웹진 카페人  
지상의 쉼표
[인간극장] 옛 추억의 쓸모

시계를 거꾸로 돌리는 마술지팡이

에이슬링 월시 감독의 <내 사랑>(2017 개봉)은 그해 어느 주말 오후, 아무 준비도 없이 극장에 앉아 시나브로 장면에 도취해 내내 울다 나온 영화다. 이 영화는 캐나다의 모드 루이스라는 화가의 삶을 극으로 만든 작품으로, 러브스토리도 스토리지만 소아 류마티즘으로 몸이 불편한 그녀가 삶을 사랑하며 그려낸 작품이 지친 우리의 마음을 위로해주었다.

그런데 나는 취재 현장에서 모드 루이스를 만났다. KBS <사람과 사람들>(2017년 10월 종영)을 만들면서였다.

1.영화_내사랑_포스터-2.jpg
영화 <내 사랑> 포스터

만화를 그리는 할머니들

오래된 프로그램이기도 하고, 늘 그렇듯 아이템 찾는 일이 이만저만 어려운 게 아니었다. 볼거리도 있어야 하지만, 기획의도도 분명해야 진행을 할 수 있는 상황이었다. 막내 작가가 아이템 후보를 보내왔는데, 거기에 할머니들의 그림이 있었다. 색연필과 크레파스로 그린 자화상이었다.

나는 단박에 그 그림에 매료되었다. 사연을 들어보니, 부천의 시니어 만화동아리 할머니들이 그린 작품이었다. 앞 뒤 따지지 않고 일단 ‘나 이 아이템 하고 싶어’ 했다. 아마도 그 때 나는 <내 사랑>의 모드 루이스의 그림을 떠올렸는지도 모르겠다.

아이템 승낙이 그리 쉽지는 않았다. 시나 노래와 같은 예술 활동을 통해 노년의 행복한 삶은 찾았다는 유의 아이템은 너무 자주 다뤘고, 만화 그리는 할머니 이야기는 그 카테고리에 들어간다는 것이었다. 맞는 말이긴 하지만, 만화 그리는 할머니는 없었으니, 가능하지 않을까?

일단 반 승낙을 받고 우선 만나 보기로 했다. 우리가 온다고 할머니 한 분이 팥죽을 한 솥 끓여오셨다. 아침을 챙겨 먹고 간 터라, 배가 고프지도 않았는데도 어찌나 맛이 있는지 팥 죽 한 그릇을 다 비우고 취재를 시작했다. 원래 이들은 노인 복지관의 만화반 학생들이었다. 그런데 만화 그리기에 빠진 열혈 학생 10여 명이 그림을 계속 배우겠다고 선생님을 조르고 졸라, 시니어 만화동아리를 만든 것이었다. 모두들 신이 나서 만화 그리기가 얼마나 재미있는지 이야기를 쏟다 놓았다. 어떤 할머니는 크레파스를 잡았다 하면, 밤을 샜고 어떤 할머니는 손녀와 더 친해졌다.

2.인간극장-2.jpg
부천 시니어 만화동아리 회원인 서영희 할머니

‘팥죽 할머니’도 이야기를 시작했다. 할머니는 늘 밝은 표정이었지만, 그녀의 이야기는 그리 밝은 이야기가 아니었다. 2011년 그는 파킨슨씨병 진단을 받았다. 희귀병이었다. 그 충격이 너무 커 삶을 비관해 치료를 거부했다. 어차피 병들어 죽을 몸 뭘 하겠냐는 마음이었다.

그러나 그렇게 2년을 허비한 후, 할머니는 난타와 만화를 만나면서 삶이 변하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두 가지가 자신의 마음을 바꾸게 했고 지금은 의사 선생님이 놀랄 만큼 병세가 호전되었다고 했다. 다른 병도 아니고 온몸의 근육이 마비되어가는 파킨슨씨병인 노인이 그림을 그린다… 꽤 새로운 스토리가 될 거 같았다. 우선 팥죽 할머니와 다른 두 할머니를 주인공으로 촬영을 하기로 하였고, 이들이 그림 자서전을 위해 그림을 그리는 컨셉으로 이야기를 진행하기로 했다.

할머니의 달동네, 그리고 엄마

팥죽 할머니의 이름은 서영희, 예순 아홉인데 너무 젊어 보여서 그게 좀 흠인 우리의 주인공이다. 할머니는 뭐든지 적극적인 피가 뜨거운 여인이었다. 난타면 난타, 그림이면 그림, 뭐 하나를 시작하면 온힘을 다해 그것을 해내는 스타일이었다. 파킨슨씨병 진단을 받은 후, 우울의 늪에서 그녀를 건져 올린 건 ‘난타’였다. 손이 심하게 떨리고 근육이 점점 말을 듣지 않는 상태에서 난타라니!

