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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드 스토리] 커피 프렌드 ① - 빵

빵이 곧 평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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커피와 잘 어울리는 음식으로 쉽게 떠올리는 게 빵입니다. 커피의 오랜 친구라 할 만합니다. 쌀이 주식인 한국인의 식습관에도 빵은 든든하게 자리 잡았습니다. 모닝커피에 바삭하게 구워진 빵을 먹는 모습은 상상만으로도 평화롭습니다.

빵은 효모나 다른 발효제로 부풀린 가루반죽을 오븐에 구워낸 음식. “약 6천 년 전 고대 이집트 농부의 인내심과 화학자의 호기심으로 발견”되었습니다. 《빵의 역사》(우물이 있는 집, 2002)의 저자 하인리히 E. 야콥은 “빵은 인간이 발명한 것으로서 최초의 화학적 성취 가운데 하나”라고 평가했습니다. 그의 책을 따라 흥미로운 빵 이야기를 나눠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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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빵을 먹는 사람들’

고대에 빵을 발견한 이집트인들에겐 ‘빵을 먹는 사람들’이라는 별칭이 붙었습니다.

빵이 처음 만들어진 때부터 빵의 원료인 밀은 곡식의 왕이 되었고, 그 지위는 오늘까지 이어지고 있죠. 빵의 역사는 호모 사피엔스(인류)가 걸어온 발자취입니다. 때문에 정치, 사회, 종교, 기술, 과학의 역사와 깊게 연관되어 있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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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대 이집트 왕, 람세스 3세의 고분 벽화에는 제빵소 풍경이 묘사되어 있다.

2. 화폐로 이용된 빵

고대 이집트에서 빵은 화폐였습니다. 오븐은 화폐를 발행하는 중앙은행 역할을 한 셈이죠. 왕에게 제빵소는 중요한 재산목록 중 하나였습니다. 이집트 왕 고분벽화에 제빵소가 있는 것을 봐도 빵은 중요한 통치수단이었습니다.

수백 년 동안 백성들은 임금을 빵으로 받았습니다. 농민은 하루 빵 3개와 맥주 2병을 받았다고 합니다. 빵의 개수는 부의 척도였던 셈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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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대인들은 유월절에 발효하지 않은 빵, 무교병(無酵餠)을 먹었다. by Jonathunder, wekimedia(CC BY)

3. 모세의 빵

이집트를 탈출한 모세와 그 백성은 급하게 도망치느라(출애굽) 발효가 덜 된 반죽을 들고 나와야 했습니다. 모세가 동포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오늘을 기억하라, 속박의 구렁텅이, 이집트에서 탈출한 오늘을.”

그리고 매년 이날을 ‘유월절’로 선포해 7일 동안 발효시키지 않은 빵을 먹어야 한다고 일렀습니다. 발효된 빵은 히브리민족을 박해했던 이집트를 상징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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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빵의 여신, 데메테르

빵은 이집트에서 그리스로 전해집니다. 빵은 그리스를 농경사회로 전환시켰습니다.

그리스인들은 농업의 신이기도 한 ‘데메테르’를 빵의 여신으로 부르며 숭상했죠. 전쟁으로부터 농민을 보호해준다고 믿었습니다.

데메테르의 정신은 이것. “칼을 녹여 보습을 만들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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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대 로마 제빵사들의 무덤 앞 조형물

5. 로마시대, 제빵사는 공무원

서기 1세기 로마제정시대에 제빵사는 장인계급에서 식량부장관의 하급공무원이 되었습니다. 당시 제빵사들이 갖고 있던 빵 가게는 국가기관이 되었죠. 누구도 자신의 가게를 처분하고 폐업할 수 없었습니다. 제빵사는 세습되었고, 제빵소의 모든 이익은 국가로 귀속되었죠.

로마의 황제는 빵을 배급하는 ‘빵의 왕’이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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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mallbones, wikimedia

6. “빵은 내 몸이다”

예수가 활동하던 때, 대중은 예수가 세속적인 ‘빵의 신’이 되어주길 바랐습니다. ‘오병이어’처럼 빵의 기적을 지속적으로 행함으로써 굶주림에서 벗어나게 해달라고 요구했습니다.

