웹진 카페人  
지상의 쉼표
[수리수리 정가이버] 그때는 보이지 않았던 것들

수학의 재미

대학생 시절 군복무를 마치고 복학했을 때 동기생이었던 여자 친구는 이미 졸업해서 기간제교사로 근무하며 선생님의 길을 가고 있었다. 그 전에는 교사가 되고 싶다는 생각을 한 적이 없었는데 학생들과 즐겁게 학교생활을 하는 친구의 모습을 보며 보람 있는 직업이라 생각했다.
그 시절 전자공학과는 공대에서 인기 많은 학과 중 하나였지만 본래 꿈꾸었던 분야가 아니라 4년 내내 흥미를 갖지 못했고 졸업 후에 딱히 하고 싶은 것도 없었다. 고등학생 시절 내내 나의 꿈은 우주를 나는 로켓을 만드는 과학자가 되는 것이었다. 하지만 공대생이 뒤늦게 교사가 될 수 있는 방법을 찾을 수 없었고 결국 남들처럼 기업 연구소에 취직했다. 

그럭저럭 몇 년 동안 회사 생활을 이어 갔지만 꽉 짜인 직장생활이 답답하게 느껴졌고 늘 시간에 쫓겨 상사의 눈치를 살피며 밤늦게까지 일하는 문화가 싫었다. 그러던 중 프리랜서 생활을 하고 있던 친구를 모델 삼아 다니던 회사를 그만 두고 지금까지 프리랜서로 일하고 있다. 약속한 기한 내에 결과물만 내놓으면 간섭받지 않고 일 할 수 있어서 좋았다.  

하지만 조직을 벗어나 혼자 일하는 것이 쉽지는 않았다. 전자제품을 개발하는데 필요한 여러 가지 일들 중에서 회사라면 다른 부서에서 담당하는 일까지 해야 했다. 어렵게 개발을 끝낸 제품을 포장하는 것도 번거롭지만 중요한 문제였고 처음 시작할 때는 회사이름을 짓는 것도 참 어려운 일이었다. 프리랜서라 하더라도 세금계산서를 발행하기 위해서는 세무서에서 사업자등록을 할 때 상호를 적어야 한다. 그래서 손수 지은 이름이 ‘가인기술’이었다. 아름다울 가(佳), 집 가(家), 노래 가(歌) 그리고 사람 인(人). 집에서 노래하며 일하는 사람, 가수 김민기의 노래 제목인 ‘아름다운 사람’의 뜻을 가진 이름이다. 

30년 만의 수학공부

GettyImages-946958694.jpg


그러다가 몇 년 전 선배가 운영하는 수학 학원에서 초등학교 6학년 아이들에게 수학을 가르치는 일을 할 기회가 생겼다. 비록 사교육이지만 뒤늦게 선생님이 된 것이다. 초등학생이라도 가르치기 위해서는 다시 수학책을 펴고 공부를 해야 했는데 곧 중학교 입학을 앞둔 학생들이었기에 중학교 과정도 다시 봐야 했다. 대학생 시절 과외 아르바이트는 해 보았지만 거의 30년 가까이 하지 않던 수학 공부였다. 가르치는 일을 하게 된 것이 기뻤지만 피타고라스의 정리, 근의 공식 같이 머리 아픈 것들을 다시 공부해야 한다는 생각에 걱정이 앞섰다. 

그런데 웬걸. 수학이 너무 재미있다. 신기하게도 학생시절에는 보이지 않던 것들이 환히 보였다. 따로따로 별개의 것들로 보이던 것들이 서로 연관되어 있는 것이 보이고 숨은 의미들이 드러나 보였다. 아마도 혼자 시스템 전체를 기획하고 개발하면서 논리적인 사고를 해왔던 것이 도움이 된 것 같다. 하나의 시스템을 이루기 위해서는 각 부분마다 고유한 역할이 있지만 전체를 이루기 위한 보완과 협력의 관계가 밑바탕에 깔려 있다. 

특히 한동안 유행하던 단어인 ‘코딩(coding)’이라고 하는 프로그램 작성은 ‘부울 대수(Boolean Algebra)’라고 하는 수학적 방법을 사용한다. 전자공학과에 입학해서 처음 배우는 필수 과목 중 하나다. 특히 그런 코딩을 하며 논리적인 사고력이 커졌던 모양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이론으로만 배웠던 전자공학을 적용하여 실제 전자회로를 꾸미고 실험하는 과정에서 이론이라는 것이 강의실에서 만들어진 관념의 산물이 아니라 실제로 벌어지는 물리 현상에 대한 관찰과 실험, 그리고 깊은 사유를 통해서 만들어진 결과물이라는 사실을 경험했다. 

