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찻잔 스토리텔링
윤동주와 호세 리살

스물여덟과 서른다섯 살의 영혼

“호세 리살이란 사람 알아?”

“호세 리살? 그 사람이 누군데?”

차 한 모금을 마신 친구가 처음 들어보는 이름에 대해 물었다. 지난겨울에 필리핀 여행을 다녀온 친구가 선물한 필리핀 차를 드디어 개봉해 마시는 중이었다. 동남아에서 나는 음료로 베트남 커피를 맛있게 마신 적은 있었지만 동남아에서 직접 가져온 차는 이번이 처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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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은하게 퍼지는 필리핀 차 향기가 거실을 은은하게 채운다. 일요일 오후로 넘어가는 시간에 마시는 차 한 잔은 휴일의 여유만큼이나 나른한 맛이 난다. 개봉 영화를 소개하는 TV프로그램을 보던 친구가 한가로웠던 필리핀 여행 얘기를 꺼내며 말을 이어갔다.

“필리핀이란 나라는 우리보다 못사는 건 분명해. 근데 그 나라에 가서 놀란 게 있어. 필리핀 독립 영웅인 호세 리살을 추모하기 위해 도시 전체가 그 사람의 흔적을 간직하고 있는 것 같더라고. 독립의 가치와 독립 영웅을 국민 모두가 기리는 정신만은 분명히 살아있더라. 그건 우리보다 나은 거 같아.”

식민지 청년, 두 사람의 죽음

우리에게 윤동주가 있다면 필리핀에는 호세 리살이라는 사람이 있다는 게 친구의 말이었다. 식민지 청년으로 살다 조국을 위해 젊은 나이에 희생된 그들의 삶은 여전히 현재 진행형인 듯했다. 지금도 필리핀 국민들이 애송하는 <마지막 인사>라는 시는 바로 그가 쓴 필리핀 국민문학이라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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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희전문 시절의 윤동주.
by Joao Pedone, wikimedia commons (CC BY-S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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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세 리살

호세 리살은 우리에게 식민지 청년 지식인의 상징으로 읽히는 윤동주 시인만큼이나 필리핀에서는 유명한 인물이다. 어쩌면 윤동주 시인보다도 더 많은 부분에서 필리핀에 영향을 끼친 인물일 수도 있다. 동남아시아라는 지역이 아니고, 필리핀이라는 낙후된 경제 상황과 악명 높은 독재정치의 질곡을 겪지 않았다면 그는 세계적인 지식인으로, 조국의 독립을 이끈 실천적인 혁명가로 우리에게 알려져 있었을 것이다.

유럽 문명이 아니라는 이유로 우리는 너무 많은 것들을 외면해 왔다. 우리와 같이 제국주의의 희생이 된 식민지였다는 사실과 문학으로 필리핀 민중들을 일깨웠다는 점에서 호세 리살은 우리의 윤동주와 너무 많은 공통점이 있다.

윤동주(1917~1945) 시인 탄생 100주년이었던 2017년, 그를 주인공으로 한 영화가 개봉됐고, 방송에서는 삶을 재조명하는 다큐멘터리를 방영했다. 일본인들도 자발적으로 시인을 기리는 행사를 시민차원에서 진행하기도 했다. 가해자였던 일본인들이 그의 시를 읽고 그 순결한 정신과 보편적인 언어로 표현되는 시 세계를 이해함으로써 안타까웠던 그의 죽음을 애도했다.

윤동주의 시에 사용된 언어는 보편성을 가진다. 시에 어려운 말이 쓰지 않았다는 것은 한국어의 의미에만 갇히지 않고 인류의 보편성을 지향할 수 있게 한다. 한 번도 일본어로 시를 쓰지 않고 오로지 한국어로만 시를 썼다는 것만으로도 그의 시는 동시대의 다른 문학과 차별된다. 그가 생전에 가장 아끼고 즐겨 읽었다는 백석 시인과 정지용 시인의 시어가 가지고 있는 장점을 그의 시는 성공적으로 이어받고 있다.

