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찻잔 스토리텔링
사랑과 역사를 새긴 편지 이야기

꾹꾹, 마음을 전하는 손 글씨

어느 노래 가사처럼 가을에는 편지를 써야할 것 같은 기분이다. 어느새 우리는 편지에서 멀어졌다. 문자로, 메일로 톡톡 안부를 전한다. 편지가 맺어준 인연이 얼마나 많았을까. 편지 한 장의 울림이 역사를 움직이기도 했다.

중세 유럽에는 편지를 잘 쓰는 안내서가 있었다. 그전까지 교회와 국가만 쓸 수 있었던 영향력을 가졌던 편지가 중산계급까지 대중화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에라스무스가 1500년 초 파리에서 교사로 있을 때 엮은 편지 쓰기 안내서에서는 장소, 시간, 수신인에 딱 어울려야 하며 중대한 문제는 깔끔하게 사소한 문제는 세련되고 재치 있게 다루라고 가르친다. 또 쓴 소리는 간절하면서도 기개 있게, 위로는 달래면서 친절하게 해야 한다며 표현의 명확성과 적절성을 강조했다. 에라스무스의 편지 안내서는 1521년 필경사가 필사하지 않고 인쇄기로 찍어 서 나와 더 널리 퍼져나갔다. 그 즘 때를 맞춰 연애편지 쓰기 지침서도 소개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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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편지 명사들…정약용, 정조, 이황

경기도 남양주시 다산 정약용 기념관에는 다산이 강진에서 유배 중인 1810년, 그의 나이 49세 때 부인 홍 씨가 보내준 치마로 만든 <하피첩>이 전시되어 있다. 노을빛 치마로 만든 첩이라는 뜻을 가진 하피첩에 다산은 두 아들 학연과 학유에게 쓴 편지를 쓴다. 귀향 온 처지여도 자식교육을 위하는 마음이 오롯이 배어있다.

“군자가 책을 지어 세상에 전하는 것은 오직 한 사람을 알아줌을 구하여 온 세상 사람들의 성냄도 피하지 않는 것이다. 만약 나의 책을 알아주는 사람이 있다면 그들의 나이가 너희보다 많거든 아버지로 섬기고, 너희와 엇비슷하면 형제로 맺는 것도 좋을 것이다.”

또 아내에 대한 다산의 사랑도 애틋하다. “어느 때나 한방에서 우리 사랑 이뤄볼까. 슬프구나! 꿈속에나 볼 그 얼굴…. 내 생각 하고 있을 그대 떠올리며 비록 누웠지만 곧 잠에서 깨고 내 생각 하고 있을 그대 떠올리며 해 뜨는 새벽부터 해지는 저녁까지…”

정조는 어린 시절부터 한글편지 쓰기를 매우 좋아해서 40여 년 동안 지속적으로 편지를 썼다. 현재는 《정조어필한글편지첩》에 14통이 남아 있는데 외가 친척인 큰 외숙모, 여흥 민씨(혜경궁 홍씨의 큰오빠 홍낙인의 처)에게 보낸 편지들이다.

정조는 정치적 소통 수단으로 편지를 적극 활용했다. 심환지를 비롯한 어용겸, 서용보, 채제공 등 많은 대신들에게 사사로이 편지를 써서 안부를 묻거나 민정을 파악하고 여러 가지 국정을 처리했다. 특히 심환지가 성격이 철저하지 못해 비밀을 누설하는 것을 질책하곤 했는데 ‘경은 이제 늙어서 머리가 세었다, 경은 생각이 없는 늙은이’라고 비속어도 거침없이 사용했다. 권위를 내려놓고 소통하는 인간적인 면을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 편지 중 웃음소리 ‘껄껄’을 뜻하는 ‘呵呵’가 자주 나온다. 요즘 유행하는 이모티콘 ‘ㅋㅋ’을 최초로 사용했던 셈이다.

퇴계 이황도 현재 남아있는 편지가 3천통이 넘을 정도로 많은 편지를 썼다. 대부분 제자나 후학들과 학문을 토론하거나 아들, 손자 등 가족들에게 보내는 편지였다. 퇴계는 아들 준에게 항상 몸과 마음가짐을 바로 할 것을 당부하는가 하면 무슨 책을 읽느냐며 게으름을 피우고 있지 않느냐고 따끔하게 질책하기도 했다. 한편, 편두통으로 고생을 하는 며느리를 초정(봉화에 있는 온천)으로 보내 치료할 생각이라는 자상한 면을 드러내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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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겨워라, 조선시대 한글 편지

한편,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한글 편지는 군관 나신걸(1461∼1524)이 북쪽 변방에서 아내 맹 씨에게 쓴 것이다. 2012년 5월 국가기록원은 500년 전 나신걸이 쓴 편지를 초음파 봉합처리 기법을 활용해 복원했다고 발표했다. 반포된 지 50여 년밖에 지나지 않은 훈민정음이 지방의 군관이 편지를 쓸 정도로 널리 퍼졌다는 것을 말해준다.

