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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석 이야기] 호박 amber

나와 그녀의 시간

그날, 하루 종일 눈이 내렸습니다. 하늘이 답답해 제 가슴을 칠 때마다 주먹 만한 눈이 펑펑 쏟아졌습니다. 눈을 헤치고 들어간 곳은 서점이었습니다. 그곳에서 황동규의 《즐거운 편지》라는 시집을 발견합니다. 눈이 오는 풍경이 바로 앞에 펼쳐지는 참 인상적인 시입니다.
 

“밤이 들면서 골자기에 눈이 퍼붓기 시작했다. 내 사랑도 어디쯤에선 반드시 그칠 것을 믿는다. 다만 그때 내 기다림의 자세를 생각하는 것뿐이다. 그 동안에 눈이 그치고 꽃이 피어나고 낙엽이 떨어지고 또 눈이 퍼붓고 할 것을 믿는다.”_ 황동규,  <즐거운 편지> 중


시작도 하지 않는 사랑이 그칠 거라니, 안타까운 마음에 좀 언짢아졌습니다. 머 그러면 어쩌겠어요. 오늘은 엄마를 만난 작은 새처럼 마냥 행복한 날인데요. 잠깐 시집을 살까 망설였지만 이내 사기로 합니다. 이미 밤새 시집 앞에 쓸 멋진 문구도 생각했거든요. 시집을 사서 서점 한구석에 앉았습니다. 첫 페이지를 펴고 허공에 단어를 써봅니다. 
안녕하세요, 라고 썼다가 이내 머리를 흔듭니다. 너무 흔하다는 생각이 들어 차마 쓸 수 없었습니다. 지난 밤 수천 번을 쓰고 지웠던 문장이 새가 되어 날아가 버립니다. 창문 너머 거리를 바라봅니다. 생각의 새가 나무에 앉아 있었습니다. 푸드덕 날아오르니, 툭 나뭇가지에서 눈덩이가 떨어집니다. 그때서야 무언가를 쓰기로 합니다. 그것은 이름입니다. 눈을 감고 가만히 부르면 세상에 온통 햇살이 내리던 그 이름, 석자를 꾹꾹 눌러씁니다.  

시간을 품는 보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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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Anders L. Damgaard(CC BY-SA)

호박은 나무의 수지(송진)가 땅에 떨어져 화석화가 되어 생긴 보석입니다. 영어로는 ‘Amber’라 부릅니다. 호박은 다이아몬드 같은 결정 광물이 아닙니다. 그것은 동식물에서 생긴 진주와 같은 유기질 보석입니다. 

호박의 최대 산지는 발틱(Baltic) 해안 남부의 삼비아(Sambia) 반도입니다. 5천만 년 전 스칸디나비아와 북유럽의 지역에서는 ‘Pinus Succinifere’라는 나무가 자랐습니다. 이 나무들에서 나온 수지가 화석화가 되어 호박이 되었습니다. 그 뒤로 아주 오랫동안 땅속에서 묻혀 퇴적되었습니다. 
 

이 퇴적층에서 떨어져 나온 호박이 파도에 휩쓸려 해안에 이르면 마치 고기를 잡듯 그물로 건져 올렸습니다. 이렇게 채취된 호박은 발틱에서 서유럽을 지나 아라비아 반도에 이르는 소위 ‘호박의 길(Amber Road)’을 통해 전 세계로 퍼졌습니다. 이집트의 파라오의 무덤이나 고대 그리스의 신전에서 다량의 호박장신구가 발견되었습니다. 이렇게 호박은 고대로부터 많은 사람들의 사랑을 받던 보석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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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박의 색은 연한 황색, 오렌지, 갈색을 띱니다. 가끔 붉은색 호박도 나오는데 이를 체리앰버(Cherry Amber)라 부릅니다. 아주 드물게 녹색이나 청색호박도 있는데 그 중에 청색은 도미니카공화국에서 발견됩니다. 희귀하고 아름답기 때문에 아주 비싼 가격에 거래됩니다. 
호박은 밝고 투명할수록 가치가 높습니다. 보통 반지나 목걸이 등 보석용 소재로 사용되고, 우리나라에서는 한복의 동정으로 인기가 높습니다. 호박은 송진이 굳어 만들어진 유기질 보석이므로 외부자극에 매우 약하고, 손상되기 쉽습니다. 경도는 2~2.5로 낮고 스크래치가 잘 생기고 불에 약해 사용 시 각별한 주의가 필요합니다. 
 

호박에서만 발견되는 매우 특이한 현상이 있습니다. 바로 살아있는 생물이 트랩되는(Trapped) 것입니다. 호박을 이루는 수지의 향기가 생물을 유혹하고, 수지에 빠진 생물은 그대로 화석이 됩니다. 이런 호박은 매우 가치가 높습니다. 진딧물이 개미 등을 막 오르는 순간, 개미가 사마귀를 공격하는 순간, 전갈이 독을 품는 찰나, 개구리가 다리를 쭉 뻗어 도약하는 순간을 담고 있는 호박이 있습니다. 
 

수지는 생물체를 완벽히 진공상태로 만들기 때문에 안에 있는 모든 것들을 원형 그대로 보존됩니다. 영화 <쥬라기 공원>에서는 이런 호박의 특징이 잘 나타납니다. 호박에 갇힌 모기 피에서 공룡의 DNA를 추출해 공룡을 복원한다는 설정입니다. 호박은 찰나의 순간을 그대로 영원으로 만드는 보석입니다. 가장 아름다운 시간이 통째로 멈춰지는 기적이지요.  

화석이 된 ‘그 해 겨울, 첫눈 내리던 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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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가 지기 시작하자 눈은 더 세차게 내립니다. 몇십 년 만의 대설이었습니다. 거리 이곳저곳은 눈처럼 많은 사람들이 넘실거립니다. 누구와 사랑에 빠져도 이상할 것 없는 낭만적인 밤입니다. 

낙원상가를 막 지나 꽃가게에 들어갑니다. 많은 사람들이 꽃을 사려고 기다리네요. 혹시 내가 원하는 꽃이 모두 팔리지 않을까 조바심이 납니다. 내 차례가 되고 재빨리 꽃 한 단을 잡습니다. 프리자아입니다. 마치 해처럼 빛나는 노란색입니다. 꽃가게 아가씨는 프리지아의 꽃말이 ‘당신의 앞날’ 이라고 합니다. 당신의 앞날은 오늘밤 내리는 눈처럼 하얗습니다. 나는 프리지아를 품에 안고 찻집으로 갑니다. 


나는 창 너머로 눈에 잠기는 골목을 보고 있습니다. 카페의 벽난로에서 장작이 타고 있습니다. 장작 불빛이 등대처럼 비치면, 프리지아는 노랗게 빛납니다. 
땡그랑, 종이 울리고 문이 열립니다. 그녀입니다. 등 뒤로는 하얀색 크레파스가 빗금 치듯 눈이 내리고, 나를 보며 천천히 다가옵니다. 그 순간 세상은 정지합니다. 모든 것이 멈춰 그대로 호박 속에 갇힙니다. 그녀와 나의 시간은 영원이 됩니다.

글 | 이승우
이승우 님은 보석과 삶에 관한 다양한 이야기와 정보들을 여러 매체에 기고하며 보석에 대한 대중의 인식을 확산시키려 애쓰고 있습니다. 문예지에 시를 발표한 시인이기도 합니다. 현재 보석회사 임원으로 근무하고 있으며, 미국 보석감정사(Graduated Gemologist) 회원으로 활동하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