시집에 서문 대신 썼다는 <서시>는 어떤 언어로 번역되더라도 그의 순결하면서도 명징한 삶의 방향성을 표현할 수 있다. 특히 그가 즐겨 썼다는 동시를 읽어보면 그의 시가 가지는 순수와 순진무구함을 엿볼 수 있다. 식민지 청년 지식인이었지만 자신은 너무 편하게 살아가고 있다고 느낀 시인의 부끄러움을 진솔하게 표현한 시 한 편에는 부끄러움을 고백하는 시의 내용과 달리 전혀 부끄럽지 않은 시어들이 읽는 이들을 오히려 겸손하게 한다.

창 밖에 밤비가 속살거려 / 육첩방은 남의 나라, // 시인이란 슬픈 천명인줄 알면서도 / 한 줄 시를 적어볼까, // 땀내와 사랑내 포근히 품긴 / 보내주신 학비봉투를 받아 // 대학 노트를 끼고 늙은 교수의 강의를 들으러 간다. // 생각해보면 어린 때 동무들 / 하나, 둘, 죄다 잃어버리고 // 나는 무얼 바라 / 나는 다만, 홀로 침전하는 것일까? // 인생은 살기 어렵다는데 / 시사 이렇게 쉽게 씌여지는 것은 / 부끄러운 일이다. // 육첩방은 남의 나라 / 창 밖에 밤비가 속살거리는데 // 등불을 밝혀 어둠을 조금 내몰고, / 시대처럼 올 아침을 기다리는 최후의 나 // 나는 나에게 작은 손을 내밀어 / 눈물과 위안으로 잡는 최초의 악수.

_ <쉽게 씌어진 시> 전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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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암동에 있는 윤동주 시인의 언덕

두 편의 소설과 한 편의 시

호세 프로타쇼 리살 메르카도(Jose Pritacio Rizal Mercado, 1861~1896)를 아는 한국 사람은 많지 않을 것이다. 백과사전에 있는 그의 삶을 요약하면 그는 의사이자 문학가였고 사상가였다. 부유하고 교육 수준이 높았던 가정에서 태어난 그는 두세 살이 될 무렵, 글자를 익히고 그림을 그릴 만큼 천재성을 드러내 보였다. 대학에서 의학을 전공하고, 스물한 살 때 스페인 마드리드대학으로 유학을 떠났다.

스페인 유학의 경험은 그를 사회의식에 눈뜨게 하는 계기가 되었다. 당시 필리핀은 스페인의 식민지였다. 당시의 필리핀은 제국주의로부터 독립하기 이전이었으며, 필리핀이라는 하나의 국민국가를 이루기 전의 상태였다. 필리핀 국민을 일컫는 말인 필리피노들은 자신들의 뚜렷한 정체성을 가지지 못한 채 단지 보르네오 섬과 타이완 사이에 있는 7,000여개의 섬에 흩어져 살고 있는 부족민으로서 존재했다.

그런 필리핀 민족의 정체성을 일깨우고 하나의 국민으로서 필리핀인들을 결집시킨 사람이 바로 호세 리살이다. 그가 발표한 소설 두 편은 세계 문학사에서 자민족에 가장 큰 영향을 미친 작품으로 평가받는다. 이 소설 두 편으로 호세 리살은 스페인 총독부의 눈엣가시가 되었다. 그는 1892년 필리핀 독립운동의 산실인 필리핀 연맹을 결성해 활동하는 등 실천적 지식인이었고, 이는 그의 운명을 재촉했다. 결국 스페인 총독부는 1896년 필리핀혁명의 배후 혐의를 씌워 공개 총살시켰다. 그의 나이, 서른다섯 살이었다.

리살의 소설은 지금도 필리핀 민족주의의 원천으로 읽히고 있으며 모든 학생들에게 교재로 읽히고 있다. 1887년에 발표한 소설 《나에게 손대지 말라(Noli Me Tangere)》는 필리핀을 지배하고 있던 스페인 신부들의 위선과 야만을 폭로한 작품이다. 또한 필리핀 민중을 억압하는데 앞장섰던 군인들과 관료들의 부패와 만행을 적나라하게 그려냄으로써 필리핀의 식민지 현실을 유럽에 알린 작품이다. 그는 이 작품을 통해 필리핀 민족주의에 불을 지핌으로써 300여 년에 걸쳐 진행된 스페인의 식민지를 청산하고 필리핀의 독립을 이끌어내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 인물로 평가받는다.

