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찻잔 스토리텔링
[카드스토리] 커피프렌드 ② _ 양과자

소박한 사치, 모두의 보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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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과자는 케이크류, 비스킷류, 캔디류 등을 총칭하는 서양식 과자입니다. 우리의 한과와 대비되지요. 양과자 하면 빼놓을 수 없는 게 커피와 차. 커피브레이크, 티타임에는 양과자가 곁들여지기 마련입니다.

양과자의 역사를 따라가 보면 유럽 근대혁명의 전후 과정이 함께 등장합니다. 왕, 귀족들만 향유하던 먹거리였지만 18세기 이후에는 시민들도 이를 향유할 수 있었습니다. 한 끼 식사에 비하면 사치스럽다 할지라도 누구라도 가끔은 손에 넣을 수 있는 ‘보석’이었습니다. 그 여정을 따라가 봅니다.

 

* 참고문헌 : 이케가미 슌이치. 《과자로 맛보는 와삭바삭 프랑스 역사》. 김경원 옮김. 돌베개(2015)

요시다 기쿠지로. 《양과자세계사. 이은종 옮김》. 비엔씨월드(2015)

1. 양과자의 나라, 프랑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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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89년 프랑스대혁명 시기의 프랑스 영토. by TRAJAN 117, wikimedia (CC BY-SA)

프랑스는 17~18세기 절대왕조시대에 르네상스를 구가했다.

요리와 양과자를 보검처럼 갈고 닦았다.

국가전략으로 ‘미식의 나라’라는 신화를 만들었고, 유럽 전역에 전파했다.

현대 양과자의 레시피와 이름 중 상당수가 프랑스에서 개발되었다.

2. 전쟁이 일으킨 변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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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25년 파비아 전투 그림. 프랑스는 이태리 북부 롬바르디아를 침공했으나 파비아 전투에서 완패한다.

프랑스는 1494년부터 1559년까지 나폴리, 밀라노, 베네치아 등 이탈리아 도시국가들과 전쟁을 벌였다.

전쟁은 아이러니하게 파괴와 함께 새로운 것을 탄생시킨다. 이탈리아전쟁을 계기로 프랑스는 이탈리아 르네상스의 정수를 전수 받는다. 건축, 조각, 회화, 장식 등 여러 분야에서 영향을 받았다. 양과자도 예외가 아니었다.

3. 터닝포인트, 혼인외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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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트린 드 메디시스. 앙리 2세와 결혼해 10명의 자녀를 낳았고 샤를 9세, 앙리 3세 두 아들은 훗날 왕이 되었다.

이탈리아전쟁은 60여 년 동안 이어졌지만 소강상태일 때도 있었다.

1533년, 양과자 역사의 중요한 분기점이라 할 결혼식이 거행된다. 프랑스 앙리 2세(재위 1547-1559)와 이탈리아 피렌체의 맹주, 메디치 가문의 카트린 드 메디시스가 결혼한 것. 신부의 아버지는 딸을 위해 집에서 즐겨먹던 음식을 프랑스에서도 이어갈 수 있도록 요리사도 딸려 보낸다.

4. 신부가 가져온 것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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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파스티야주(pastilage) : 분설탕, 달걀흰자에 젤라틴과 트래거캔스(tragacanth)을 섞어 만든 설탕반죽. 영어로는 검페이스트.

∙ 마카롱(macaron) : 달걀흰자, 설탕, 아몬드 가루로 만드는 과자

∙ 프랑지판(frangipane) : 우유, 설탕, 밀가루, 달걀, 버터로 만든 크림

카트린이 프랑스로 가져온 것들은 프랑스 양과자 문화를 잉태한 자양분이었다.

5. 젤라또, 포크, 패션 아이템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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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트린은 또 결혼식에서 이탈리안 아이스크림, 젤라또를 프랑스에 처음 소개했다.

