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커피 볶는 마을
[커피 에피소드] ‘명동백작’ 이봉구와 친구들

‘낭만 다방’ 100년사 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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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커피 에피소드] ‘명동백작’ 이봉구와 친구들.

다방에 얽힌 예술가들의 이야기를 이어갑니다. 일제강점기 때부터 이어진 예술가들의 ‘다방 애호벽’은 6.25 한국전쟁을 거친 뒤에도 변하지 않았습니다. 골육상잔의 전쟁통에 그나마 남아 있던 산업시설마저 모두 파괴되고 경제적 기반이 전무했던 그 시절, 당장 먹고 사는 일은 예술인들도 예외가 아니었습니다. 모두들 각 분야에서 힘겨운 삶의 투쟁을 이어가야 했죠.  

하지만 예술인들에게는 밥으로는 해결할 수 없는 근원적인 ‘영혼의 갈증’이 남아 있었습니다. 그래서인지 휴전협정이 조인된 1953년부터 1960년대 중반까지 가난한 이 땅의 예술인들은 오히려 전보다 더 빈번하게 다방을 제 집 드나들 듯 하며 작품을 논하고, 현실을 비판하며, 사위어가는 예술혼을 달랬습니다. 다방은 여전히 문인, 화가, 연극인, 영화인 같은 예술가들과 교수, 기자들 같은 지식인들이 가장 편하게 이용할 수 있는 문화의 사랑방이었습니다. 서울 명동은 그 중에서도 가장 대표적인 다방 거리였죠. 당시 명동의 분위기를 짐작할 수 있는 글이 하나 있습니다.

“내가 명동에 첫발을 들여놓은 것은 1947년 경. 해방 직전, 일본에서 나와 서울에 올라온 것이 스물댓 살의 풋내기였을 때인데, 그 당시 예술가들이 많이 모이던 소공동, 명동, 충무로에 나도 드나들게 됐던 것이다. 그때는 서울이 좁기도 하였지만 문인, 화가, 음악인들의 수가 적었던 까닭에 우리는 곧 한 덩어리가 되어 꼭 벌떼처럼 이리저리 몰려다녔다. 모두가 가난하고 그렇다고 타오르는 정열을 집안에서 혼자 삭이기에는 모두가 너무 젊었을 때였다. 흘러나오는 음악 속에 닥치는 대로 문학, 미술, 음악 등을 토해내곤 하였다. 명동이야말로 우리 문화의 산실이 아닐까? 물론 그때는 나도 젊었고 주변 사람들 모두가 젊었고, 그리고 나라도, 우리 문화도 모두 젊었을 때였다. 해방 이후 괜스레 커다란 꿈속에서 허공을 허우적거려 보려는 턱없는 욕심도, 6.25전쟁의 쓰리고 비참한 자포자기도 한물 가시고, 이제는 그것들이 밑거름이 되어 어느만큼 현실감을 가진 우리 문화가 형성되었을 때였다.”  

이십년 간 명동 뒷골목을 지킨 터줏대감 

이 회고담은 ‘명동백작’이란 별명으로 더 유명했던 소설가 이봉구의 수필집 서문에 있는 글입니다. 이 책은 소설가이자 신문기자였던 이봉구의 시선으로 50~60년대 명동을 중심으로 활동했던 문인과 예술가들의 낭만, 자유와 예술에 대한 기록입니다. 책 속에는 소박한 문화 예술의 꽃을 피웠던 명동거리의 다방과 술집, 극장, 출판사, 방송국 등의 추억의 장소, 많은 일화를 남긴 예술가들의 이야기가 담겨 있습니다. 2004년 EBS방송에서 <명동백작>이라는 드라마로 방영되어 호평을 받았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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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년 EBS방송에서 방영된 문화사 시리즈 드라마 <명동백작>

이봉구는 이십년 간 하루도 빠짐없이 명동 뒷골목을 방황하던 명동의 보헤미안이었습니다. 그에게 ‘명동백작’이란 멋스런 별명이 붙은 것은 그가 단지 긴 세월 동안 명동의 터줏대감이었기 때문만은 아니었습니다. 그에게 ‘백작’이란 칭호가 주어진 건 술자리에서 절대 흐트러진 모습을 보이지 않는 고상한 성품과 절제력 덕분이었죠. 그는 한 자리에서 절대 석 잔 이상의 술을 마시지 않는 것으로도 유명했습니다. 더욱이 그는 술을 마실 때 ‘정치 이야기, 다른 사람에 대한 험담, 돈 빌리는 행동’ 등 3가지 금기행위를 절대 하지 않는 이였습니다. 

그래서인지 이봉구 곁에는 언제나 명동의 젊은 예술가들이 몰려들었습니다. 50년대 중반 명동에는 전쟁 전부터 이봉구가 즐겨 드나들던 다방 ‘모나리자’를 비롯해 그보다 나중에 생긴 ‘동방싸롱’, 공초 오상순이 아지트처럼 이용했던 ‘청동다방’, 음악다방으로 명성을 떨친 ‘돌체’, 문인들의 사랑방 노릇을 하던 ‘봉선화’, ‘갈채다방’, ‘포엠’ 등이 있었습니다. 이들은 시간만 나면 함께 어울려 다니며 커피를 마시고, 어둠이 내리면 허름한 명동 뒷골목 주점에 앉아 술과 담배를 탐닉했습니다.  

