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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커피 in 가요] 서른다섯 인생, 김인순의 <여고졸업반>

‘대마초파동’ 틈새에서 건진 불멸의 애창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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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밑이 가까워오던 1975년 12월 4일, 경향신문 사회면에 난데없이 당대 최고 인가가수들의 이름이 등장합니다. 절정의 인기를 구가하던 가수 이장희(당시 28), 윤형주(28), 이종용(26)이 습관성의약품관리법 위반으로 전격 구속됐다는 기사였죠. 머지않아 가요계에 불어 닥칠 피바람을 예고라도 하는 듯 기사는 “검찰은 이들 외에도 가수 배우 등 많은 연예인들이 대마초 담배를 피우고 있다는 정보에 따라 이들에 대한 수사도 펴기로 했다”는 말을 덧붙이고 있습니다.

우연의 일치인지 그 기사 하단에는 ‘社會淨化(사회정화)를 위한 캠페인-이대로 둘 것인가’ 시리즈 기사가 등장합니다. 캠페인의 주제는 ‘청소년 사이에 파고든 마리화나’였죠. 정신과의사, 심리학과 교수 등의 말을 빌어 마리화나 때문에 성실히 사는 사회 분위기가 흐려지고 있다고 개탄하는 내용이었죠. 이해를 돕기 위해 기사의 몇 대목을 그대로 옮겨봅니다.

“기지촌 위안부나 일부 연예인들 사회에서 해피스모크로 불리는 마리화나(대마초)가 이제는 대학생이나 재수생, 고교생들에게까지 퍼져 청소년들의 탈선을 조장, 큰 사회문제로 등장하기에 이르렀다. 재수생이나 일부 고교생들 사이에서 ‘잔디’라는 은어로 불리는 대마초는 명동, 무교동 일대의 고고클럽이나 대폿집, 음악감상실 등에서 애용되고 있으나 업주들은 알고도 못 본체 하여 청소년들의 악습은 더욱 심화되고 있는 실정이다.”

“광화문, 종로2가 등 학원가가 밀집한 골목 안에는 4~5명의 재수생들이 둘러서서 마리화나를 피우는 모습을 가끔 볼 수 있는데 유 모군(19)은 ‘부모나 사회가 우리들을 문제아로 보기 때문에 반항심이 생겨 술을 마시거나 마리화나를 피워 기분전환을 하고 있다’고 말해 점차 늘어가는 재수생끽연자의 심리상태를 대변하고 있다. 또 2일 서울종로2가 모 다방에서 대마초를 피우다 경찰에 적발된 K고교 최 모군(18)도 ‘호기심으로 시작된 대마초 피우기가 이제는 습관이 되어 끊을 수 없게 되었다’고 말했다. 이에 대해 Y학원 강사 오 모씨(32)는 ‘일부 재수생들이 마리화나를 피우는 것은 사실이지만 학원이 입시위주로 공부시키기 때문에 학교처럼 이들의 탈선을 강력히 단속할 수 없다’고 고충을 털어놓았다.”

가요계를 뒤흔든 당국의 검은 손

한날 한 시에 터져 나온 대마초 관련 기사들은 과연 우연의 일치였을까요? 그에 대한 답은 다음날 신문을 보면 짐작할 수 있습니다. 다음날부터 당장 ‘대마초’라는 단어가 도하 일간지를 도배하기 시작하죠. 최초 기사가 나간 다음날인 5일, 가요계의 실력자였던 신중현(당시 32)과 인기가수 김추자(26)가 습관성 의약품관리법 위반 혐의로 구속되고 그 다음날엔 박인수, 김정호, 정훈희, 장현, 손학래 등이 수배되었다는 기사가 나옵니다. 이른바 ‘대마초 파동’으로 불리는 연예계 최대 스캔들의 신호탄이었습니다.