‘상상해서 만들어진 수’의 쓸모

마찬가지로 수학 역시 자기만의 독자적인 영역이 있겠지만 애초에 과학이나 철학과 함께 탄생하고 성장해온 것이다. 수학 공부를 할 때면 도대체 누가 이런 쓸모없는 것들을 만들어 내서 우리를 괴롭게 만드는가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하는데, 반대로 수학은 어려운 것을 쉽게 풀 수 있는 방법을 가르쳐 준다. 덧셈보다 곱셈이 어렵지만 곱셈은 덧셈을 쉽고 빠르게 하기 위해서 만들어진 방법이다. 2를 5번 더하는 것보다 ‘2 곱하기 5’를 하는 것이 훨씬 빠르고 편리하다. 

듣기만 해도 머리 아픈 미분과 적분, 심지어는 이름부터가 ‘상상해서 만들어진 수’라는 의미의 허수(imaginary number : 제곱해서 -1이 되는 수)도 전자공학에서 얼마나 유용하게 쓰이는지 모른다. 스마트폰이 무선으로 통신할 수 있게 해주는 전파도 모두 허수를 이용한 이론을 통해서 만들어 낸다.  

과학적 사고라고 하는 것의 바탕에는 수학적인 사고가 깔려있고, 수학적 사고는 곧 논리적 사고라고 할 수 있다. 과학은 자연을 관찰하며 발전하기 때문에 때로는 알고 있던 지식이나 이론이 새로운 현상을 관찰하면서 바뀔 수 있는 불완전함을 갖지만 수학은 인간이 가진 어떤 학문보다 완전한 논리구조를 가지고 있다. 그래서 공학처럼 수학을 직접 사용하지 않더라도 논리적인 사고의 훈련을 하기에 수학만한 것이 없다.  
 

플라톤 아카데미아.jpg


‘기하학을 모르는 자는 이 문을 들어서지 말라.’ 고대 그리스 플라톤이 ‘아카데미아’ 입구에 붙였던 글귀라고 한다. 철학을 공부하려면 수학부터 공부하고 오라는 말이다. 그런데 내 경우는 거꾸로 코딩(실무)을 하면서 사고력을 키웠고, 그래서 다시 보는 수학책이 다르게 보인 것 같다. 

아이들과 함께 한 행복한 공부

하지만 선배가 운영하는 수학학원에서는 사정이 생겨서 반년 만에 그만 두게 되었다. 그런데 학생들 중에 한 아이가 정이 들었는지 헤어지는 것이 아쉬워 울기까지 했다는 소식을 들었다. 동급생들 중에서 수학을 가장 못하던 학생이었는데 나와 함께 공부하며 수학에 재미를 붙여서 제일 좋아하고 재미있는 과목으로 수학을 꼽게 된 아이였다.  

얼마 지나지 않아 그 아이의 엄마에게서 연락이 왔고 역시 ‘수포자(수학 포기자)’가 되기 직전의 친구와 함께 과외를 받고 싶다고 했다. 그렇게 인연이 되어 두 학생은 이제 중학교 3학년이 되었고 지금까지 화상회의를 통해 일주일에 두 번씩 함께 수학 공부를 하고 있다. 이젠 두 학생 모두 제법 수학의 기초가 잡혔다.
그리고 아이들을 가르치며 가끔은 동기를 부여하기 위해서 이런 저런 이야기들을 하게 되는데 덕분에 내 삶도 돌아보게 된다. ‘다른 사람과 비교하지 말고 어제의 나와 비교해라’와 같은 말들과 함께….

선생님과 헤어지는 것이 아쉬워 울던 꼬맹이가 이젠 나만큼 키가 크고 목소리도 굵어졌다. 고등학교 진학을 앞두고 입시제도가 원하는 것을 피할 수는 없지만 가능한 대로 수학의 진정한 의미와 재미를 느낄 수 있도록 노력했다. 비록 과외 선생님이지만 아이들과 함께 수학을 공부할 수 있어 행복하고 감사하다.

글. 정한섭
1994년부터 통신과 방송 관련 장비를 개발하는 전자 엔지니어로 일하고 있습니다. 재택근무를 하며 아빠로서 두 아이의 육아를 담당하기도 했습니다. 요즘은 아이들에게 수학과 코딩을 가르치는 일을 겸하고 있습니다. bearfeet@naver.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