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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석 이야기] 1,250 겹으로 쌓인 화해와 용서

바다의 눈물, 진주

[보석 이야기] 1,250 겹으로 쌓인 화해와 용서

22살 여름, 군대에서 휴가를 나온 첫날, 집으로 가는 중에 질주하는 차에 치였다. 그대로 공중에 떴다가 떨어졌고 깨어난 것은 병원이었다. 경추 4번 추돌돌기 골절, 떨어진 뼛조각이 신경계를 건드리면 하반신 불구나 언어장애가 생길 수 있는 중상이었다.
처음 2주는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아무런 기억이 나질 않는다. 정신이 들고 나는 그저 침대에 누워 꼼짝할 수 없다는 것을 알았다. 그렇게 1년여의 긴 투병생활이 시작되었다.  

내가 할 수 것은 반듯이 누워서 천장을 응시하는 일이었다. 양치질을 하고, 세수를 하거나, 하늘을 응시할 수도, 고개를 돌릴 수도, 허리를 굽힐 수도, 손톱을 깎거나, 강아지를 쓰다듬을 수도, 문을 열수도, 닫을 수도 없었다. 그동안 아무렇게 했던 일상들이 모두 에베레스트 산을 정복하는 일보다 어려워졌다. 작고 사소한 행동을 하려고 해도 큰 결심이 필요했다.  

처음 얼마 동안은 갑자기 닥친 이 불행에 대해 견딜 수 없는 절망감이 들었다. 회환과 슬픔으로 견딜 수 없이 괴로웠다. 모든 원망이 한꺼번에 밀려왔다. 그날 나를 치어 이렇게 만든 운전사와 집에 가는 것을 붙들었던 동기들과 이런 상처도 치료 못하는 의료진을 원망했다. 심지어 세상에 태어나게 해 이런 고통을 겪게 하는 부모조차 원망스러웠다. 매일 그대로 눈을 감고 잠이 들어 다시는 깨어나지 않기를 간절히 바랬다. 나는 99가지를 못하고, 오직 눈물 흘리는 일 한 가지만 할 수 있는 사람이 되었다.  

바다가 슬픔에 잠길 때 탄생하는 보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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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날 고대인들은 바다가 슬픔에 잠길 때 진주가 탄생한다고 생각했다. 진주를 그래서 ‘바다의 눈물’이라 부른다. 실제로 진주에게는 눈물이라 비유될 슬픈 사연이 있다. 이 슬픔을 이겨내고 마침내 진주가 되는 탄생 스토리를 안다면 진주를 사랑하지 않을 수 없다.
어느 날 조개 속으로 날카로운 모래 알갱이가 들어가 속살에 박힌다. 조개는 안간힘을 다해 뱉어내 보지만 오히려 알갱이는 더 깊은 곳으로 들어간다. 날카로운 알갱이가 내장을 찢고 그때마다 조개는 견딜 수 없는 고통에 시달린다. 만약 우리 위장에 쇠꼬챙이가 박혔다면 그 고통이 얼마나 클지 상상하기조차 어려울 것이다. 당연히 처음 얼마간은 자신을 괴롭히는 존재에 대해 사력을 다해 밀어내려 노력할 것이다. 하지만 어찌할 수 없는 불가항력에 심각한 좌절감에 빠질 것이다.  

시간이 지나면서 조개는 모든 것을 체념하게 된다. 철저한 체념을 비로소 인내를 배우게 된다. 인내로 자신을 연단하고, 상처를 주는 대상에 대한 분노의 감정을 조금씩 지워간다. 어쩌면 너도 참 외로웠구나, 하며 대상에 대한 연민을 느낄지도 모른다.
이 연민은 내장을 찢는 알갱이에게 손을 뻗고 품에 안도록 한다. 조개는 비로소 자신에게 상처를 준 대상과 화해하고 용서한다. 그때서야 분비물이 나오기 시작한다. 분비물은 자신의 내장을 찢었던 날카로운 검 위에 흐른다. 분비물로 쌓인 알갱이는 더 이상 조개에게 상처를 주지 않게 되고 마침내 둘은 공존에 이른다.  