여러 가지 정황을 살펴볼 때 이 스캔들은 정치적 위기를 타개하기 위한 정부당국의 기획수사라는 의혹이 짙습니다. 그해 5월 발표된 ‘긴급조치9호’로 거센 국민적 비판과 저항에 직면해 있던 정부는 6월 들어 갑자기 가요, 연극, 영화, 쇼 등 대중예술에 대한 사전심사 강화를 주요 내용으로 하는 소위 ‘공연활동 정화대책’을 내놓습니다. 명목은 퇴폐풍조를 일소한다는 것이었지만 국민들의 관심을 다른 곳으로 돌리려는 정치적 의도를 의심할 수밖에 없는 타이밍이었죠.

뒤이어 당국은 그해 발표된 대중가요 중 43곡에 대해 국가안보와 국민총화에 악영향을 준다는 이유로 방송 및 판매, 공연금지 처분을 내려버립니다. 내친김에 월북 작가들이 만든 87곡까지 금지곡으로 지정한 정부는 이미 한 해 전 크게 히트했던 이장희의 <그건 너> <한 잔의 추억>, 신중현과 엽전들의 <미인> 등의 히트송까지 금지곡으로 묶어 버리게 되죠. ‘가사가 저속하고 퇴폐적이어서.’ ‘국민의 단합을 저해하는 내용이어서’ ‘북괴를 고무 찬양할 위험성이 있어서’ ‘왜색이 너무 짙어서’ 등 금지 이유도 제각각이었습니다.

그렇게 금지 처분을 받은 곡들이 무려 227곡이나 되었습니다. 말 그대로 가요계에 대한 전방위적인 사정(司正)이 시작됐던 겁니다. 그런 만큼 대마초 연예인들을 대하는 당국의 회초리는 어느 때보다 매서웠습니다.

이장희, 윤형주 등 인기가수들의 공백기

요즘은 모발검사나 소변검사로 대마초 흡연 여부를 가려내지만 당시는 투서나 자백이 전부였습니다. 잡혀간 가수들은 다른 대마초 흡연자를 대라는 협박과 회유에 못 이겨 다른 동료의 이름을 적어줄 수밖에 없었다고 하죠. 훗날 알려진 일이지만 이들에게 가혹한 물고문까지 행해졌다고 합니다.

그 영향으로 김세환, 이태원, 이현, 이수미 등이 또 붙들려 들어갑니다. 한 달도 안 돼 경찰에 잡혀 들어간 대마초 연예인은 모두 54명으로 늘었습니다. 그 중엔 미8군 무대 주변에서 ‘해피 스모크’라 불리던 대마초를 쉽게 접할 수 있던 뮤지션들이 압도적으로 많았습니다. 붙잡혀 간 연예인들 중 가수가 23명, 연주자가 26명이나 됐으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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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5년 정부당국은 사회정화의 일환으로 대대적인 대마초 단속에 나섰다. 사진은 국정기록원 화면 사진 갈무리

당연히 가요계는 쑥대밭이 되었습니다. 방송사마다 당장 출연시킬 가수가 없어 곤혹을 치러야 했죠. 결국 이 사건으로 윤형주, 신중현, 이장희, 김추자 등 20명이 구속되고 11명이 불구속, 10명이 훈방조치를 받았습니다. 대부분 몇 달 후 벌금형 혹은 집행유예를 받고 풀려나왔지만 그들에겐 일체의 방송이나 무대에 서지 못한다는 출연금지 처분이 내려졌습니다. 1979년 박정희가 죽을 때까지 이들은 전혀 음악활동을 하지 못했습니다.

이 사건은 대중가요 판에도 일대 파란을 몰고 옵니다. 청년문화의 첨병으로 자리매김하고 있던 포크음악과 록밴드가 대마초라는 직격탄에 맞아 퇴조하고, 당시에도 벌써 한물 간 음악으로 치부되던 트로트와 스탠더드 팝 계열의 복고음악이 유행하기 시작한 겁니다. 가요정화운동이라는 미명 아래 자행된 금지곡 지정, 대마초 파동으로 인한 인기 가수들의 구속과 출연금지는 가요계의 중심추를 옮겨놓기에 충분한 사건이었습니다.