젤라또는 15세기 중반 루게리(Ruggeri)라는 축산농부가 ‘크레마 프레다(Crema Fredda; 차가운 크림)’를 개발한 것에서 유래.

이밖에 그녀는 포크를 소개해 식사예절을 가르쳤고, 향수와 양산도 가져왔다.

6. 설탕전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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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탕수수

15세기 신대륙 발견 이후 세계경제는 설탕(사탕수수)이 좌우했고, 유럽 열강은 설탕산업의 지배권을 두고 다퉜다. 1763년 대서양해전에서 영국에 패한 프랑스는 캐나다를 포기하고 설탕이 나는 섬들을 선택한다. 철학자 볼테르는 이렇게 평가했다.

“비싼 유지비와 방위를 들이면서 눈 쌓인 땅을 지키기보다는 작아도 풍요로운 군도를 확보하는 편이 훨씬 낫다.”

7. 설탕 소비와 양과자의 상관관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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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과 귀족들의 사치품이었던 설탕은 공급이 늘면서 소비도 대중화되었다.

18세기 잼, 마멀레이드, 단맛 케이크가 인기를 끌었던 건 이를 반영한다.

커피에 설탕을 넣어 마시는 식습관도 설탕소비 증가에 기여했다.

설탕과 만난 양과자는 비약적으로 발전한다. 과자로 만든 공예작품도 등장했다.

8. 과자를 예술로, 피에스몽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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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설적인 프랑스 파티시에, 마리 앙투안 카렘

피에스몽테(Piece montee)는 파스티야주(설탕반죽)으로 만든 과자공예작품.

18~19세기 크게 부흥했으며 고급연회를 돋보이게 하는 장식품으로 귀한 대접을 받았다.

파티시에(제과사) 위베르 르보는 회화풍 과자공예로, 마리 앙투안 카렘은 건축풍 과자공예로 명성을 떨쳤다.

“건축과 과자를 분리해 생각할 수 없다.”_ 카렘

9. 웨딩케이크의 기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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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로강부슈

권세가들의 피에스몽테는 서민형 웨딩케이크로 이어진다.

웨딩케이크의 원형은 카렘이 개발한 ‘크로강부슈’. ‘Crushes in the mouth’라는 뜻으로 입 안에서 으스러지듯 한입에 먹기 좋다. 캐러멜을 씌운 자잘한 과자를 파이 반죽 위에 원추모양으로 쌓아올린 다음 누가(Nuga)나 드라제(꿀을 입힌 아몬드)로 장식했다.

크로강부슈는 19세기 프랑스에서 결혼식뿐 아니라 세례식의 중요한 음식이었다.

10. 프티푸르(Petit four)와 산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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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티푸르는 ‘한입에 넣기 좋은’ 과자이다. ‘프티’는 작다, ‘푸르’는 가마를 뜻하는데, 가마(오븐)에 넣어 구운 작은 과자를 말한다. 나중에는 오븐에서 굽지 않은 것까지 포함되었다.

19세기 파리는 천정이 유리로 덮인 파사주(passage ; 아케이드 거리)를 산책을 하고 카페에서 커피와 프티푸르를 먹는 사람들, 제과점에서 산 푸티프르 봉지를 든 사람들의 모습이 일상적인 풍경이었다.

11. 프루스트와 마들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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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르셀 프루스트의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에 등장하는 양과자가 마들렌. 서두 부분에 이런 내용이 있다. ‘어느 겨울날 엄마가 나에게 몸을 녹이라며 홍차 한 잔과 마들렌을 가져다준다. 마들렌을 홍차에 적셔 입술에 갖다 대는 순간, 어릴 적 추억이 떠오른다.’

마들렌은 1755년 프랑스 로렌 코메르시에서 마들렌 폴미에(Madeleine Paulmier)라는 파티시에가 개발했다. 이후 프랑스 전역으로 확산된 지역특산품으로, 한국의 호두과자인 셈이다.

 

글. <카페인> 편집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