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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극장] 강 피디가 진주로 간 까닭은

추앙할 어른을 만나다_<어른 김장하>

[인간극장] 강 피디가 진주로 간 까닭은.

2022년 가장 뜨거운 단어를 뽑자면, 단언컨대 ‘추앙(推仰)’이었다. 드라마 하나로 사어(死語)에 가까웠던 단어가 대한민국을 강타했다. 드라마를 보는 내내 괜스레 누군가를 추앙하고 싶고, 또 추앙받고 싶었다. 그렇지만 실은 추앙이 무언지 어떻게 하는지 잘 몰랐다. 그래서 우린 농반진반 서로에게 물었다. “추앙은 어떻게 하는 건데?” 

맞다. 우린 그랬다. 누군가를 그토록 열렬히 우러러본 적도, 또 그렇게 추앙할 존재도 별로 없었다. 그래서일까? 우리는 ‘우러러볼 우리 시대의 어른이 없어.’라는 말을 입에 달고 살았다. 그러다 문득 한 다큐멘터리에서 추앙하고픈 어른을 만났다. 그를 만나게 한 다큐멘터리는 경남 MBC에서 만든 <어른 김장하>였다. 방송가 사람들의 SNS에 너무 좋은 다큐멘터리라고 추천하는 글들이 올라오더니, 여기저기서 꼭 보라는 당부가 이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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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사회는 평범한 사람들이 지탱하고 있는 거야” 

설 연휴에 나도 곧바로 찾아봤다. 실로 수작이었다. 주인공은 방송 출연을 극구 사양해 여태껏 지방 신문 인터뷰도 응하지 않았던 진주 시내의 ‘남성당한약방’ 주인장. 그는 평생 한약방에서 번 돈으로 학교를 세워 나라에 기증하고, 천 명을 웃도는 진주 지역 학생들에게 장학금을 줬다. 아무 조건 없이. 학생뿐만 아니라 지역의 문화예술계, 환경·노동·농민·여성 등 시민사회 분야 등 지역사회를 위해 일하는 곳곳을 물심양면으로 지원한 인물이었다.
방송을 보는 내내 가슴이 뜨뜻해지더니 다큐멘터리 끄트머리에 어떤 청년이 찾아온 얘기를 들으며 마침내 눈시울까지 뜨거워졌다. 한 청년이 찾아와 선생님이 장학금을 받았는데 그렇게 훌륭한 사람이 못돼서 죄송하다고 했다는 것이다.
“그런 걸 바란 게 아니야. 우리 사회는 평범한 사람들이 지탱하고 있는 거야.” 

이것 말고도 ‘줬으면 그만이지.’ ‘사부작사부작 꼼지락꼼지락’ 등등 그의 어록이 가슴에 한 참 남아있었다. 그리고 한 2주쯤 지났을까? EBS에서 같이 일하던 부장님이 ‘어른 김장하’를 추천하는 뒷북 문자가 왔다. 그 문자 끝에 이런 글귀가 있었다.
“<다큐 잇(it)> 같이 했던 강호진 피디가 함께 참여했네요.” 

강호진 피디? 기억이 나지 않았다. 나는 종영 전에 그만뒀으니, 그 후에 같이 일한 피디겠거니 했다. 그리고 몇 주 후, 작업 때문에 그를 만났는데, 내 예상이 맞았다. 내가 그만둔 후 ‘다큐 잇(it)’ 팀에 합류해 같이 작업을 하다가, 서울 생활을 청산하고 진주로 내려간 프리랜서 피디였다. 인사를 하고 그가 처음 내민 건 형평운동 기념사업회 기획위원장 명함이었다. 그리고 비장하게 말했다.
“당분간은 이 명함만 쓰려고요.”  

그가 포착하고 싶었던 그 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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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에서 활동하던 강 피디는 서울 생활에 염증을 느끼고 지역에서 활동하고 싶은 마음에 몇 년 전 진주에 정착했다. 거기에서 영상 작업은 물론 평소에 관심 있었던 지역사회 운동에도 참여한다고 했다. 올해로 100주년을 맞는 ‘형평운동’도 그중 하나라고 했다. 1923년 백정과 양민이 모두 평등한 사회를 만들자는 백정의 외침으로 시작된 한국 최초의 인권 운동이 바로 진주 형평운동이다. 김장하 선생도 그 운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했고, 다큐멘터리에서도 소개된 지역 운동이었다.  

