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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상의 쉼표
[인간극장] 굴러온 돌과 박힌 돌

‘마을 복덩이’ 기옥씨의 생기발랄 귀농기

‘언제 이렇게 많은 사람이 농촌으로 내려왔나?’ 요즘 전국팔도 취재를 다니며 나도 몰래 입에서 튀어나오는 말이다. 많은 사람들이 귀농·귀촌을 한다는 지리산 아래 동네는 말할 것도 없고 특별할 것도 없이 평범하기 그지없는 산촌 마을에서도 쉽게 귀농·귀촌인들을 만날 수 있다.  

내려온 사연도 참으로 다양하다. 정년퇴직 후에 차 농사를 지으려다 어찌어찌 인연이 닿아 뿌리를 내린 사람도 있고, 섬진강 벚꽃 놀이를 왔다가 그 풍경에 반해 한의사 남편 설득해 새 인생을 사는 사람도 있다. 어디 그뿐인가? 병에 걸려 혹은 전 재산 탕진하고 혼자 산에서 사는 ‘자연인들은 또 얼마나 많은가? 모 방송국에 그들을 주인공으로 하는 프로그램은 만들어진 후 지금까지 줄기차게 큰 인기를 얻고 있다. 그런 것만 보더라도 현대인들 마음속에 그런 삶이 얼마나 큰 욕망으로 자라고 있는지 가늠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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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로 KBS <한국인의 밥상>을 맡으며, 나는 무언가 새로운 것을 해보고 싶었다. 단순히 시골마을에 숨겨져 있는 옛 조리법이나 맛만이 아니라, 농촌에 불고 있는 새로운 변화를 포착하고 싶었다. 그래서 들밥 취재를 할 때도, 새참으로 짜장면을 배달해 먹는 모습도 담았고 외국인들이 멸치젓으로 파스타를 해 먹는 것도 찍었다. 그리고 아예 변화를 보여주고자 귀농·귀촌인들의 달라진 밥상을 소재로 잡았다.
이미 10여 년 전, <인간극장>에서도 ‘이보다 좋을 수 없다’란 제목으로 젊은 귀농부부를 방송해 인간극장 사상 최고의 시청률을 올리기도 했다. 방송 아이템을 선택할 때, 시대적인 욕망을 파악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한 터, 귀농·귀촌 밥상은 아이템으로도 손색이 없을 거라 생각했다.  

뾰족 구두 신고 온 여인

새벽 5시 출발해 도착한 곳은 전라남도 순천 골짜기였다. 그 유명한 송광사가 있는 송광산 골짝에 있는 산골 마을, 어떻게 귀농을 하려고 이곳까지 왔을까 하는 생각이 드는 곳이었다.

몇 년 전까지 만해도 인근에서 가장 먼저 없어질 마을로 지목되었던 마을이란다. 변변한 대중교통도 없어서 교통약자인 시골 노인들을 위해 운행하는 100원 택시로 갈 수 있는 곳이었다. 그렇게 산골짜기를 돌아 돌아 만난 덕동마을. 몇 해 전쯤 마을 꾸미기 행사가 있었는지 마을 담벼락마다 벽화그림이 그려져 있었다.  

마을 한 가운데에는 농가 맛집이란 간판이 붙은 식당도 있는데, 이곳은 마을 공동사업으로 운영하는 식당으로 마을 어르신들이 밥을 짓는다. 식당은 단체 손님을 받고도 남을 만큼 크고 번듯했지만, 예약이 없는 날은 휑하다 못에 쓸쓸해 보였다. 나는 그곳에서 올해로 귀농 14년을 맞는 주인공 안기옥씨를 만났다.  

귀농자라고 누구 얼굴에 써 놓은 건 아니지만, 도시에 살던 풍이 있어서 그런지 귀농자들 대부분은 어딘가 모르게 토종 농부와 달라 보이는 경우가 많은데, 기옥씨는 그렇지 않았다. 더도 덜도 아닌 그냥 촌부였다. 그런데 마을 어르신들의 이야길 들으니, 14년 전 그녀는 전혀 달랐다고 한다.  

귀농을 하겠다고 산골마을에 찾아온 기옥씨, 그녀는 7센티미터는 족히 넘는 하이힐 구두를 신고 있었다. 마을 어르신들은 혀를 끌끌 차며 분명히 금세 도망갈 것이라 장담을 했단다. 그 꼴이 영 마땅치 않았던 한 어르신은 대 놓고 오지 말라고도 했다.  

그렇지만 그녀의 행보는 조금 달랐다. 광양시 시청 공무원이었던 남편을 두고 기옥씨가 먼저 이 마을로 이사를 왔다. 귀농을 하기 전 정말 농촌에 살 수 있을지 시험을 해보자는 심산이었다. 그렇게 2년을 보낸 후, 살 수 있겠단 판단이 든 후에 남편이 직장을 그만두고 뿌리를 내렸다.  

그런데 이 선택이 ‘신의 한 수’였다. 어린 아들 하나 데리고 마을로 들어온 도시 여인. 비록 뾰족 구두를 신고 왔지만 남편 없이 아이를 돌봐야 하는 어미는 정 많은 시골 어르신들에겐 가까워지기 훨씬 좋은 상대가 된 것이다. 게다가 농사의 ‘농’자도 모르는 이웃이니, 정 많은 어르신들이 얼마나 도와주고 싶은 게 많았겠는가? 그때부터 기옥씨의 늦둥이는 마을 어르신들이 함께 키우는 아이가 되었고, 남편 역시 아내 덕에 어렵지 않게 농촌에 정착할 수 있었다. 촬영 중에도 기옥씨는 이 밭 저 밭 다니면서, 어르신들이 주는 먹거리만 걷으러 다녀도 너끈히 끼니를 해결 할 수 있을 만큼 정으로 똘똘 뭉친 일원이 되었다.  