이러한 과도기에 힘의 다시 주목받기 시작한 것이 대마초와는 상관없는 일부 가수들과 새롭게 얼굴을 내민 신진 세력이었습니다. 그 당시 분위기는 1976년 1월23일자 경향신문의 ‘양상 바뀌는 국내가요계’라는 제하의 기사에 잘 나와 있습니다.

“금년 들어 국내 가요계의 인기 판도는 전례 없는 이변 속에 크게 양상이 바뀌어 가고 있다. 거의 쇠퇴해 버렸던 트로트 계열의 리듬이 머리를 들기 시작해서…(중략)…매주 일요일 저녁 방송되는 MBC ‘인기가요20’에는 조미미와 송대관, 박일남 등 이미 3~4년 전부터 거의 사라져버리다시피 했던 흘러간 가수들이 다시 등장하고 있다는 것도 재미있는 현상이다. 지난주 인기가요20에서는 신인 김인순의 ‘여고졸업반’이 랭킹 1위를 차지했다. 그리고 2위가 조미미의 ‘연락선’, 3위는 송대관의 ‘해뜰날’이었다. (중략) 최근 팝계열의 새로운 히트곡들이 대거 금지곡으로 지정된 데다 대마초 사건으로 이 분야의 가수들이 위축을 당하고 있는 것이 큰 이유인 듯하다.”

혜성처럼 등장한 앳된 얼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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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인순의 노래앨범 재킷

호랑이 없는 골을 단숨에 평정한 이는 앳된 얼굴의 신인 여가수 김인순(당시 23세)이었습니다. 이후 몇 년 간 가파른 인기를 구가하게 되는 김인순은 중장년층에겐 지금도 <여고 졸업반>이란 불멸의 히트곡으로 기억되고 있는 가수죠.

이 세상 모두 우리 거라며 이 세상 전부 사랑이라며
날아가고파 뛰어들고파 하지만 우리는 여고졸업반
아무도 몰라 누구도 몰라 우리들의 숨은 이야기

뒤돌아보면 그리운 시절 생각해보면 아쉬운 시간
돌아가고파 사랑하고파 아, 잊지 못할 여고 졸업반

노래가 실린 건 그녀의 독집이 아니라 1975년 11월 5일에 발매된 《Golden Folk Album 12》란 옴니버스 시리즈 앨범입니다. 70년대 중반 킹박(박성배)과 함께 음반업계를 양분했던 오리엔탈 프로덕션 나현구 사장 휘하의 가수들이 대거 참여한 음반이었죠.

<여고 졸업반>이 앨범 타이틀곡으로 부각된 건 그해 개봉한 하이틴영화 <여고 졸업반>의 흥행 덕분이었습니다. 단관개봉이 전부였던 당시로는 빅히트라 할 수 있는 4만 명의 관객을 동원한 이 영화의 주제곡이 바로 김인순이 부른 동명의 노래였던 겁니다.

여주인공 임예진을 청소년의 우상으로 만든 이 영화를 통해 가수로는 거의 신인이나 다름없던 김인순도 주가가 치솟게 됩니다. 가사도 단조롭고 형식도 단순한 곡이지만 학창시절의 아련한 추억을 떠올리게 하는 이 노래는 발표와 함께 일약 최고의 넘버 원 히트송으로 떠오릅니다.

노래의 인기에 불을 지핀 건 라디오DJ로 이미 청소년들에게 친숙했던 김인순의 존재였습니다. 이화여고 출신인 김인순은 여고 시절 이미 교내에서 7번의 개인 리사이틀을 열었던 재목이었습니다. 1972년 학교 앞으로 찾아온 CBD PD의 요청으로 방송출연 경험까지 있던 그녀는 대학 입시에 실패하자 공부에 대한 미련을 접고 방송국을 찾아옵니다. 그녀의 끼와 재능을 한 눈에 알아본 가수 이장희가 자신이 진행하던 ‘0시의 다이얼’에 포크싱어로 초대한 것을 기회로 김인순이란 이름 석 자가 방송가에 조금씩 알려지기 시작합니다.