예수는 빵의 진정한 가치는 ‘일용할 양식’이라며 빵에 대한 집착은 사람의 눈을 멀게 한다고 일갈했습니다. ‘최후의 만찬’에서 예수는 “빵은 내 몸이다”라고 말합니다. 식탁에 올려 진 빵은 유대인들이 제단에 올리는 빵, ‘쇼브레드(showbread)’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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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 제빵학교 설립자, 파르망티에(1737-1813)

7. 제빵학교의 탄생

1780년 프랑스의 파르망티에는 왕을 설득해 ‘새로운 곡물 성분으로 기근 시 식량으로 사용될 빵을 만들기 위해 제빵학교를 설립합니다. 그는 새로운 곡물, 감자로 빵을 만들어 보급하는 데 힘썼지만 흰 빵에 길들여진 대중의 입맛에는 역부족이었죠.

파르망티에의 권고대로 프랑스가 2년 정도 일찍 감자를 강제로 경작하게 했다면 프랑스는 혁명을 피할 수 있었을지도 모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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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혁명의 시발점이었던 프랑스 민중의 바스티유 감옥 습격.

8. ‘빵이 부풀어 오르고 있네’

기근이 심했고, 빵이 부족했습니다. 민중은 “감자는 가죽 같은 위장을 가진 사람들이나 먹을 수 있다”며 밀로 만든 빵만 찾았죠. ‘빵이 부풀어 오르고 있네’를 인사말로 주고받으며 분노를 삭였습니다. 급기야 왕정과 투기꾼들이 결탁해 백성을 굶어죽이려 한다는 음모론이 확산되었습니다.

1789년 7월 14일, 민중은 ‘우리에게 빵을 달라’며 바스티유 감옥을 습격합니다. 프랑스 혁명의 시작이죠. 혁명 후 부자들의 전유물이었던 흰 빵은 모든 백성의 끼니가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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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시아 모스크바에서 후퇴하는 나폴레옹

9. 빵에게 패한 나폴레옹

제국을 건설한 나폴레옹은 농업을 경시했습니다. 때문에 프랑스 식량자급률은 낮았고, 많은 식량을 점령지에서 들여왔습니다. 언제나 풍족하게 흰 빵을 백성들에게 먹일 수 있을 것으로 여겼죠. 프랑스 군인들도 야전제빵소를 통해 질 좋은 빵을 먹었습니다.

그러나 나폴레옹 군대는 1812년 러시아 원정에 나서 모스크바에 도착했지만 보급로가 끊겨 식량난으로 결국 패배했습니다. ‘빵에게 패한’ 나폴레옹은 이후 몰락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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링컨 무덤에 있는 미국 남북전쟁 기념 동상. by Dswanson1001(CC BY-SA)

10. 미국 남북전쟁, ‘빵은 승리를 불러온다’

현재의 미합중국이 탄생할 수 있었던 건 “북부가 빵을 먹을 수 있었던 반면, 남부는 면화를 먹을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북부는 밀 경작지가 많았고, 남부는 상당수가 면화 경작지였죠. 남부는 식량난에 허덕인 반면, 북부는 최상의 빵을 군인들에게 제공했습니다.

어느 할머니가 빵 덩어리를 보며 손자에게 말합니다. “저건 바로 무기란다.” 아이가 어리둥절해 “대포알 대신 저 빵을 대포에 넣는다고요?” 묻습니다. “아니, 사람의 입에 넣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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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 “마지막 한마디는 언제나 빵의 목소리”

1918년 1차 세계대전 후 당시 미국 식량청장이었던 하버트 후버는 전쟁으로 인한 유럽의 기근문제 해결을 위해 힘씁니다. 그러나 패전국 독일에 대한 구제(救濟)는 이뤄지지 않았고 독일 국민은 병들었습니다. 이는 훗날 히틀러 집권의 결과를 낳습니다. 후버는 이를 예견했지만, 승전 연합국은 이를 묵살했습니. 그가 하인리히 E. 야콥에게 전한 말.

“세계의 평화는 빵의 평화다. 모든 전쟁에서 처음 한마디는 총성이었지만 마지막 한마디는 언제나 빵의 목소리였다.”

 

글. 손인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