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찻잔 스토리텔링
이름으로만 남은 어느 호텔 여주인을 기리며

조선 사교계의 여왕이 조선을 떠나던 밤!

이 글은 19세기 말 이 땅에 들어와 500년 왕조의 몰락을 지켜보았던 어느 서양 여성이 조선에서 마지막 밤을 보내던 기억에 관한 이야기이다. 몇몇 역사 기록과 후대 연구자들의 견해를 참고했을 뿐, 이 모든 이야기는 호기심과 상상력에서 시작된 허구임을 밝혀둔다.

짧은 여름밤을 아쉬워하는 풀벌레 소리에 눈이 떠졌다. 한참 동안 이불 속에서 몸을 뒤척이던 프랑스계 독일인, 앙투아네트 손탁(Antoinette Sontag)은 긴 한숨과 함께 몸을 일으켜 의자에 벗어두었던 스웨터를 걸치고 침실을 나섰다. 조선의 가장 큰 명절인 추석을 열흘 앞두고 있는 1909년 음력 8월 5일, 정들었던 조선에서의 마지막 밤을 견디려면 아무래도 독한 위스키 한 잔이 더 필요할 듯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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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도를 빠져나오자 어둠에 잠긴 호텔 로비가 한 눈에 들어왔다. 침실을 비롯한 손탁의 거주공간은 일반 객실, 식당, 커피숍이 자리한 호텔 1층 안쪽에 위치하고 있었다. 1895년 고종이 정동 29번지 일대의 왕실 소유 토지 1,184평에 방 5칸짜리 한옥을 지어 선물했던 것을 허물고 1902년 25개의 객실을 가진 서양식 2층 벽돌 건물로 신축한 손탁호텔은 아무나 이용할 수 없는 VIP용 프라이빗 호텔이었다. 욕실이 딸려 있는 각 객실엔 냉온수와 전기등, 최신 위생시설이 고루 갖춰져 있었고, 조선 사교계의 중심지라 불리던 2층 연회실에서는 매일 밤 호화로운 파티가 열렸다.

손탁은 이 멋진 건물을 가질 수 있도록 도와준 고종에게 새삼 고마움을 느꼈다. 왕이 직접 왕실의 내탕금까지 내어 호텔을 세워준 이유가 러시아 영사관과의 은밀한 정치적 심부름에 대한 대가라는 소문도 있었으나 왕과 그녀 사이에 어떤 밀담이 오갔는지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조선 사교계의 여왕으로 군림해온 위상을 말해주듯 화려한 서양식 인테리어와 유럽에서 수입한 집기들로 꾸민 호텔은 손탁의 크나큰 자부심이었다.

중요한 정치적 사건에 입김을 미칠 수 있을 만큼 고종의 절대적인 신임을 얻고 있다는 소문이 과장만은 아니었다. 왕의 배려에 힘입어 호텔 사업은 계속 번창해왔다. 국빈을 접대하는 왕실의 영빈관(迎賓館) 역할을 겸했기에 호텔은 조선을 방문한 외교사절단과 서울에서 활동하는 각국의 외교관들, 친일파로 돌아서기 전 친러파로 활동하던 이완용, 이용익 같은 정동파와 몇몇 유력인사에게만 출입이 허용된 조선 최고의 사교장이었다. 그 모두가 ‘왕을 움직이는 여자’라 불려온 손탁의 위상에 어울리는 것들이었다.

불 꺼진 식당 안에서 위스키 한 잔을 따라 나오던 그녀는 침실로 돌아가기 전 걸음을 추고 호텔 2층 귀빈실로 오르는 계단을 올려다보며 기이한 감상에 젖어들었다. 이제 내일이면 그 모든 익숙했던 것들과 작별하게 된다는 생각이 왠지 모르게 마음을 착잡하게 했다.

‘그런가! 참 많은 이들과의 만남과 더 많은 역사적인 일들을 바로 저곳에서 도모했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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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한 외교관들과 함께 있는 손탁(아래 오른쪽에서 두 번째). by 공공누리(한국콘텐츠진흥원)

문득 그녀의 머릿속에 열흘 전 2층 귀빈실에서 열렸던 자신의 귀국 송별파티가 떠올랐다. 독일 총영사가 특별히 마련한 그 자리엔 황족은 물론 조선에서 활동 중인 각국의 외교관들과 조선 사교계의 명망 있는 인사들이 빠짐없이 참석해 24년의 조선 생활을 끝내고 고향으로 돌아가는 그녀의 장도를 축하해 주었다. 한 명 한 명 파티 참석자들의 얼굴을 떠올리며 손탁은 그들 중 누구도 자신의 도움을 필요로 하지 않던 자가 없다는 사실에 남모를 자부심을 느꼈다.

영국 역사가 에드워드 기번(Edward Gibbon)이 ‘역사는 인류의 범행, 우행, 행운의 등기부다’라고 했다던 말을 떠올리며 그녀는 자신이 조선에서 보고 듣고 겪었던 일에 대해 자문해 보았다. ‘내가 이 조선 땅에서 한 일들은 범행이었을까, 우행이었을까, 행운이었을까?’