모범생이었던 데다 학업성적도 좋았던 김인순은 풋풋하고 재치 넘치는 말솜씨까지 겸비한 재원이었습니다. 결국 그녀는 몇 달 만에 KBS라디오 <젊은이의 광장>의 DJ로 전격 발탁되었고, 이듬해인 1974년에는 동양방송라디오 ‘팝송 다이얼’이란 프로를 맡아 진행자로 이름을 날리게 되죠.

청소년들이 즐겨 듣던 라디오 프로그램 DJ로 유명해진 김인순은 애초의 바람대로 가수 데뷔의 꿈도 이루게 됩니다. 그녀의 데뷔 앨범은 1974년 5월 유니버살 레코드를 통해 발매된 《비오는 날에는/ 외로운 소녀》란 독집 앨범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그로부터 일 년 후, 이 신인가수는 <여고 졸업반>으로 일약 최고의 스타덤에 오르게 됐던 것입니다.

서른다섯 젊은 나이에...

하이틴영화가 성행하던 1970년대, 김인순은 하이틴영화 주제가 전문가수로 불릴 만큼 맹활약을 보였습니다. 청소년영화 <소녀의 기도>를 비롯해 <청색시대> <너무 너무 좋은 거야> <푸른 교실> <친구 사이> <선생님 안녕히> 등에서도 주제가를 직접 불렀죠. 이십대 초반의 싱그러운 이미지로 어필한 김인순의 인기는 이때가 최고 상종가였습니다. 1977년엔 영화주제가만 따로 모은 2장‘의 음반이 발표될 정도였으니까요.

청순하고 밝은 이미지의 그녀는 어쩌면 군사정권이 가장 이상적으로 생각한 가수상이었을 지도 모릅니다. 결국 그녀는 이 노래의 히트로 1976년 ‘MBC 10대 가수’로까지 선정되는 기염을 토하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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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0년 대 후반 인기를 구가했던 김인순은 결혼 후 잠시 무대를 떠났다가 1981년에 활동을 재개했다

아쉽게도 1978년 9월 결혼과 함께 무대를 떠났던 그녀에게 과거와 같은 영광은 재현되지 않았습니다. 결혼한 지 2년 만인 1981년 의욕적인 모습으로 활동을 재개했지만, 소녀의 이미지가 벗겨진 김인순의 인기는 예전만 같지 않았습니다. 결국 그녀는 가정주부로서의 삶에 충실한 한편 밤무대 출연으로 가수활동을 이어갔습니다.

방송을 통해 잊을 만하면 한 번씩 얼굴을 비추던 그녀가 서른다섯의 젊은 나이로 세상을 떠난 건 1988년 5월 18일이었습니다. 그녀의 갑작스런 사망 소식을 전하는 다음날 동아일보의 기사를 옮겨보겠습니다.

“밤 11시 40분경 김 씨는 인천시내 모 업소 출연 후 자신의 승용차인 로얄살롱을 타고 귀가하기 위해 경인고속도록 가좌인터체인지로 가던 중, 신호등 없는 사고 지점에서 부평에서 인천 쪽으로 과속으로 달리던 7.5톤 트럭이 승용차 옆구리를 들이박는 바람에 승용차 운전기사 이 씨와 함께 현장에서 변을 당했다.”

대마초 파동으로 뒤숭숭하기만 했던 1970년대 중반, 가요계는 약관의 여가수 김인순(金仁順)의 등장으로 뜨거웠습니다. 불꽃처럼 뜨겁게 한 시대를 풍미했던 이 비운의 여가수를 생각하면 소녀처럼 수줍게 눈웃음 짓던 그녀의 얼굴이 떠오르곤 합니다.

글 | 김정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