웹진 카페人  
지상의 쉼표
[인간극장] 함양을 닮은 청춘

빛을 품고 ‘다시, 인생’

<밀양>이란 영화가 나왔을 때, 참 의아한 제목이라 생각했다. 물론 밀양으로 이사 온 한 여인의 이야기이기도 하다. 그렇지만 제목의 의미는 그 이상이지 않은가? 영화를 보고 나니, 마지막 장면에서 제목의 의미를 알 수 있었다. 비 온 뒤 너저분해진 마당을 비춘 조각보 같은 한 줌 햇볕, 밀양이란 제목은 절망 끝에서 만나는 그런 사랑을 뜻했다. 그래서 영어 제목도 ‘secret sunshine’이었다.

그 영화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 이후로는 ‘양’자가 들어간 지명이 꽤 많다는 걸 새삼 깨달았다. 밀양이 그렇고 온양, 광양, 단양, 함양, 진주의 옛 이름도 참 빛이란 ‘진양’이었다. 농경사회에서 볕이 잘 드는 땅이야말로 최고의 농경지였으니, 이런 다양한 수식어를 붙여서 소중한 옥토를 묘사했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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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봉’을 앞두고 귀농을 선택한 그녀

한 달에 한 번씩 전국 일주를 하다 보니, 안 가본 지역이 거의 없다. 사무실에는 지도에 갔던 곳을 하나씩 색칠해 나가는데 4년 차에 벌써 모든 지역에 색이 꽉 차 있다. 그런데 의외로 가봤음직 한데, 정작 안 가본 곳이 몇몇 있다. 전남 고흥이 그랬고, 경남 함양이 그런 곳이었다. 두 곳 다 풍광 좋기로 하도 유명해 언젠가는 꼭 가보리라 마음먹었던 곳이다. 그리고 지난 4월 ‘태양을 머금은 땅’을 알현할 기회가 생겼다! 거기엔 미소가 예쁜 20대 그녀가 살고 있었다.

그녀의 이름은 김민선, 2년 전까지 우리 팀에서 함께 일한 취재 작가였다. 같은 공간에서 일은 하지만, 다른 팀이어서 어떤 친구인지 속속들이 알지는 못했다. 다만 처음 방송 작가를 시작할 때부터 남다른 이력을 가졌던 친구였다.

작가를 하겠다고 오는 친구들은 글 쓰고 읽는 것 이외에는 별다른 취미나 관심이 없는데 민선 작가는 좀 달랐다. 대학을 졸업한 후, 요리에도 관심이 있어 식당 주방 경력도 있었고, 자신의 그런 경험을 만화로 그려서 자신의 SNS에 부지런히 올리는 ‘취미 부자’였다. 그 후로 2년 꼬박, 전국 농부님들과 유대를 쌓으며 <한국인의 밥상> 취재 작가로 일을 했다. 그리고 입봉을 준비할 무렵, 돌연 귀농을 선언했다.

사실, 전국을 돌아다니며 귀농자들을 만나다 보면, 귀농의 유혹에 빠질 때가 종종 있다. 하지만 그 많은 피디, 작가 중에 진짜로 귀농한 ‘밥상 피디, 작가’는 없었다. 그러니까 김민선 작가는 <한국인의 밥상> 출신의 첫 귀농자인 셈이다. 5월 방송 주제가 ‘다시, 인생!’으로 농촌에서 새로운 삶을 시작하는 사람들을 찾다가 그녀를 우리의 주인공으로 모시기로 했다. 그리고 그녀를 만나러 가보고 싶었던 ‘햇볕을 머금은 땅, 함양’이란 곳으로 향했다. 

스물여섯 귀농, 어쩌다 ‘시골 카페’ 주인

지리산은 산 자체로도 명산이지만, 배경으로도 참 근사한 산이다. 구례를 갔을 때, ‘지리산 치맛자락’에 사는 게 이런 거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지리산이란 크나큰 산에 기대어 사는 평안함을 느낄 수 있었는데, 함양도 그랬다. 지리산과 덕유산이 품고 임청강 등 지리산 물줄기가 모여 흐르는 큰 강이 있어 보는 것만으로도 감탄이 절로 나오는 고장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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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민선 씨가 동생과 함께 함양에 개업한 카페 <브리지사이드>


민선 작가를 만나러 간 곳은 경호강 강가의 카페 <브리지사이드>였다. 당시 함께 귀농한 쌍둥이 같은 여동생 나율과 열심히 개업 준비를 하고 있었다. 민선 작가는 2년 전 동생과 귀농을 해 귀농학교를 다녔고, 작게나마 농사를 시작했다. 하지만 처음부터 쉽지는 않았고 다른 곳으로 옮겨볼까도 생각했다. 이런저런 고민을 이웃 주민들과 나누다 문 닫은 카페가 하나 있는데, 그걸 재오픈해 보면 어떻겠냐는 제안을 받았다. 그곳 주민들은 새로 생긴 젊은 이웃을 다른 지역에 빼앗기기 싫었던 모양이었다. 둘은 승낙을 하고 열심히 카페 꼴을 갖춰갔다.