세상에 대한 불만과 허무, 지식인의 고독을 쏟아 내기에 명동만큼 어울리는 장소도 찾기 힘들었습니다. 오늘날의 시각으로 보자면 목적이나 희망도 없이 술독에 빠져 날을 지새우는 퇴폐적인 모습으로 보이겠지만 당시 예술가들에겐 자신의 불안과 절망을 털어놓을 해방구가 필요했습니다. 

해가 지고 나면 신문사에서 퇴근한 이봉구는 어김없이 명동 뒷골목으로 들어섭니다. 그러면 어느 샌가 함께 어울려 다니던 김수영(시인), 박인환(시인), 오상순(시인), 변영로(시인), 전혜린(소설가) 등의 술친구들이 슬그머니 모습을 드러내는 것이었죠. 누가 말하지 않아도 그들의 목적지는 근처의 다방이나 술집이었습니다 동아일보 기자였던 시인 이근배는 훗날 당시의 명동 모습을 이렇게 술회하고 있습니다. 

“오후가 되면 무엇에라도 씐 듯 명동을 향해 걸음을 재촉하던 시인, 소설가, 화가, 음악가, 연극인들…. 명동에서는 베레모를 쓰거나 파이프를 문 예술가들과 부딪치는 일이 예사로웠고, 아무 다방이나 술집에 들어가도 으레 한두 사람쯤은 아는 얼굴과 만나지던 명동이었다. 버스값만 가지고 나가도 술이 취해서 돌아올 수 있는 곳이었기에 명동은 한겨울도 춥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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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난한 보헤미안들의 해방구

이중섭(화가), 김관식(시인), 이현우(시인), 천상병(시인), 김동리(소설가), 김광균(시인), 오장환(소설가), 천경자(화가) 역시 이봉우가 늘 명동에서 마주치던 얼굴들이었습니다. 가난했지만 인정이 남아 있었고, 고통스러웠지만 희망을 잃지 않았던 시대였기에 명동은 그런대로 낭만이 살아있는 곳이었습니다. 기어이 한국화단의 주역으로 우뚝 서게 되는 천경자는 노년에 들어 명동에 기대어 살았던 때를 이렇게 회상했습니다.  

“내가 퍽 젊었던 시절, 나는 가난했던 나날을 집에서 튀어나와 명동 ‘동방살롱’이라는 다방에서 살다시피 했었다. 늙으나 젊으나 거의가 나와 비슷한 처지의 화가 문인들이 많이 모여 동방살롱을 누가 ‘만추의 창경원’이라고 불렀었다. 차 한 잔을 시켜놓고 종일 살롱에 앉아 있으면 노상 탱고가 흘러나왔다. 시루떡처럼 푸짐한 중년마담이 쉴 새 없이 탱고를 틀어주었다. 그런 분위기에 도취되어 있다가 작은 사업이라도 해 돈 있고, 예술가를 좋아하는 ‘봉’이 나타나 아는 사람을 찾아와 잠깐 나가자고 귀띔하면 몇 사람씩 우르르 따라나서 그 자리가 비는 것이었다. 나도 이봉구나 김광주 씨를 만나러온 모르는 사업가가 베푼 술을 얻어먹기 일쑤였다.”  

가난한 예술가들이 즐겨 모이다 보니 명동에는 재미있는 에피소드도 많았습니다. 박인환이 그의 대표시를 지은 것도 명동의 한 술집에서였습니다. 끼니조차 부족한 부산 피난시절에도 미제 군용담요를 얻어다 밤새 재단하고 오려붙여 트렌치코트를 만들어 입었다던 그는 당시에도 여학생들의 사랑을 한 몸에 받던 명동의 귀공자이자 멋쟁이로 유명했죠. 박인환이 어느 날 ‘경상도집’이란 목로주점에서 술을 마시던 중 시를 지어 읊조리자 동석했던 극작가 이진섭이 즉석에서 곡을 붙이고, 옆에 있던 가수 나애심이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만든 곡이 바로 <세월이 가면>이란 노래입니다.  

지금 그 사람 이름은 잊었지만
그 눈동자 입술은 내 가슴에 있네
바람이 불고 비가 올 때도
나는 저 유리창 밖
가로등 그늘의 밤을 잊지 못하지
사랑은 가고 옛날은 남는 것
여름날의 호숫가, 가을의 공원
그 벤치 위에 나뭇잎은 떨어지고
나뭇잎은 흙이 되고 나뭇잎에 덮여서
우리들 사랑이 사라진다 해도
지금 그 사람 이름은 잊었지만
그 눈동자 입술은
내 서늘한 가슴에 있네
 

이처럼 명동은 가난하지만 낭만과 멋을 알던 보헤미안들의 해방구였습니다. 해방의 설렘과 한국전쟁의 상처, 진흙탕처럼 질척거리던 사회 분위기…. 모든 것이 부족하던 그 시절이지만 명동이 있었기에 우리는 더 이상 외롭지 않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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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 편집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