아내가 고생할 것을 염려해서 집안의 논밭을 소작을 주고 농사를 짓지 말라는 당부와 함께 노비나 세금, 부역, 공물 등 각종 집안일을 어떻게 처리해야 할지도 소상하게 알려준다. 또 화장품 분과 바늘을 사서 보내며 집으로 가지 못하는 안타깝고 답답한 심정을 솔직하게 드러낸다.

1998년 안동 이응태의 무덤에서 아들 원이의 옷과 남편의 쾌유를 빌며 자신의 머리카락과 삼을 섞어 만든 짚신과 함께 한글 편지가 발굴되었다. 편지가 무덤에서 발견된 예는 흔치 않아서 주목을 받았는데, 짚신을 신어보지도 못하고 결국 31세 젊은 나이에 세상을 떠난 남편을 향한 그리움이 눈물겹도록 애절하다.

“당신이 늘 나에게 둘이 머리가 세도록 살다가 함께 죽자 하시더니, 그런데 어찌 나를 두고 먼저 가셨나요? 뱃속의 자식이 태어나면 누구를 아버지라 부르게 하나요?”

알베르 카뮈와 장 그르니에의 우정

레마르크 소설을 각색한 전쟁 영화 <사랑할 때와 죽을 때>의 마지막 장면이 생각난다. 삶과 죽음 사이를 오토바이로 가르며 배달부 병사가 전해 준 아내 엘리자베스의 편지를 읽으려는 순간 주인공 그래버는 자신이 풀어준 러시아 포로의 총에 쓰러진다. 죽어가면서도 강물에 떠나가는 편지를 잡으려는 그래버의 애절한 손짓은 개봉한 지 반세기가 지났지만 지금도 생생하다.

빈센트 반 고흐는 예술적 갈등과 심적 변화를 동생 테오에게 편지를 통해 고백한다.

“파리로 간 뒤로 만일 건강이 회복되면 노란빛의 책방 그림을 그리고 싶다, 그 구상을 훨씬 전부터 품고 있었고, 요즘 무척 규칙적으로 붓이 말을 잘 듣고 있다. 요양소를 출발과 생각 대체로 차분한 기분이므로 현재 상태로서는 그리 간단하게 발작되지는 않는다고 생각한다.” 동생 테오는 반 고흐의 삶에서 또 다른 자아였다.

사제지간이었던 알베르 카뮈와 장 그르니에가 주고받은 편지는 235통에 이르는데, 서로의 작품과 일상을 공유했다. 그들의 대화는 1960년 1월 4일 카뮈의 갑작스러운 죽음으로 끝났다. 카뮈가 그르니에게 보낸 마지막 편지는 1959년 12월 28일, 그르니에의 답장은 1960년 1월 1일 카뮈가 사망하기 사흘 전이었다. 그르니에는 1944년 11월에 보낸 편지에 “우리는 1930년에 처음으로 대화를 나누기 시작했는데 그 대화는 아직도 끝나지 않았다.”라고 썼다. 제자는 스승을 ‘선생님’으로, 스승은 대부분의 편지에 ‘친애하는 카뮈’로 긴 시간 동안 변함없는 존경심과 우정을 확인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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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시애틀’ 명명의 유래

한 장의 편지는 나라와 신념을 잃은 아픔을 토로하기도 한다. 런던의 일간지 <트리뷴>의 더글러스 스토리 기자는 1905년 1월 29일 고종의 측근이 한복 바짓가랑이 속에 감추어 가지고 나온 밀서를 전달받았다. “1905년 을사늑약은 황제가 조인하거나 동의한 일이 없다. 따라서 일본이 한국의 내정을 통제하는 일도 부당하다. 한국 황제는 세계열강이 한국을 집단 보호 통치하되, 기한은 5년이 넘지 않도록 바란다”라는 요지였다. 일본의 침략을 공동으로 막아주고 중립화를 보장해 달라는 외교 방침을 밝힌 내용이었다.

