웹진 카페人  
찻잔 스토리텔링
한옥 400채 값으로 고려자기를 인수하던 날

간송 전형필과 커피

주말이면 종종 집 근처 전형필 가옥으로 산책을 간다. 토박이 할머니들에겐 여전히 ‘간송 옛집’이란 정겨운 이름으로 불리는 이 근대식 한옥은 일제강점기 일본인의 수탈로부터 우리 문화재를 보호하는 일에 앞장섰던 간송 전형필(1906-1962)이 황해도 및 경기북부 일대의 소출 관리를 위해 잠깐씩 머물던 별장으로 간송 말년의 거처가 되어주었던 곳이다.

찻잔스토리텔링1.jpg

서울 방학3동에 위치한 ‘간송 옛집

도봉산 등산로로 이어지는 어느 골목 끝에서 이 유서 깊은 한옥을 처음 만나게 된 건 이사 온 지 얼마 되지 않은 몇 해 전 초겨울이었다. 한옥은 첫눈에 보아도 막 낙향한 시골 선비처럼 어딘가 모르게 이 서울 끝 동네와 어울리지 않는 기품과 단아함으로 눈길을 사로잡았다. 완만하게 늘어진 본채 처마에 내려앉은 겨울햇살의 양감이 비현실적으로 느껴질 만큼 묵직해 보여 오랫동안 눈길을 떼지 못했던 기억이 새롭다. 이렇듯 기품 있는 한옥, 그리고 이곳에서 말년을 보낸 집주인 전형필은 대체 어떤 존재였을까? 

“인간과 짐승을 구분하는 것이 문화”

기록에 따르면 1900년 이 집을 지은 이는 간송 전형필의 양부인 전명기로 알려져 있다. 그는 원래 간송의 작은아버지였는데 후사를 얻지 못해 형 전영기의 둘째아들인 형필을 입양해 호적에 올리고 친부모 못지않은 애정을 쏟았다. 
 

아버지 형제가 모두 배우개(종로4가)에서 상업으로 큰 부를 이룬 자산가였던 까닭에 훗날 간송이 친형 형설의 죽음으로 두 집안의 유산을 전부 상속받았을 때는 무려 10만 석이 넘는 재산이 되었다. 지금 시세로 환산해도 6,000억 원이 넘는 큰돈이었으니 스물네 살 간송의 앞날이 사치와 향락으로 채워졌더라도 이상할 게 없는 상황이었다. 


하지만 간송은 휘문고보 졸업 후 와세다 법학부에 다니던 3학년 겨울방학 때 서울에서 민족대표 33인 중 하나인 오세창을 만나면서부터 삶의 방향을 완전히 수정하게 된다. 추사 김정희의 적통을 이어 받아 서화와 고증학의 대가로 이름을 날리던 오세창은 간송에게 민족정신을 눈뜨게 해준 정신의 스승이었다. 

“인간과 짐승을 구분하는 것이 바로 문화라는 것일세. 그런 의미에서 한 나라의 문화재란 그것을 공유하는 사람들의 주체성과 정신적 가치가 깃든 최고의 유산이야. 즉 우리 문화재야 말로 민족의 정신이 함축된 물질의 유산이니 민족 모두가 목숨을 걸고라도 반드시 지켜야 하는 것일세.” 


민족의 문화재를 지키기 위한 열정과 지식에 감명 받은 간송은 이후 고미술품 고증과 감식에 스승의 도움을 받으며 우리 문화재 보호에 전념하려는 뜻을 세우게 된다. 우리 문화재가 일본인의 손에 넘어가는 것만은 막아야 한다는 것이 한결같은 간송의 마음이었다. ‘민족문화의 정수인 문화재에 비하면 돈이란 건 얼마나 하찮은 물건인가. 그 하찮은 것을 지키려고 민족의 유산이 침략자들의 손에 넘어가는 걸 가만히 지켜보기만 한다는 건 얼마나 가련하고 보잘 것 없는 삶인가!’ 간송은 그렇듯 자신의 결심에 한 치의 후회도 없는 삶을 살다간 사람이었다.    