분명 그녀에게는 행운이었다 해야 할 일들이 더 많았다. 1885년 중국 텐진에서 주 조선 초대 러시아영사로 부임하는 제부를 따라 조선으로 들어올 때만 해도 전혀 주목받지 못했던 그녀는 이제 조선 신문에까지 ‘손탁 양이 이달 중에 고향으로 떠난다’는 기사가 실릴 만큼 사교계의 유명인사가 되어 있었다.

입국 이듬해 궁내부 소속으로 외인 접대를 맡았던 그녀가 고종 부부의 절대적 신임을 얻게 된 것이 단순히 프랑스어, 독일어, 영어, 러시아어, 조선어 등 5개 국어를 자유롭게 구사할 수 있기 때문은 아니었다. 통역이야 그녀가 아니더라도 입속의 혀처럼 해낼 수 있는 이들이 더러 있을 것이었다. 하지만 왕과 왕비에게 조선말로 자신이 직접 보고 들은 국제정치 상황과 서양인들의 습관, 풍속 그리고 그들이 즐기는 요리, 미술, 음악 등에 대해 들려줄 수 있는 서양인은 많지 않았다. 더욱이 손탁은 그 무렵 왕이 정치적으로 가까이 두고 싶어 하던 러시아공관의 사람이었다. 서양요리에 호감을 보이는 왕에게 커피라는 음료를 소개한 게 바로 자신이었다는 데까지 생각이 미치자 굳게 닫혀 있던 손탁의 입가에 다시 흐뭇한 미소가 번졌다.

돌이켜 보면, 일본 낭인들의 칼에 사랑하는 왕비를 잃고 두려움에 잠 못 이루던 고종을 1896년 경복궁에서 몰래 러시아대사관으로 모시고 온 것은 신의 한 수나 다름없었다. 청일전쟁의 승리에 취해 오만방자해진 일본을 멀리하려는 고종에게도, 조선에서의 영향력을 확대하려던 러시아에게도, 왕실의 신임을 바탕으로 이국땅에서 신분상승을 꾀하던 손탁에게도 손해 볼 것 없는 거래였음이 분명했다.

그 일의 성공 뒤엔 순풍에 돛을 단 듯 모든 사업에 거침이 없었다. 호텔도 그 무렵 왕이 직접 하사한 것이었다. 궁내를 오가며 러시아대사관과 왕실 사이의 은밀한 정치적 거래에 심부름을 자처할 때만 해도 그녀는 제부 베베르가 영사 임기를 마치고 돌아간 뒤에도 조선에 남아 왕의 비호 아래 범행인지 우행인지 모를 여러 일들을 은밀하게 처리하게 될 줄은 짐작도 하지 못했지만 혼자 된 왕은 그녀에게 더 많은 부분을 의지했다. 왕실의 서양물품 구매를 전담하게 했고, 왕실 재산을 외국인에게 매각하는 일을 돕게 했다. 그녀를 통해 여러 이권 사업을 추진하는 국내외 사업가들을 소개 받기도 했다. 그러는 사이 서른한 살의 독일처녀는 쉰다섯 살의 중년 여인이 되며 조선의 숨은 권력자로 군림해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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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탁호텔 실내 모습. by 공공누리(한국콘텐츠진흥원)

‘누가 뭐래도 내가 조선을 제3의 조국이라 말할 만큼 사랑한 것은 사실이었어’ 하고 뇌까리며 손탁은 바닥에 남은 위스키를 단숨에 비워버렸다. 이제 그 영광의 시절과도 작별이었다. 내일이면 그녀는 모든 것을 정리하고 고향으로 돌아갈 계획이었다. 1905년 러일전쟁에서 승리한 일본이 이듬해 심약한 왕을 겁박해 을사늑약을 체결한 뒤로 그녀의 모든 활동과 사업은 예전만 못하게 되어버렸다. 패자에겐 할 말이 없었다.

그날 이후 은밀히 모든 재산을 정리하고 호텔 매각까지 무사히 완료한 것만 해도 다행이었다. 이제 자신의 퇴장과 함께 호텔 역시 많은 것들이 소실될 것이었다. 훗날 영국 총리가 될 윈스턴 처칠이란 젊은 종군기자가 1904년 러일전쟁 취재를 위해 반도를 방문했을 때나 조선인들에게 악명 높던 이토 히로부미가 두 번이나 이곳에 머물렀던 사실도 이제 그녀만이 기억하게 될 호텔의 작은 역사였다.

자신에게 건물을 인수한 사업가 J. 보에르가 손때 묻은 이 건물을 온전히 보전해주길 바랐으나 그건 어디까지나 그녀의 바람이었다. 8년 후 건물과 부지 전체가 이화학당에 팔려 여학생 기숙사로 활용되다 1922년 완전히 철거될 것임을 그날 밤 손택은 전혀 짐작도 하지 못했다.

다음날 서울을 출발해 고향으로 떠난 앙투아네트 손탁은 그로부터 13년 후인 1922년 7월 7일 오전 8시, 프랑스 칸에 있는 자택에서 영면했다. 시립천주교묘지에 안장된 그녀의 묘비에는 ‘조선황실의 서양전례관 마리 앙트와네트 손탁’이라는 문구가 새겨져 있다.

숨을 거두는 순간 손탁은 조선에서의 마지막 밤을 떠올리고 있었다.

글 | 김정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