가장 먼저 한 건, 나름의 메뉴를 만드는 것이었다. 웰컴 음료 대신 그녀는 막걸리 셔벗을 내놓았다. 막걸리 고유의 향과 시원함이 환상의 조합을 이루는 시골 카페에 딱 맞는 메뉴였다. 밥상 취재 작가를 하면서 갈고닦은 실력이 빛을 발하는 것 같아 괜스레 내가 다 뿌듯했다. 새삼스럽지만 우리는 민선에게 물었다. 왜 귀농 귀촌을 생각했느냐고.

사실, 방송 작가가 되는 과정에서 가장 어려운 시간이 소위 말하는 ‘막내 작가 시절’이다. 이걸 잘 넘기고 나면, ‘입봉’이란 걸 하게 되고 입맛에 맞춰 다양한 프로그램을 할 수 있었다. 그런데 돌연 ‘귀농’이라니! 떠날 때는 그런가 보다 하고 응원을 했지만, 취재 대상이 되고 나니 좀 더 구체적으로 그 내막을 알고 싶었다. 그녀는 야무지게 대답했다. “서른이 될 때까지는 하고 싶은 걸 다 해보고 싶어요!”

그 말을 듣고 나니, 다소 산만해 보이는 그녀 이력의 맥락이 이해됐다. 대학을 졸업하고 요리를 배우고, 만화를 그리고, 글쓰기와 취재 능력을 장착했다. 그리고 실전! 농사까지 배우게 된 것이다. 흔히 직장에 취직하지 않고 아르바이트를 하면서 하고 싶은 일을 하는 이런 젊은이들을 ‘프리터족’이라고 부른다. 일본에서는 1990년대 거품 경제가 꺼진 뒤 장기 불황이 지속되면서 등장한 이들을 ‘후리타’라고 칭했다. 민선 작가는 도시에서의 ‘프리터족’을 너머 새로운 땅을 개척한 셈이다.

 그래서인지 ‘프리터족’이란 이름으로는 부족해 보였다. 그보다는 ‘자유로운 개척자’라고 그녀를 명명하고 싶다. 그리고 미래를 고민하는 청년들에게 농촌이 꽤 괜찮은 기회의 땅임을 그녀가 증명해줬으면 하는 바람이 생겼다. 물론 카페 주인은 그녀의 계획에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28살 ‘어쩌다 카페 주인’ 민선이 이렇게 또 하나의 산을 넘게 되면 그녀에겐 또 다른 길이 펼쳐지지 않을까, 혼자 기분 좋은 상상을 했다.

함양에서 만난 ‘밀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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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선, 나율 자매


이번 함양 취재에서 또 다른 사실을 알게 됐다. 20대 자매가 이처럼 대단한 도전을 할 수 있었던 배경에는 엄마 홍선우씨가 있었다. 그녀는 충북 단양에서 수십 년 남편과 철물점을 운영했다. 아이를 키우며 철물 건재상을 하는 게 쉬운 일을 아니었는데, 틈틈이 시도 쓰는 시인으로 등단까지 한 작가였다. 딸들이 귀농하겠다고 말했을 때, 엄마는 딸들의 의견을 존중했다. 아니, 그냥 존중이 아니라 요즘 유행어로 ‘추앙’했다. 그 증거가 바로 짐을 싸서 딸들 곁으로 이사를 한 것이었다.

더 깊이 들여다보면, 딸들을 돕겠다는 건 하나의 명목이었다. 철물 건재상에서 하루 16시간을 일하며 살아야 했던 그녀! 그녀는 함양에서의 새로운 인생을 살면서 아이들과 같이 밥 먹는 즐거움을 알게 되었고, 어릴 적 못 해준 엄마 노릇을 새로 시작했다. 물론 다 큰 아이들이랑 크고 작은 다툼이 없는 건 아니지만, 서로를 존중하며 서로를 이롭게 하는 방법을 터득하고 있다고 했다. 결국 딸들 덕에 그녀 역시 새로운 인생을 시작한 셈이었다.
어쩌면 딸들 덕분에 함양 땅에서 엄마 역시 조각보 같은 햇볕 한 줌을 만났을지도 모를 일이다. ‘다시, 인생!’의 적임자는 민선, 나율 자매보다 엄마가 아닐까 하는 생각을 했다. 그러나 저러나 함양의 세 모녀는 ‘다시, 인생!’엔 딱 맞는 출연자였다.

누구에게나 새로운 인생은 용기가 필요한 일이다. “어디 사나 일생이요, 어떻게 사나 일생이다!” 한국인의 밥상 취재 길에 최불암 선생님이 해주었던 그 말이 민선 작가에겐 하나의 나침반이 되었단다. 그녀가 계속 함양에 살지 혹은 어디로 옮길지 알 수 없는 일이다.

그러나 한 가지 분명한 것은 그녀는 ‘함양’이란 이름처럼 늘 빛을 품고 살 것이다. 도전과 성공의 경험은 그녀를 언제나 미지의 세계로 옮겨놓을 것이고, 빛을 닮은 마음은 그 땅을 빛나게 할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그녀의 닉네임인 ‘blooming sun’은 자신의 미래를 여는 주문일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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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카페 <브리지사이드> 인스타그램 : @bridge_side_cafe

글 | 한지원
한지원 님은 1990년부터 방송작가로 활동하고 있습니다. <인간극장> <KBS 스페셜> <그것이 알고 싶다> <VJ 특공대> <명작 스캔들> <TV 책을 보다> <EBS 다큐시선> 등 주로 교양프로그램과 다큐멘터리를 집필했습니다. 현재 KBS <한국인의 밥상> 작가로 활동하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