일제강점기 우리 문화지킴이

 간송이 20대를 보내던 1930년대 중후반, 일본은 한반도 곳곳에 산재한 조선 민족의 문화유산을 강탈, 반출하는 일에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있었다. 돈이 될 만한 유물이 있다 싶으면 왕가의 무덤을 도굴하거나 대대로 보관해온 민가의 보물을 강매, 수탈하는 짓도 서슴지 않았다. 간송 역시 이에 맞서기 위해 관훈동의 고서화 점포였던 한남서림(翰南書林)을 인수해 그곳을 거점으로 일본인들이 눈독을 들이던 우리 문화재를 지키는 일에 팔을 걷어 붙였다. 
 

그 무렵 일본 도쿄에 살던 영국인 변호사 존 개스비는 고려자기 콜렉터로 이름이 높았다. 30년 전 일본으로 건너온 그는 우연한 기회에 동양 자기에 관심을 갖게 되어 이후 20년 이상 꾸준히 고려자기를 수집해온 사람이었다. 수장량도 많았고, 수장품들 역시 하나 같이 명품으로 소문이 자자했다. 간송은 도쿄의 골동품상에게 사람을 보내 만약 개스비가 수장품을 처분할 기미가 보인다면 지체 없이 자신에게 기별을 달라고 신신당부한 후 조용히 때를 기다렸다. 


1936년 일본이 영국이나 미국과 전쟁을 준비하고 있다는 걸 짐작한 개스비는 결국 귀국 전에 자신의 수장품들을 모두 처분하기로 하고 조용히 구매자를 찾아 나서게 된다. 소식을 들은 간송은 당장 도쿄로 달려갔다. 
개스비의 저택에 초대받아 수장품 목록을 확인한 간송은 복받치는 감격에 몸을 떨었다. 청자상감유죽연로원앙문정병(훗날 국보 66호 지정), 백자박산향로(보물 238호), 청자기린뉴개향로(국보 65호), 청자압형수적(국보 74호), 청자상감포도동자문매병(보물 286호), 청자상감국모란당초문모자합(보물 349호) 등 하나 하나가 다시 보기 힘든 명품이었다. 간송은 급하게 처분해온 공주 농장의 판매대금을 통째로 내놓으며 소장품 전부를 사들이겠다고 제안했다. 


굳건히 지켜낸 국보와 보물들 

기록에 의하면 이때 50대의 나이였던 개스비는 간송에게 ‘향이 좋은 커피’를 대접했다고 한다. 모락모락 뜨거운 김이 피어오르는 커피 잔을 사이에 두고 짧은 순간 두 사람은 각자 무슨 생각을 했을까? 확실한 건 두 사람 모두가 흥정에 더 유리한 조건 따위를 고민하지는 않았다는 것이다. 한참 동안 말없이 식민지 조선의 젊은이를 응시하던 개스비가 입을 열었다.  

“일본 침략 이후 조선의 귀중한 유물들이 안목이나 애정도 없는 일본인들 손에서 좌지우지되는 게 못내 안타까웠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전 선생 같은 조선인이 애정을 보여주시니 맘이 놓입니다. 좋습니다! 제 수장품 모두를 선생께, 아니 조선에 돌려 드리겠습니다.”       
 

서른두 살의 간송이 스무 점의 개스비 컬렉션을 모두 인수하는 데 든 비용은 40만 원, 당시 시세로 서울 시내 기와집 400채를 살 수 있는 큰돈이었다. 하지만 간송에겐 어떤 값을 치르더라도 반드시 찾아와야 할 귀한 물건이었다. 그때 사들인 개스비 컬렉션 중 9점은 광복 후 국보와 보물로 지정되어 지금도 간송미술관에 보존되어 있다.  
 

이밖에도 간송이 일본인들로부터 지켜낸 우리 문화유산은 너무 많아 일일이 그 수를 헤아릴 수가 없다. 추사 김정희, 겸재 정선, 단원 김홍도, 혜원 신윤복, 오원 장승업 같은 화공들의 그림은 물론 고려청자와 조선백자, 석탑 등 셀 수 없이 많은 문화유산과 유물이 간송 한 사람의 노력에 힘입어 민족의 품으로 다시 돌아왔다. 


