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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상의 쉼표
[인간극장] 백전노장 마이스터들의 뚝심

추억을 길어 올리는 ‘세운 달인들’

세운상가에 마지막으로 가본 게 언제인가? 뼈 속까지 문과인데다 기계치라 세운상가를 번질나게 다니던 사람은 아니지만 종로에서 자란 나에게 그곳은 그저 붙박이처럼 있던 곳이다. 나는 지금도 어린 시절 보았던 화신백화점이 사라진 건, 대한민국의 크나 큰 유산 하나를 잃어버린 거라 생각한다.

그런데도 세운상가 귀한 줄은 몰랐다. 굳이 인연을 찾자면, <VJ특공대> 팀장 시절, 몰래카메라 구하러 피디들이 여러 차례 그곳에 갔었던 이야기를 전해 들었고, 갈 때마다 신기한 몰래카메라를 구해오곤 했다. 그저 탱크도 만들고 미사일도 만들 수 있는 곳이 그곳이라는, 소문인지 전설인지를 풍문으로 들어본 거 같다.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그저 구질구질한 상가로 알고 있던 세운상가는 1960년대 말, ‘세상의 기운이 다 모이는 곳’이란 이름으로 세워진 최초의 주상복합건물로, 서울의 랜드마크를 만들겠다는 큰 포부로 지어진 최신식 건물이었다. 이 얘긴 오래 전에 들었지만, 건물이 꼬질꼬질 때가 묻어 있었을 때, 그 얘기는 그냥 좀 과장된 스토리텔링이라고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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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시의 도시재생사업 프로젝트 일환으로 리모델링을 통해 세운상가가 기술혁신 메카로 탈바꿈했다.

세운상가가 확 변했다

그런데 얼마 전 취재 때문에 다시 찾은 세운상가는 몰라보게 달라져있었다. 성수동 문래동 같은 핫플레이스는 아니지만 세운, 청계, 대림 상가 세 개를 데크로 이은 세운상가는 마치 다시 지은 듯, 화사하게 회춘을 했다.

프로그램의 주제와 소재를 찾다 보면, 뭔가 제작진의 성향과 맞닿게 되는데, 팀에서 가장 연장자인 피디와 작가는 ‘낡고 쓸모없어지는 건물 그리고 사람’에 꽂혀 그곳을 찾았던 것이다. 성공만 얘기되는 세상에 실패담이나 자신의 ‘흑역사’가 어떤 가치를 갖았는지를 취재하고 싶어 전자기계 가득한 그곳을 찾았다.

하지만 40년 50년 기계를 만지던 엔지니어들은 나와 정 반대, 뼈 속까지 이과였다. 공부 한 자 안하고 문제 하나만 보고, 시험지 앞 뒤 장을 채우는 문과 ‘구라쟁이’는 못되는 인물이었다. 그들은 결코 실패라는 경험을 미주알고주알 이야기로 만들 줄 아는 이야기꾼은 못됐다. 언제나 숱한 시행착오가 기술력을 키웠다고 말할 뿐, 에피소드를 재밌게 풀어내지 못했다. 또 정작 열심히 설명을 해줘도 뼈 속까지 문과생인 피디 작가는 무슨 말을 하는지 잘 알아듣지 못했다.

결국 방향을 선회해 세운상가를 지킨 백전노장, 마이스터 이야기로 바꾸기로 했다. 취재차 만난 세운상가의 마이스터들은 모두들 정년을 잊은 채, 현역으로 살고 있었고, 그 속에서 무언가 이야기를 찾을 수 있을 거 같아서였다. 그리고 그 이야기 속에서 자연스레 해 묵은 물건들, 오래된 사람들이 가진 가치를 찾아낼 수 있을 거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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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술장인들, ‘추억을 고쳐드립니다’

그런 마음으로 청계천 세운상가를 다니다 만난 사람이 이승근 장인이었다. 그는 2017년 설립된 ‘수리수리 협동조합’ 이사장으로서 장인들의 맏형 노릇을 하는 인물이다. 그의 주 전공은 오디오 수리. 작업실엔 평균 40년은 되는 낡지만 귀한 오디오들만 가득했다. 그가 기계를 뜯고 저항계를 여기 저기 눌러 보는 모습은 흡사 몸 여기저기를 청진기를 대보는 의사 같았다. 아니, 그 진중함이란, 경외심까지 느껴질 정도였다.

고등학교 2학년에 손을 대기 시작해 지금까지 그 소리가 좋아 딴 일을 할 수 없었다고 고백하는 장인. 자신의 발명품은 아니고 또 소리가 나는 원리를 다 아는데도, 여전히 그 기계가 뿜어내는 그윽한 소리가 참 대견하고 신비롭단다.

그래서일까? 진공관, 트랜지스터, IC, 디지털 등 안 만져본 오디오가 없지만 단연 그가 사랑하는 소리는 진공관이다. 누가 오는지 가는지도 모르고 오디오 수리에 몰두해 있는 모습을 보고 있노라면, 50년 경력의 장인의 공력이 느껴지고도 남는다. 그렇게 음악을 좋아하면 집에 좋은 오디오 한두 개를 있을 법도 한데, 하나도 가진 것이 없단다. 몇 개 좋아서 사두었다가도, 극성맞은 손님들이 달라고 떼를 쓰면 팔곤 했더니 가진 게 없단다. 하긴 아침부터 저녁까지 작업실에서 고급 오디오의 그윽한 소리가 흘러나오는데, 굳이 집에 잘 갖추어진 오디오가 있어서 무슨 소용이란 말인가? 적어도 세운상가 현역 마이스터로 있는 동안만은 무용지물일 게 뻔하다. 이것이 일이 취미고 취미가 일인 어느 수리공의 음악 감상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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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출처: 서울시 사회적경제지원센터 블로그

이처럼 비싼 오디오가 진을 치고 있는 이승근씨의 작업실에 조금 낯선 물건 하나를 발견했다. 일주일 전에 의뢰를 받은 70년대 일제 흑백 TV다. 생긴 게 하도 예뻐서 하나 갖고 싶을 만큼 앙증맞은 것인데, 터프한 녀석들만 즐비한 그의 작업실엔 참 안 어울리는 물건이다.

