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찻잔 스토리텔링
고려문인 이규보의 차 사랑

시대와의 불화를 차로 다스린 휴머니스트

고려 무신 정권의 한 가운데를 살았던 백운거사 이규보(李奎報, 1168~1241)가 어느 날 산사에서 차 한 잔을 마시고 있다. 11세 때 이미 문재를 인정받아 신동으로 이름을 날렸던 그였지만 40세가 되어서야 비로소 한림원에 이름을 올릴 수 있었다.
관직에 오르지 못하던 시절에 그는 여러 승려들의 도움을 받으며 문필 활동을 이어갔다. 차 한 잔을 마시며 그의 붓끝이 그려낸 당대의 차 문화는 정결하면서도 해학이 엿보이는 일상의 삶 자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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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신정권 치하, 차로 견디다

우리나라 차 문화의 중흥기를 이끌었던 고려시대는 불교를 지배 이데올로기로 하는 불교국가였다. 자연스럽게 승려들의 영향력이 컸던 당시에 차 문화는 여러 측면에서 전성기를 맞았다. 차를 가까이 했던 여러 인물 중에서도 이규보는 ‘시대와의 불화’를 겪은 대표적인 고려의 문인이다.

무신들의 정변이 일어나면서 무인들에게 권력을 내준 문인의 울분을 그는 ‘죽림고회’라는 모임을 통해 삭였다. 진(晉)의 죽림칠현을 모방한 이 모임은 당대 내로라하는 문인들이 참여한다. 문장가였던 오세재를 비롯해 가전체 문학의 대표작으로 꼽히는 <국순전>과 <공방전>을 쓴 임춘, <파한전>을 쓴 이인로가 멤버였다. 그 외에도 조통, 황보항, 함순, 이담지 등이 모임에 참여했다.  

차 관련 시 30여 편, 음용부터 보관까지 꼼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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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규보의 《동국이상국집》에는 차를 마시는 즐거움을 노래한 시들이 삼십여 편 이상이 실려 있다. 그의 차 사랑은 단순히 차를 마시는 것에 지나지 않았다. 고려시대 차의 주요 생산지가 전라도와 경상도였다는 것을 고려해보면 수도인 개경을 포함한 북쪽지방으로 옮기는 방법이나 포장에도 고려인들은 기술적인 방법을 많이 고민했던 것으로 보인다. 이규보는 특히 차의 보관방법에도 많은 관심을 기울였다. 그의 글 몇 구절에서 차를 아끼는 마음이 절절히 묻어나온다.

“맑은 향이 새어나갈까 염려하여 / 상자 속에 겹겹이 넣고 칡넝굴로 묶었네”와 같은 구절이나 “내 벗 일암거사 정분이 보낸 차는 / 하얀 종이 바른 함에 붉은 실로 얽혀 있지”와 같은 표현을 읽으면 차에 관한 그의 정성이 새삼 다가온다.  

이규보가 살았던 시대는 고려의 차 문화가 절정을 향하고 있던 시기였다. 송나라와 견주어도 손색이 없던 이 시대의 차 문화는 특히 대표적인 차주발인 다완(茶碗)에 와서 꽃을 피운다. 왕실과 귀족을 비롯해 승려들이 차를 마실 때 애용했던 다완은 순백의 부드러움이 시각적으로 향미를 더하게 해주는 최고의 다구였다. 특히 이 시기에 유행했던 백차의 맛을 더욱 깊게 했던 흰 빛깔의 다완은 송나라의 검은 차주발인 ‘흑유’에 비해 미학적으로도 더 높은 평가를 받는 고려인들의 예술적 성취 중의 하나였다. 

귀족 차 문화의 이면 

하지만 차를 마시는 풍속이 성행하면서 부정적인 모습도 드러난다. 순수하게 차를 음미하는 데서 벗어나 사회적으로 사치품의 성격을 띠면서 고려 사회의 제도적 모순이 함께 드러난다. 상류계층에서 다양한 다회(茶會)가 열리면서 차를 공급하는 역할을 했던 민중들에게 여러 형태로 부당한 억압이 가해진 것이다.

이규보는 이런 시대적 상황에 대해서도 목소리를 내었다. 백성들이 차세와 관련해 겪는 고통을 낮춰줄 것을 요구하는 편지 형식의 시에서 손한장이라는 관리에게 그는 이렇게 일갈한다.  

관에서 감독하여 늙은이와 어린아이까지 징발하였네 (중략)
차는 백성들의 애가 끊는 고혈이니
수많은 사람들의 피땀으로 얻은 것 (중략)
산림과 들판을 모두 불살라 차의 공납을 금한다면
남쪽 백성들이 차세를 면하는 것은 이로부터 시작되리니  

왕실과 귀족들을 포함한 상류계층에게 상납한다는 명목으로 고려 정부는 노인과 어린이들까지 차를 따는 노역에 차출한다. 심지어 만들어 놓은 차를 개경까지 등짐으로 나르도록 백성들에게 압박을 가했다. 이런 분위기 속에서 고려 백성들은 차로 인한 폭정과 차세를 피하기 위해 차나무에 불을 지르고 찻잎이 수확되는 산림을 훼손하는 일이 심심찮게 일어났다.
이규보는 누구보다 차를 아끼고 가까이 했지만 올바른 차 문화가 무엇인지도 생각했던 인물이 아니었을까. 백성의 고혈을 짜내 마시는 차에서는 정신의 순수와 무욕의 정결함이 우러나지 않는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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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화도 길상면에 있는 이규보 묘 [출처: 문화재청]


고려의 차 문화가 만들어 낸 부정적인 상황은 결국 고려 말까지 이어진다. 조선이 개국하면서 왕실에서 차 문화는 퇴출의 과정을 밟는다. 덧없는 권력이나 부질없는 욕망은 기실 아무것도 아니라고 말하는 그의 시 한 편을 옮긴다. 고려시대 휴머니스트였던 그를 떠올려 본다.  

산승이 달빛을 탐하여
병 속에 물과 함께 길어 담았네
절에 다다르면 바야흐로 깨달으리라
병 기울이면 달빛 또한 텅 비는 것을
_ 이규보, <영정중월(詠井中月)>

글 | 오형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