하면 원래 이 노래는 악보에 분명히 ‘삼백년 원한 품은’으로 적혀 있었고 가수 또한 그렇게 불러 녹음한 것으로 알려진다. 이철의 기지가 아니었다면 자칫 일제에 의해 봉인돼 버릴 비운의 노래였던 것이다. <목포의 눈물>은 이런 우여곡절 끝에 탄생한 최초의 민족가요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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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달산 이순신 장군상

한국전쟁 때 남편 납북, 무대와도 멀어져  

이후에도 전국적인 인기를 구가하던 이난영은 1937년 스물한 살의 나이에 작곡가 김해송과 결혼한 뒤에도 왕성한 활동한 이어나갔다. 1940년 7월 오빠 이봉룡이 작곡한 <목포의 항구다>를 히트시킨 이난영은 그 후 태평양전쟁의 발발로 음반 제작이 제한되자 공연무대 위주로 활동을 펼치며 명성을 이어갔다. 무대에 오를 때마다 “역시 이난영!”이라는 찬사와 우레와 같은 박수가 쏟아졌다. 이난영의 명성은 더욱 높아졌다. 

해방 후 그녀는 가수활동을 중단하고 한 동안 7남매의 육아에 매달리게 된다. 하지만 한국전쟁 와중에 남편이 납북되면서 끝내 그녀는 과거와 같은 영광을 회복하지 못한 채 서서히 무대 뒤편으로 잊히게 된다. 전쟁이 끝난 뒤 오빠 이봉룡과 ‘LKA음반사’를 설립했지만 그 또한 생계를 유지하기 위한 임시방편일 뿐이었다.

간간히 무대 위에 모습을 드러내던 이난영은 자신의 두 딸 숙자, 애자, 그리고 오빠의 딸인 민자로 구성된 ‘김씨스터즈’를 결성, 미8군 활동을 지원하는가 싶더니 이후 유부남인 가수 남인수와의 연애, 미국 이민과 귀국 등 순탄치 않은 삶을 살다가 1965년 9월 11일 서울에서 알코올 중독으로 사망했다. 향년 49세였다.

<목포의 눈물> 노래 듣기

글 | 김정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