웬 오디오 전문가가 TV 수리를 맡았느냐 묻자, 그가 장인들의 협동조합 이야기를 시작했다. 3년 공사 끝에 지난해 다시 문을 연 세운상가에 생긴 장인들의 협동조합의 이름이 수리수리 협동조합, ‘우리에게 소중했던 것들을 잊고 살아가고 있는 것은 아닌지’에 대한 고민으로 만든 협동조합이었다. 조합원은 세운상가 기술 장인 6명이다.

그들이 첫 사업으로 시작한 프로젝트의 이름은 ‘추억을 고쳐드립니다’. 말 그대로 추억이 담긴 오래된 기계를 고쳐주는 일을 진행 중이다. 파독 간호사로 갈 때 엄마가 녹음해 준 카세트테이프를 발견하고 그걸 듣고 싶어 카세트를 고쳐달라는 어르신도 있고, 일찍 돌아가신 아빠의 모습을 보고 싶어 비디오 플레이어를 고쳐달라는 주문도 있다. 고객은 인터넷을 통해 수리할 물건과 사연을 올리고, 진단비 1만원을 입금하면 기술장인들이 고칠 수 있는지 여부와 수리비용을 알려준다.

흑백 TV 부활 프로젝트

일본산 소형 흑백 TV도 그렇게 들어온 물건이었다. 의뢰자는 저 멀리 전라남도 신안군 압해도에서 가리비 양식을 하는 젊은 어부 강민구 씨였다. 그의 사연 있는 TV는 등대지기였던 외할아버지의 것이었다. 신안군의 섬 여기저기를 돌아다니며 등대를 지킨 할아버지는 유난히 TV를 좋아했다. 너나없이 형편이 넉넉하지 않던 그 시절, 할아버지는 핸드캐리어로 호기롭게 TV를 들고 출퇴근을 했단다. 특히 퀴즈 프로그램을 좋아했던 할아버지는 장학퀴즈를 즐겨 봤으며, 늘 손주들에게 퀴즈를 내 맞추게 했다. 그러다 칼라 TV가 생겨나고는 그 귀한 대접 받던 물건은 구닥다리가 돼 집구석 어딘가에 처박혀 있었던 것이다.

그 사연이 하도 애틋해 흔쾌히 수리 의뢰를 받아 들였고, 이승근 장인은 수리를 시작했다. 생각보다 상태는 양호해서 브라운관이 살아있었고, 짠 내 나는 바람 오래 맞은 부품 몇 개 교체하는 것으로 수리를 끝낼 수 있었다. 하지만 흑백 TV를 보려면 수신할 수 있는 셋톱박스가 따로 필요했다. 마치 친아버지처럼 이승근 장인은 그것까지 구입해 신안으로 보내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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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페인 자료사진

민구 씨는 할아버지의 기억을 고스란히 가지고 있는 TV를 들고 한 시간 남짓 끙끙대다가 TV 화면을 마주할 수 있었다. 그 화면을 보는 순간, 민구 씨와 민구 씨 어머니가 그 많던 추억들을 끄집어 낼 수 있었다. 그걸 보고 있노라니, ‘물건이 대순가?’라는 생각이 자연스레 ‘물건이 대수다’라는 생각으로 바뀌었다. 맞다. 그것이 있어 잊었던 기억을 길어 올릴 수 있었으니, 그것이 바로 ‘마중물’인 것이다.

언제부턴가 낡고 오래된 것은 환영받지 못하는 세상이 되었다는 게 몸으로 실감이 된다. 또 기술은 어찌나 빨리 변하는지, 조금만 지나도 모든 게 구닥다리고 되는 요즘이다. 새로운 가치와 세대가 세상을 지배하면서 내가 살아온 길이 쓸모없이 느껴질 때도 여러 번이다. 그런 세상에서 기술이란 무기 하나로 맞서는 버티기의 달인들, 그들이 그토록 반가웠던 건, 그 안에 나의 이력이 숨어 있었기 때문이리라.

스스로 자신의 쓸모를 찾아 나선 백전노장, 마이스터들의 뚝심에 응원가를 보내고 싶다. 혹시라도 나의 쓸모가 의심되거나, 살아온 길이 한 없이 헛헛할 때, 오래된 공간 세운상가 한 번 다녀오면 꼬질꼬질하지만 귀한 위로를 선물로 받아 올 것이다.

글 | 한지원
한지원 님은 1990년부터 방송작가로 활동하고 있습니다. <인간극장> <KBS 스페셜> <그것이 알고 싶다> <VJ 특공대> <명작 스캔들> <TV 책을 보다> <EBS 다큐시선> 등 주로 교양프로그램과 다큐멘터리를 집필했습니다. 현재 KBS <한국인의 밥상> 작가로 활동하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