필리핀이 근대적인 민족 정체성을 만들어가던 상황에 쓴 이 소설은 종교와 무력에 의해 착취당하는 국민들의 아픔을 사실적으로 묘사해 유럽에서 큰 반향을 일으킨다. 16세기부터 19세기 말까지 스페인은 필리핀을 식민 지배하며 동남아시아에서 유일한 가톨릭 국가로 만들어 놓는다. 이 과정에서 스페인에서 건너온 수도회의 신부들은 침략 지배의 주도적인 역할을 한다.

'잘 있거라, 서러움 남아있는 나의 조국이여'

리살은 이 소설을 통해 아시아 최초로 민족주의 혁명을 일으킨 필리핀 독립의 아버지로 불리게 되며, 이를 계기로 필리핀은 1898년에 아시아에서 최초로 민주공화국을 세운다. 이어 1946년에 서구로부터 독립을 성취한 최초의 독립 국가를 세움으로써 동남아시아 식민지 나라들에 민족주의 운동을 통한 독립운동에 상당한 영향력을 끼치게 된다. 소설 한 편만으로 문학으로서의 효용뿐 아니라 사회사상서로서의 역할을 모두 담당한 거의 유일한 작품이다.

이런 영향력 있는 작품을 쓴 지도자를 스페인 정부는 그냥 둘 수 없었을 것이다. 한 개인으로서는 너무나 안타까운 나이에 그는 세상을 등지고 만다. 그의 이런 흔적은 필리핀 시내에 고스란히 공원과 동상으로 남아 아직도 필리핀 민족주의의 상징이자 필리핀 독립의 아버지라는 위상을 가지며 경외의 대상이 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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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닐라의 호세 리살 공원. by Jorge Láscar, flicker (CC BY)

처형되기 전날 오후에 그는 감옥에서 <마지막 인사(Mi Ultimo Adios)>라는 시를 한 편 썼다. 이 시는 지금도 필리핀 국민이라면 누구나 암송한다는 국민 시가 되었다. 우여곡절 끝에 그의 아내 조세핀에게 전달된 이 시는 조국에 대한 무한한 사랑과 열정을 담고 있다. 우리에게는 시인이며 스페인 문학을 전공한 민용태 교수가 한국어로 번역한 것이 알려져 있다. 한국대사관은 필리핀공화국 독립 100주년을 기념해 1998년 산티아고에 있는 리살 기념관에 이 시를 동판으로 제작해 헌정한 바 있다. 비장하면서도 확신에 차 있는 시의 일부를 소개한다. 리살이 죽은 후 2년, 1898년에 2차 필리핀혁명이 일어났다.

잘 있거라 / 내 사랑하는 조국이여 / 태양이 감싸주는 동방의 진주여 / 잃어버린 에덴이여 / 나의 슬프고 눈물진 이 생명을 / 너를 위해 바치리니 / 이제 내 생명이 더 밝아지고 새로워지리니 / 나의 생명 마지막 순간까지 / 너 위해 즐겁게 바치리 // 형제들이여, 그대는 한 올의 괴로움도 / 망설임도 없이 자유를 위한 투쟁에서 / 아낌없이 생명을 바쳤구나 / 월계수 백화꽃 덮인 전나무관이거나 / 교수대이거나 / 황량한 들판인들 / 조국과 고향을 위해 생명을 던졌다면 / 그게 무슨 상관이랴 // … 중략 … // 내 영원히 사랑하고 그리운 나라 / 필리핀이여 / 나의 마지막 작별의 말을 들어다오 / 그대들 모두 두고 나 이제 형장으로 가노라 / 내 부모, 사랑하던 이들이여 / 저기 노예도 수탈도 억압도 / 사형과 처형도 없는 곳 / 누구도 나의 믿음과 사랑을 사멸할 수 없는 곳 / 하늘나라로 나는 가노라 // 잘 있거라, 서러움 남아있는 / 나의 조국이여 / 사랑하는 여인이여 / 어릴 적 친구들이여 / 이 괴로운 삶에서 벗어나는 안식에 / 감사하노라, 잘 있거라 / 내게 다정했던 나그네여 / 즐거움 함께 했던 친구들이여 / 잘 있거라 내 사랑하는 아들이여 / 아 죽음은 곧 안식이니…

글 | 오형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