그런데 서영희 할머니는 남들보다 뒤처지지 않으려고 피나는 노력을 했고, 그러면서 삶의 의지가 다시 살아났다고 한다. 할머니는 매일 아침 옥상에 올라가 자신이 키우는 채소들과 대화를 하고, 자기 스스로 만든 체조로 몸을 푼다. 그것이 굳어가는 자신의 몸을 재활하는 자기만의 치료다. 그러다 만난 게 만화였다. 만화가 그녀를 행복하게 했던 건, 자기가 가장 아름답고 행복했던 시절을 소환하기 때문이었다. 과연 서영희 할머니의 ‘화양연화’는 언제였을까? 취재를 하면 할수록 할머니가 궁금해졌다.

서영희 할머니는 억척 소녀였다. 중학교를 졸업하고 충청도에서 혼자 상경해 재봉 일을 배운 60년대 전형적인 공장 노동자다. 나중에 그 기술로 양장점까지 오픈해 기술자로 한 평생 옷을 지었다. 그 시절, 할머니의 오직 한 가지 소망은 일찍 홀로 되신 어머니를 모시고 올라와 함께 사는 것이었다.

옛 추억을 그리라고 했더니, 서영희 할머니는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엄마와 같이 살던 돈암동 달동네를 그렸다. 그림의 내용은 이런 거다. 달동네 꼭대기 엄마는 딸내미를 위해 된장찌개를 끓여 놓았고, 하루 종일 고된 일을 마치고 돈을 아끼려고 한강 다리를 걸어서 건너 온 딸은 엄마를 보고 싶은 마음에 허기진 배를 잡고 언덕 위를 뛰어 오르는 그 순간이었다. 그 때 엄마가 손을 벌려 안아줬을 때의 그 온기로 지금까지 어려움을 다 이길 수 있었다며, 할머니는 참았던 울음을 터뜨렸다.

3.인간극장-2.jpg
서영희 할머니가 어릴 적 살던 동네를 그린 그림

더 이상 설명할 것도 없었다. 그림을 보는 순간, 그 시절이 달동네가 연상되었고, 그때 그 어린 여공의 배고픔과 그리움이 손에 잡힐 것 같았다. 할머니는 고개를 꺄우뚱거렸다. 이상하게 연필만 잡으면 전혀 기억에 없던 옛 추억이 그렇게 떠오른다는 거였다. 그리고 그것을 떠올리는 순간, 이미 자신은 거기에서 엄마를 만나고 있다는 것이다. 할머니의 표정에서 이미 그 시절에 있음을 알 수 있었다.

할머니 부부를 모시고 돈암동을 가보았다. 물론 그 달동네는 이미 사라진지 오래, 그나마 성북동에 비슷한 달동네가 조금 남아있어 거기에서 옛 돈암동 달동네를 바라볼 수 있었다. 그리고 내려오는 길 개천가에 앉아 엄마와 빨래를 하던 옛 추억을 그림에 담으며 다시 한 번 할머니는 엄마를 만났다.

좌절하고 있다면 추억 소환!

심리학 실험 중에 시계를 거꾸로 돌리는 실험이 있다. 1979년 심리학자 얼렌 머렝은 70대 노인 8명과 함께 외딴 시골마을로 갔다. 그 시골 마을은 타임머신을 타고 온 것처럼, 20년 시계를 거꾸로 옮겨 놓은 1959년의 상태로 세팅되어 있었다. TV를 켜면 그 때 드라마가 나오고 라디오를 켜면 당시 유행곡이 흘러 나왔다.

그곳에서 노인들은 자신의 힘으로 1주일을 생활했는데, 그들은 놀랍게도 50대로 돌아간 것처럼 시력, 청력, 기억력, 악력 모든 기능이 좋아졌다는 유명한 실험이다. 지팡이를 짚고 들어갔던 할아버지는 1주일 후 지팡이를 버리고 그곳을 나왔다나 뭐라나.

어쩌면 도화지 한 장이 서영희 할머니에겐 시계를 거꾸로 돌리는 마술을 부렸는지 모르겠다. 혹시 지금 마음이 가라앉고 좌절을 경험하고 있다면, 연필도 좋고 크레파스도 좋다, 뭐든 짚고 옛 추억을 소환해 보아라. 아마도 가장 힘겹고 어려웠던 그러나 가장 아름다웠던 그 순간으로 마술지팡이가 당신을 인도할 것이다. 이 정도면 옛 추억이란 녀석, 꽤 쓸모 있는 녀석이 아닐까?

 

글·사진 | 한지원
한지원 님은 1990년부터 방송작가로 활동하고 있습니다. <인간극장> <KBS 스페셜> <그것이 알고 싶다> <VJ 특공대> <명작 스캔들> <TV 책을 보다> <EBS 다큐시선> 등 주로 교양프로그램과 다큐멘터리를 집필했습니다. 현재 KBS <한국인의 밥상> 작가로 활동하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