한평생 자신을 위해서는 한 푼의 돈도 허투루 쓰지 않는 검소한 생활을 유지했던 간송은 돈을 써야 할 일에는 망설이지 않고 지갑을 여는 호남아였다. 귀한 물건이라면 값에 연연하지 않는다는 소문 덕분에 일본인들이 호시탐탐 침을 흘리던 진귀한 고서화, 서적, 도자기에 대한 정보가 빠짐없이 흘러들었다.      


1940년경, 오랜만에 한남서림에 들른 간송의 눈에 바쁜 걸음으로 가게 앞을 지나는 서적 골동상인 하나가 포착된 것 또한 천운(天運)이라고 밖에 할 수 없는 일이다. 옛 서적을 거간하러 가끔 들르던 상인이 그날따라 허둥지둥 가게 앞을 지나치는 걸 이상하게 여긴 간송은 사람을 내보내 가게 안으로 그를 불러들였다. 급한 일이라도 있는 듯 내내 안절부절 못하던 그가 마침내 간송에게 엄청난 소식을 털어놓았다.

“실은 지금 경상도 안동에서 훈민정음 해례본이 나타났다는 정보가 돌아 모두가 제 정신이 아닙니다. 책 주인이 일천 원을 불렀다고 해서 저도 지금 백방으로 돈을 구하러 다니는 길입니다.”

찻잔스토리텔링2.jpg
훈민정음 해례본

한글창제 원리가 기록된 훈민정음 해례본은 조선총독부에서도 눈에 불을 켜고 찾고 있던 보물 중의 보물이었다. 만약 그 책이 일본인들의 손에 들어간다면 이후에 벌어질 일은 불을 보듯 뻔했다. 조선어사전을 만들었다는 이유만으로 수많은 한글학자들을 감옥에 가두고 고문을 가했던 종자들이니 어떻게든 책을 훼손해버리거나 영영 감춰버릴 게 분명했다. 
 

간송은 즉시 주인에게 책값의 열 배나 되는 1만 원의 거액을 주고 훈민정음 해례본을 사들인 뒤 광복이 될 때까지 철저히 이를 비밀에 붙였다. 진위 여부조차 밝혀지지 않은 훈민정음 상주본을 볼모로 삼아 1,000억 원을 요구하며 대치중인 요즘의 어느 장사치에 비하면 사라질 위기에 놓인 민족 문화를 보존하는 일에 전 재산을 아끼지 않은 간송의 일생은 아예 다른 차원의 삶이었던 것이다.    

찻잔스토리텔링3.jpg

간송 옛집 뒤 언덕에 있는 간송 전형필의 묘소

‘나는 무엇에 충실한 삶을 살고 있을까’   

오늘처럼 간송 옛집 앞을 지날 때면 먼발치에서나마 간송이 잠들어 있는 언덕 위 묘소를 향해 옷깃을 여미게 된다. 집은 1962년 간송이 세상을 떠난 뒤 종로 본가가 철거되면서 나온 자재로 부분 개축해 오늘에 이르고 있다. 이 단아한 한옥집 앞에 서서 잠시마나 몸과 마음을 가다듬어 보노라면 한 세상을 살아내는 일이 왠지 모르게 더 숙연하게 다가온다. 
       
간송 옛집 골목 입구에는 그 옛날 영국인 개스비의 응접실에서 간송이 마셨음직한 ‘향이 좋은 커피’를 파는 카페가 있다. 카르페 디엠(carpe diem)이란 이름을 가진 그 카페에서 커피 한 잔을 사들고 나오니 오래 전 그날처럼 초겨울 햇발이 한옥 처마에 긴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었다. 

찻잔스토리텔링4.jpg

간송 옛집 옆 골목에는 ‘카르페 디엠’이란 카페가 있다.

카르페 디엠은 ‘오늘에 충실하라’는 뜻의 라틴어로 종종 ‘현재를 즐겨라’라는 말로 의역되기도 한다. 이 순간에 충실하라는 그 말처럼, 내 남은 삶 또한 매순간 알차고 단단한 것으로 가득 채워질 수 있으면 좋겠다. 아니, 그보다 앞서 나는 지금 무엇에 충실한 삶을 살고 있는지 돌아보는 일이 먼저일지도 모르겠다.  

 

글 | 김정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