프리랜서 피디로 사는 일이 지방에선 더 어려운 일일 텐데, 사회활동까지 한다니 후배지만 대견하고 존경스러웠다. 그건 그렇고! <어른 김장하> 다큐멘터리 제작 뒷이야기가 더 궁금했다. 그래서 일하러 온 피디를 붙들고 이런저런 것을 물어봤다. 일이 끝나고 술자리까지 다큐 이야기가 이어졌다. 여러 이야기 중에 가장 인상적인 이야긴 그의 출근길을 찍는 거였다. 유난히 어깨를 오므리고 팔을 흔들며 오종오종 걷는 모습은 이 다큐멘터리의 백미인데, 그 장면이 바로 강호진 피디의 작품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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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근길을 꼭 찍고 싶었어요. 매일 같은 시간 같은 모습으로 걷는 그 모습이 선생님의 모든 걸 말하는 거 같아서요. 그리고 지금 찍어 놓지 않으면 찍을 수 없는 씬이잖아요.” 

김장하 선생님이 흔쾌히 허락해서 찍은 다큐가 아니었다. 그냥 하루 이틀 조용히 곁에서 조금씩 찍어가며 친숙해져야 했다. 대놓고 출근길을 찍자고 하면, 찍지 못하게 할 게 뻔한 일이어서 그는 매일 아침 선생이 지나는 길목을 지키고 서 있다 몰래 촬영을 했다. 다큐가 한약방 문을 닫는 날까지의 과정을 찍은 거라, 그의 말대로 출근길 장면은 다시없을 장면이었다. 그 이야기를 들으니 마지막 날 차에서 내리며 카메라를 향해 환하게 웃으며 손 경례를 하던 김장하 선생의 모습이 제작진에 대한 경의의 표시이며 그가 준 가장 큰 선물이었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누군가 그랬다. 다큐멘터리는 대상을 사랑하는 과정이라고. <어른 김장하>라는 다큐를 보면, 다큐멘터리는 제작진과 주인공이 서로 사랑해가는 과정임을 알 수 있다. 처음엔 굳은 얼굴로 앉아있던 선생이 점점 카메라를 편안해하고 마침내 살인미소까지 발사해주다니! 그렇게 되기까지 피디, 카메라, 작가 모두 얼마나 진심으로 정성을 들이는지 알기에 그 환한 미소에 나까지 마음이 녹는 거 같았다. 그런 어르신이 농담도 잘한단다.
“어느 날은 물으시더라고요. 강 피디는 머리 감을 때 어디부터 감아?”
‘눈부터 감는다’가 정답이었다. 이런 아재 개그까지 구사하는 꼰대 아닌 어른을 어찌 추앙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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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기하게도 그를 만나고 진주로 여행을 가고 싶어졌다. 술자리에선 그 다음 주에 당장 진주로 달려갈 기세였지만, 취기가 가신 후 지금까지 ‘진주 여행’은 감감무소식이다. 하지만 언젠가 꼭 갈 것이다. 강 피디가 카메라를 들고 애쓰던 그 육교와 굳게 문 닫힌 남성당한약방도 순례하고 싶다. 그러다 운 좋으면 공원에서 파크 골프를 치는 그를 만날 수도 있겠지.
하지만 추앙하고픈 그분은 안 봐도 상관없다. 이미 선생의 걸음걸이, 그의 미소, 그의 생각까지 내 가슴 속에 있으니까. 진주로 간 강 피디 덕이다.

글 | 한지원
한지원 님은 1990년부터 방송작가로 활동하고 있습니다. <인간극장> <KBS 스페셜> <그것이 알고 싶다> <VJ 특공대> <명작 스캔들> <TV 책을 보다> <EBS 다큐시선> 등 주로 교양프로그램과 다큐멘터리를 집필했습니다. 현재 KBS <한국인의 밥상> 작가로 활동하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