1854년 미국의 피어스 대통령은 인디언의 마지막 추장 시애틀로부터 한 통의 편지를 받았다. 정부의 압력에 밀려 땅을 내주며 백인 대표자들과 부족들 앞에서 간곡하게 연설한 내용이었다.

“당신들은 어떻게 하늘을, 땅의 체온을 사고팔려 합니까? 우리가 땅을 팔지 않겠다면 당신들은 총을 가지고 올 것입니다. 신선한 공기와 반짝이는 물은 사실은 우리의 소유가 아닙니다. 당신의 모든 힘과 능력과 정성을 기울여, 당신의 자녀들을 위하여 땅을 보존하고 또 신이 우리를 사랑하듯 그 땅을 사랑해 주십시오.”

이 편지를 받고 감동한 피어스 대통령은 추장의 뜻을 기리기 위해 그 지역을 시애틀로 명명했다고 한다.

레이첼 카슨 저서 《침묵의 봄》은 편지 한 장으로 20세기 가장 큰 영향을 미친 책으로 일컬어진다. 서문에 작가는 1958년, 무분별한 살충제 사용으로 뭇 생명이 사라져버린 작은 세계에 관한 아픈 경험을 담은 친구 허킨스의 편지를 읽고 그녀는 오랫동안 관심을 가져온 문제에 다시 한 번 주의를 환기하고 이 책을 써야겠다는 절실함을 느꼈다고 적는다.

한 장의 편지가 역사를 바꾸는 건 링컨의 경우도 마찬가지였다. 계속 낙선의 고배만 마시던 링컨이 노예제를 폐지한 위대한 대통령이 될 수 있었던 출발점은 수염을 길러보라는 어린 소녀의 편지였다.

유럽 예술가들의 러브레터

예술가와 위인들의 연애편지는 어땠을까. 평생 독신으로 쓸쓸히 보냈던 베토벤에게도 ‘불멸의 여인’에게 보낸 세 통의 편지가 있다. 피아노 소나타 <월광>을 헌정한 줄리에타인지, <열정>을 헌정한 프란츠 폰 부룬스윅 백작부인지, 아니면 비엔나 귀족여성인지 알 수 없지만 “그대의 사랑은 나를 가장 행복하게 하지만 또한 가장 불행하게 만든다”라고 사랑의 아픔을 담았다.

오노레 발자크는 1843년 드레스덴에서 한스카 백작부인을 만나고 돌아와서 “나의 별, 멀고도 가까운 당신, 그대 내 영혼의 지배자, 내가 죽을 때까지 당신을 위해 살 것이요”라며 격정적인 사랑을 고백했다. 낭만파를 대표하는 영국 시인, 조지 고든 바이런은 1819년 4월 만난 테레사 구이치올리 백작부인에게 “모든 언어 중에서도 아름다운 그 단어 속에 그리고 당신의 단어의 대부분인 죽도록 사랑하여 지금부터 영원까지 나의 존재를 차지한다”라고 뜨거운 연서를 보냈다.

나폴레옹이 밀라노에 있는 조세핀에게 보낸 편지는 의외로 소심하면서도 다소 격앙돼 있다. 나폴레옹은 1716년 11월 13일 베로나에서 “부인, 당신은 도대체 하루 종일 무엇을 하기에 사랑하는 사람에게 편지 쓸 여유조차 없으며 남편에게 그 변치 않는 아름다운 사랑을 질식시켜서 따돌리는 것은 어떤 종류의 애정입니까?”라며 힐책한다. 또 “빨리 네 장 정도의 편지를 써서 자신을 감성과 기쁨으로 충만 시킬 수 있는 사랑스러운 말들 을 해주길 바란다”라고 끝을 맺는다.

사이먼 가필드의 저서,《투 더 레터》는 편지는 “폭넓은 삶을 허락하며 인간 소통의 윤활유이자 생각의 자유낙하이며, 중요한 것과 부수적인 것, 우리의 멋진 날에 관한 이야기, 가장 묵직한 사랑의 기쁨과 슬픔을 조용히 전하는 전달자”라고 했다.

이 가을, 연인이나 가족 또는 친구나 동료에게 편지를 써보자. 사랑과 역사를 움직이는 반전의 주인공이 될지 누가 아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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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 오서윤
오서윤 님은 2011년 <전북도민일보> 신춘문예에 소설이, 2013년 <평화신문>과 2014년 <경남신문> 신춘문예에 시가 당선되어 등단했습니다. 현재 계간 <선(選) 수필> 편집위원으로 활동하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