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찻잔 스토리텔링
호반의 도시에 흐르는 에티오피아의 정

커피 한 잔과 함께하는 ‘강뉴부대’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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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전쟁 당시 강뉴부대원 @wikimedia

춘천에 갈 기회가 생긴다면 ‘이티오피아 집’이란 유서 깊은 커피숍을 방문해보길 권하고 싶다. 70년 전 한반도에서 동족상잔의 전쟁이 발생하자 자유민주주의를 수호하기 위해 만리타국에서 한걸음에 달려왔던 에티오피아 군인들은 ‘무패전승’의 신화와 한국인의 가슴에 깊이 새긴 정(情)을 남기고 돌아갔다. 커피 한 잔을 벗 삼아 에티오피아에 대한 감사의 마음을 되새겨보자.

70여 년 전 한국전쟁 당시 치열한 격전지 중의 하나였던 춘천은 어느덧 수도권 당일 여행자들이 즐겨 찾는 문화관광콘텐츠 도시로 사랑받고 있다. 새벽마다 도시 전체를 집어삼킬 듯 자욱하게 피어나는 물안개와 호반을 따라 길게 늘어선 개성 넘치는 카페와 음식점들, 강촌이나 남이섬 같은 위락지에 더해 국제마임페스티벌, 김유정문학촌 등의 배후 관광콘텐츠까지 고루 갖춰진 덕에 지난해에도 춘천은 약 688만 명의 외지인들이 다녀갔다.

도심을 벗어났다는 해방감에 웃음이 떠나지 않는 가족단위 방문객들, 새롭게 단장한 경춘선 철로와 서울-춘천간 고속도로를 신나게 달려온 여행자들에게 70년 전 이 땅에서 벌어졌던 동족상잔의 비극을 기억해달라고 하는 건 무리한 부탁일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정말로 춘천을 사랑하는 사람이라면 금방 알게 된다. 누군가의 희생을 딛고 지켜낸 자유와 평화가 얼마나 소중하고 값진 것인지를. 그리고 나면 참전기념비, 공적비 등 도시 곳곳에 숨어 있는 전쟁의 상흔을 눈 부비며 다시 돌아보게 된다.

춘천은 전략상 중요한 군사요충지였다. 1950년 9월 15일, 인천상륙작전에 성공한 유엔군이 한반도 허리를 동으로 가로질러 후방 보급로를 끊어버리자 북한군 지휘부는 예하 부대에 ‘현행 편제를 유지한 채 춘천분지로 집결하라’는 긴급 명령만 남기고 황급히 후퇴했다. 낙동강 전선에서 몸만 빠져나온 북한군 패잔병들과 이들을 추격해온 유엔군 사이에 치열한 교전이 춘천 일대에서 벌어졌다.

253회 전투에서 이룩한 전승 신화

‘호반의 도시’ 춘천이 이렇듯 아름다운 모습으로 남게 된 데는 멀리 아프리카에서 14,500km를 달려와 참전한 에티오피아 병사들의 희생을 간과해선 안 된다. 한반도에 동족상잔의 비극이 발생한 지 이틀 만에 전격적으로 유엔군 파견이 결의됐을 때 전투 병력을 지원하기로 약속한 게 당시 우리와 수교 관계조차 없던 에티오피아였다. 에티오피아는 선뜻 지상군 1개 대대 규모의 전투병력 파병을 약속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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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티오피아 하일레 셀라시에 황제 @wikimedia

이 약속이 차질 없이 지켜진 건 하일레 셀라시에(1892-1975) 황제의 결단 덕분이었다. 1935년 파시즘 치하 이탈리아의 침공으로 27만 명의 자국민을 잃었던 그는 주변국으로의 외면으로 스위스 망명을 끝내고 돌아온 뒤 “침략군에 부당하게 공격받는 나라가 있다면 다른 나라들이 도와줘야 한다”는 말로 국제사회에 파병의 당위성을 역설했다. 그의 호소에 힘입어 미국, 영국 등 16개국이 전투 병력을 파병했고, 의료시설 지원 약속한 나라가 5개국, 물자와 재정 지원에 동참한 나라가 38개국에 이르렀다.
 

에티오피아 제국의 마지막 황제로 최초의 성문헌법을 제정하고 노예제도를 폐지하는 일에 앞장섰던 황제는 말만 앞세우는 인물이 아니었다. 최강의 전투력을 자랑하던 황제 직속의 근위대에게 ‘강뉴(초전박살)’란 부대명을 하사하며 그는 “비겁하게 살아서 돌아올 생각 하지 마라. 자유민주주의를 지키는 데 목숨을 바쳐라”는 말로 병사들을 독려했다.