‘엄니 부자’가 된 기옥씨

기옥씨는 노상 ‘엄니’란 말을 입에 달고 산다. 그녀의 ‘엄니’ 소리는 요술 방망이! 어르신끼리 싸움이 날라 치면, 그녀가 ‘엄니’ ‘엄니’하는 성화에 시나브로 화해를 하기도 하고, 이 말 한마디로 어르신들의 60년 농사 노하우를 곶감 빼먹듯이 잘도 빼 먹기도 한다. 지금은 어르신들보다 농사를 더 잘 짓는 게 그녀의 자랑 중에 자랑이다.  

좀 이야기를 나누다보니, 그녀가 그토록 ‘엄니’를 많이 부르고 다니는 데에는 그럴 만한 이유가 있었다. 친정 엄마가 일찍 돌아가셔서 어린 시절 ‘엄니’ 있는 친구들이 그렇게나 부러웠다는 그. 그런 그녀가 이제 다들 엄마를 잃는 60대에 ‘엄니 부자’가 되어 그것을 큰 낙으로 살고 있다.  

그런데 그녀가 이토록 마을에 잘 정착할 수 있었던 데에는 그녀만의 노하우가 있지 않았을까? 문득 궁금해 물어 보았다. 한참을 생각하다 그녀가 내 뱉은 답. 동네에선 으레 크고 작은 싸움이 벌어지곤 하는데, 그 때 어느 쪽 편을 들어 상대를 비난하거나 말을 전하지 않아야 한다는 것이다. 뭐 그렇게 특별한 답도 아니었지만, 무릎을 탁 치게 한 한 마디였다.  

취재 때문에 많은 귀농·귀촌인들을 만났는데, 그들에게 가장 어려운 게 마을 사람들과의 화합이라는 얘기를 들었던 터였다. 어디 귀농 귀촌인들 뿐이겠는가? 아무리 작은 공동체라도 분란은 있기 마련이고 그걸 극대화하는 몇몇 사람들 때문에 모래성처럼 공동체가 무너지는 경우가 얼마나 많은가? 섣불리 판단하지 않고 남에게 전하지 않는 것만으로도 굴러온 돌이 박힌 돌들과 행복하게 살 수 있다는 것을 송광산 골짜기 덕동마을에서 배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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굴러온 돌에서 ‘굴러온 복’으로!

그들을 똘똘 뭉치게 한 데엔 그것 말고도 또 다른 이유가 있었다. 기옥씨 부부는 자연농법으로 농사를 짓는다. 농약을 쓰지 않고 잡초와 함께 농산물을 키우는 걸 보고 어르신들은 쯧쯧 했다. 그렇지만 친환경 농업이 각광을 받으며 이제는 마을 전체가 대부분 기옥씨 부부를 따라 자연 농법으로 농사를 짓는다.  

어디 그뿐인가? 여기 저기 관공서를 돌아다니며 다양한 사업을 알아내고 마을에 들여왔다. 그 결과, 지금 덕동마을은 6차 산업 시범 마을로 다양한 농촌체험 행사를 벌여 농가 수입을 올리고 있다. 거기에 농가 맛집까지 운영하면서, 많은 촌부들을 셰프로 만들었다. 그들은 순천만에서만 난다는 ‘대갱이’라는 생선을 말려서 볶음 고추장을 만들고, 당뇨병에 효과가 좋다는 돼지감자를 이용해 볶음 소금을 개발한 ‘혁신가’들이 되었다. 상황이 이렇다보니, 굴러온 돌, 기옥씨는 넝쿨 채 굴러온 마을 복덩이가 될 수밖에.  

기옥씨 부부의 정착기를 꼼꼼히 들여다 볼 필요가 있다. 어느 조직이건 조직이 잘 되려면 이 두 가지가 필요한 게 아닐까? 믿음을 져버리지 않도록 몸과 말을 조심하고, 또 무언가 함께 잘 살 길을 보여주는 것! 이것이 혁신하는 공동체의 조건이 아닌가 싶다. 

모두 개별화되는 시대에 함께 사는 일이 몹시 어려워진 세상이 되었다. 요즘 혁신적인 공동체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면서, 새로운 방법으로 조직을 운영해 성공한 기업의 CEO에게 강연문의가 쇄도한다고 한다. 땀 흘리며 만든 기옥씨 부부의 조직론이 그보다 못할까? 가장 먼저 없어질 거라고 하던 산골 마을의 굴러온 돌, 기옥씨 부부가 14년 동안 지은 사람 농사! 이것이 바로 혁신의 정수가 아닌가 싶다.  

며칠 전 전화 통화를 했더니, 보고 싶다고 근처 출장 오면 꼭 들르라고 성화다. 네네, 답은 하지만 그렇게 다시 찾아가긴 쉽지 않은데, 내년 봄에는 작심하고 돼지감자 캐러 가야겠다. 해피 바이러스가 넝쿨째 같이 달려오겠지!

글 | 한지원
한지원 님은 1990년부터 방송작가로 활동하고 있습니다. <인간극장> <KBS 스페셜> <그것이 알고 싶다> <VJ 특공대> <명작 스캔들> <TV 책을 보다> <EBS 다큐시선> 등 주로 교양프로그램과 다큐멘터리를 집필했습니다. 현재 KBS <한국인의 밥상> 작가로 활동하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