원망했던 것들을 위해 흘린 눈물

계절이 바뀌고 창밖으로 어느새 낙엽이 지고 있었다. 햇살이 창문을 타고 넘어 코끝에 앉았다. 나뭇잎이 흔들릴 때마다 코끝에 앉은 햇살은 나비처럼 날개 짓을 쳤다. 지워졌다 나타났다.
늦은 가을 오후가 그대로 나를 품에 안아 주었다. 참 아름다운 세상이었다. 그토록 원망하던 대상조차 모두 그 아름다운 자연의 일부가 아니었던가. 그때 나는 원망했던 모든 것들을 위해 울었다. 울고 나니 나를 아프게 하던 것들에 연민을 느꼈다. 그리고 화해했고 용서할 수 있었다. 그 순간 덕지덕지 붙었던 분노의 딱지가 딸깍딸깍 떨어져 나가기 시작했다. 몸은 조금씩 회복되었다.  

다시 계절이 바뀌고 미세한 변화들이 생겼다. 마치 어린아이가 걸음마를 떼듯이 서서히 이뤄졌다. 이전으로 돌아가는 일들은 지루하지만 기쁘고 행복한 일이었다. 머리를 돌릴 수 있게 되면서 침을 혼자서 뱉을 수 있었다. 모로 눕게 되면서 등이 더 이상 가렵지 않았다. 손을 뻗을 수 있게 되면서 책을 볼 수 있었다. 무려 머리맡에 라디오를 켜서 음악을 들을 수 있었다. 스스로 책을 읽고 음악을 듣는 다는 것이 얼마나 큰 위로가 되었는지 모른다. 살아있다는 것은 무언가를 내 스스로 할 수 있다는 것이다. 겨울이 끝이 나고 봄이 왔다. 

99가지를 할 수 없어도 한 가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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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개의 분비물은 오랜 시간에 걸쳐 서서히 모래 알갱이를 감싼다. 한 겹, 두 겹 마치 둥지의 엄마 새가 아기를 품듯 정성을 다해서…. 때로는 적의 공격에도 비바람이 치는 태풍 속에서 의연하게 전력을 다해 알갱이를 품는다. 미운 알갱이는 덕분에 뽀얗게 살이 오르기 시작한다. 시간이 지날수록 알갱이를 감싸는 층이 두꺼워지며 동그랗게 된다. 우유 빛에 광택이 더해지며 본격적으로 아름다워진다.
3년이 지나면 비로소 영롱한 빛깔의 진주가 탄생한다. 양질의 진주는 보통 5mm 두께의 진주층을 갖는다. 무려 1250겹이 쌓여야 만들어지는 두께이다. 진주의 탄생을 보면서 우리는 화해는 용서를 낳고, 용서가 진정한 사랑으로 이어짐을 깨닫는다. 사람들이 진주에 열광하는 이유이다.  

봄이 끝나고 여름이 막 시작되었다. 입원 후 처음으로 산책을 나갔다. 병원 문을 열고 천천히 세상을 향해 걸어 나갔다. 바람은 느린 시간처럼 잔잔하고, 햇살은 솜털처럼 따스했다. 이토록 아름다운 세상 때문에 나는 얼마나 행복한가. 벤치에 앉았다. 긴 고난의 시간이 주마등처럼 스쳐갔다. 그동안 겪은 절망이 떠올랐지만 더 이상 아프지 않았다. 내 상처는 이미 단단한 딱지가 내렸고 그 아래 새살이 돋았기 때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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햇살은 따스하고 나의 마음은 그저 엄마 품에 안긴 아기 새처럼 평화롭다. 그때 눈물 한 방울이 또르르 뺨을 타고 흘러내렸다. 마치 동그란 진주처럼 빛나고 있었다. 99가지를 할 수 없었지만 한 가지, 눈물을 흘릴 수 있어 나는 삶의 소망을 가질 수 있었다.
“환란은 인내를, 인내는 연단을, 연단은 소망을 이루는 줄 앎이로다”(로마서5장 3절~4절)

글 | 이승우
이승우 님은 보석과 삶에 관한 다양한 이야기와 정보들을 여러 매체에 기고하며 보석에 대한 대중의 인식을 확산시키려 애쓰고 있습니다. 문예지에 시를 발표한 시인이기도 합니다. 현재 보석회사 임원으로 근무하고 있으며, 미국 보석감정사(Graduated Gemologist) 회원으로 활동하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