3주간의 항해를 거쳐 1951년 5월 7일 부산항에 도착한 강뉴부대는 미 제7사단 32연대에 편입되어 미군이 제공한 최신 장비로 재무장을 한 뒤 전투에 투입되었다. 황제의 각별한 당부 때문인지 에티오피아 병사들은 전투의 최선봉에 나서 싸우기를 두려워하지 않았다. 1953년 7월 27일 휴전협정이 맺어질 때까지 화천, 철원, 양구, 가평 일대에서 벌어진 크고 작은 전투의 승리마다 강뉴부대의 맹활약이 뒷받침됐다.

역사는 그들의 믿기 힘든 전과를 ‘백전백승’이라고 기록한다. 삼각고지, 악어고지, 사태리고지 전투 등 총 253회의 전투에 참가했던 강뉴부대는 단 한 번도 전투에서 패한 적이 없었다. 전황이 불리해지면 강뉴부대는 으레 장교와 하사관들이 직접 나서 적진을 돌파했고, 전투 중 아군 포로가 발생할 경우엔 끝까지 쫓아가 구해올 만큼 용감했다. 한국전쟁 기간 중 전사자 121명, 부상자 657명이 발생했지만 에티오피아 군인 가운데 북한군에 포로로 잡힌 군인은 단 한 명도 없었다.

강뉴부대의 존재는 북한군에게 공포 그 자체였다. 미군 7사단장 아서 트루도마저 “북한군이 가장 두려워하는 게 에티오피아군이다. 유엔군 중에 이들보다 더 북한군에게 심리적 공포를 심어준 적이 없었다”며 혀를 내둘렀다. 1965년 완전 철군할 때까지 에티오피아군은 총 5차에 걸쳐 6,037명이 한국에 파병됐고, 그들의 희생 덕분에 자유 대한민국의 회복 속도를 한층 더 앞당길 수 있었다. 전쟁 말기에 이들은 월급을 갹출해 한국의 전쟁고아를 위한 자선기관을 세우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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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티오피아 참전기념비

1968년 문을 연 원두커피전문점 ‘이디오피아 집’

춘천에 가면 근화동 371-3번지에 있는 ‘이디오피아 집(벳; Bet)’을 들러보는 것도 나름 의미가 있는 일이다. 도로명 주소조차 ‘이디오피아길 7번지’인 이곳에선 국내 최초의 원두커피숍으로 알려진 아담한 커피전문점 하나가 연중무휴 방문객을 맞는다.

이곳은 1968년 하일레 셀라시에 황제가 ‘에티오피아군 참전기념비 제막식’ 참석을 위해 방한했을 때 머물던 자리에 새 건물을 지어 개관한 일반 상업시설이다. 개관 당시 우리나라는 커피원두를 사치품으로 지정해 사사로운 수입을 금지하고 있었지만, 황제의 배려로 외교행낭에 담아온 황실전용 원두를 볶아 에티오피아 원두의 진한 맛을 일반에 공개할 수 있게 되었다. 커피종주국 에티오피아산 원두에 대한 소비자들의 평은 지금도 호평 일색이다. 1991년 크리스마스이브에는 손님들이 하도 몰려 하루 동안 1,260잔의 커피가 팔렸다는 전설 같은 이야기도 전해지고 있다.

에티오피아로 돌아간 황제는 1974년 일어난 군부 쿠데타로 폐위된 뒤 암살로 추정되는 죽음을 맞고 말았다. 공산주의 정책을 표방한 새 정부 하에서 간신히 살아남은 강뉴부대원들의 삶도 순탄치는 않았다. 공산정권에 의해 하루아침에 ‘정권의 반역자’로 몰린 이들은 군인연금을 몰수당하고, 취업제한 등의 불이익과 사회적 핍박을 피할 수 없었다. 그럼에도 이제 호호백발의 할아버지가 된 강뉴부대원들은 여전히 한국을 ‘제2의 고향’이라 부르며 우연히 마주친 한국인 여행객들에게 마음 깊은 애정을 드러내곤 한다.

이제 우리나라의 성인 1인당 커피소비량은 연간 353잔으로 세계 평균 소비량 132잔의 2.7배에 이를 정도가 되었다. 전쟁의 폐허 속에 신음하던 한국인들에게 자신들이 즐기던 원두커피 맛을 알려주기 위해 커피숍을 세우고, 외교행낭에 생두를 담아 보내던 에티오피아인의 배려가 없었다면 우리의 커피문화가 지금처럼 풍성해질 수 있었을까?

고마운 일은 오래 기억되어야 한다. 강뉴부대원들이 세운 보화고아원 운영을 맡은 한국인 원장은 고국으로 철수하는 그들에게 다음과 같은 편지로 감사의 마음을 전했다. “처절했던 전쟁 중에 부모를 잃은 보화고아원생 일동은 강뉴 용사들이 우리에게 베푼 큰 은덕을 마음 속 깊이, 영원히 기억할 것입니다.”

 

글 | 편집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