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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탱자 가라사대] ‘혼디 손심엉 벵삭이 웃는 제주’

제주어 지킴이 <우리들의 블루스>

제주어가 뜬다. 얼마 전 종영한 tvN 드라마 <우리들의 블루스>와 애플tv에서 방영하는 <파친코> 덕분이다. 영호남 사투리가 대부분이었던 미디어에서 제주 말이 들리니 반갑고 정겹다. <우리들의 블루스>에 나오는 배우들의 사투리 연기는 원주민이 아닌 이주민 입장에선 꽤 훌륭해 보인다. 은희 역의 이정은과 동석 역의 이병헌은 다양한 캐릭터를 워낙 잘 소화해서 ‘참 연기 잘한다’며 무릎을 쳤고, 부성애로 시청자들의 눈물샘을 자극했던 뉴페이스 호식과 인권은 그냥 우리 동네 삼춘들 그 자체다. 이효리가 불을 지핀 제주살이에 대한 판타지가 이제 제주어라는 문화 영역까지 확장되는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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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들의 블루스> 스틸컷. 출처: tvN 홈페이지

‘외국어 같은’ 순우리말의 보고

제주의 기원은 한자문화권인 한반도의 그것과 다르다. 오키나와가 오래 전 일본이 아닌 ‘류큐’라는 독립국가였듯 제주 역시 ‘도이, 동영주, 섭라, 탐모라, 탁라’ 등으로 불리다 ‘고을나(제주시조인 고양부 3성씨 중 고씨)’의 15대 후손 3형제가 신라(BC 57~AD 935) 조정에 입조하면서 ‘탐라’라는 국호를 갖게 되었고, 이때부터 탐라는 신라를 섬기게 되었다. 그러다 보니 지금도 제주어에는 한자의 음이나 뜻으론 유추할 수 없는 순우리말 같은 독자적인 단어들이 많다. 송악산의 다른 명칭인 ‘절울이 오름’이나 산굼부리의 ‘굼부리’, 다랑쉬 오름의 ‘다랑쉬’ 같은 말들은 아무리 머리를 굴려 봐도 그 뜻과 유래를 유추하기 힘들다.
 

다랑쉬는 예전 고구려 말에서 크다란 뜻의 ‘다랑’과 산이란 뜻의 ‘쉬’가 합쳐진 말이라는데 그냥 머리로만 받아들인 뿐 가슴에서 그 의미가 느껴지질 않는다. ‘혼저 옵서예(어서 오세요), 폭삭 속았수다(수고 많으셨습니다), 무사마씸(왜 그러세요?), 혼디 손심엉 벵삭이 웃는 제주(함께 손잡고 방긋이 웃는 제주)’ 같이 제주 고유의 단어들로 구성된 사투리는 그냥 외우지 않으면 표준어와 한자어에 길들어진 육지 사람들은 알아들을 방도가 없다. 한국 사람이 한국어를 하는 드라마인데 한글자막이 나올 정도니 말이다.
 

서울을 제외한 우리나라 대부분의 지명이 한자어로 이뤄진 것처럼 제주의 정겨운 지명들도 한자로 변환되었다. ‘모래가 많은 항구’란 뜻의 모슬포는 발음 그대로 한자를 가차해 ‘摹瑟浦’로 표기할 순 있지만 지금은 ‘매우 고요하다’는 의미의 대정(大靜)으로 공식명칭이 바뀌었다. 내가 살고 있는 구좌읍 세화리도 원래 명칭은 ‘가는곶’이다. 세찬 바람에 모래가 날려 해안선을 따라 가느다랗게 만들어진 사구(모래 언덕) 위에 풀꽃씨들이 날아와 곶(작은 숲)이 형성되며 ‘가는곶’이 된 듯한데 현재는 생뚱맞게 가늘 세, 꽃 화의 세화(細花)로 불린다. 번외로 가시리는 시간이 더해지듯이 느리게 살기에 좋은 곳이라는 멋진 지명인 반면, 표선은 겉보기에 착한 사람들이 사는 곳으로 오해할 정도로 음흉하기 짝이 없는 네이밍이다. 순우리말의 제주지명을 무리하게 한자어로 바꾼 부작용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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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 세화리 앞바다

제주 바람을 이겨낸 제주어

10년차 이주민으로서 언어적으로 예민하고 특정 현상을 관찰, 분석 후 그 원인과 숨겨진 의미에 대해 내 맘대로 가설 세우기 좋아하는 전직 광고쟁이가 바라 본 제주어의 특징은 이렇다. 원주민도 아니고 국문학 전공자도 아닌 사람의 가설이라 검증은 당연히 불가능하다.
 

일단 제주말은 짧다. 밥먹언?(밥먹었니?), 기꽈(정말입니까?)처럼 술어의 어간만 취하고 어미들은 과감히 생략한다. ‘~핸(=~했니)?’, ‘~마씸(~말입니다)’, ‘~간(갔니?)’처럼 말이 짧다보니 아직 서울말을 쓰는 나 역시 톡이나 댓글을 달 때 편해 즐겨 애용한다.


두 번째로 제주어엔 지금은 사라진 고어에서 썼던 ‘아래아’ 발음이 여전히 살아있다. 아래아는 ‘ㅏ’와 ‘ㅗ’의 중간 발음이라 배웠는데 제주에선 거의 ‘ㅗ’로 발음된다. ‘ㅏ’로 발음되어야 하는 많은 단어들이 ‘ㅗ’로 발음된다. 몸국, 보롬(바람), 독새기(닭새끼, 닭알, 달걀) 등이 그 예다. 독새기와 발음이 비슷한 도새기(새끼돼지)는 아래아가 아닌 한자인 돼지 돈(豚)에서 ‘ㄴ’이 탈락된 것으로 보인다.


세 번째로 제주어엔 전라도의 ‘거시기’에 필적하는, 육지 사람은 절대 알 수 없는 세 가지 지시대명사가 있다. 바로 ‘영(이것, this)’, ‘경(그것, it)’, ‘정(저것, that)’이다. 가령 ‘경한디 경허민(겅허민) 영도 정도 안 된다게’란 말을 들으면 머리 속에서 빨리 각각의 지시대명사를 문맥에 맞게 적용시켜야 한다. 모범답안은 ‘그런데 그리하면 이도 저도 안 된다니까’이다. 병맥주를 건네주며 ‘영따’하면 ‘이거 따’로 해석해야 하고, 상대방이 병뚜껑을 따는 시늉을 하며 ‘영따’하면 영을 ‘이렇게’로 이해하면 된다. 이 세 가지 지시대명사의 활용 형태는 실로 다양하기에 이 부분만 잘 알아들어도 제주말의 상당 부분을 이해할 수 있다.
 

마지막으로 제주어엔 독특한 발음 규칙이 있다. ㄴ이나 ㄹ이 ㅎ을 만나면 ㅎ을 먹어버린다. 가령 올해는 [올래], 일학년은 [일락년]처럼 단어 하나하나의 받침까지 끝까지 힘을 주어 똑 부러지게 발음한다. ‘전나 전나(전화 전화)’하며 핸드폰을 건네시던 이웃 분이 순간적으로 욕을 하는 줄 알고 오해했던 기억이 난다.
 

이처럼 말을 짧게 끊어서 강하게 발음하거나 바람을 [보롬]이라 말하는 이유는 다름 아닌 그 바람 때문이다. 바람 없는 날이 보통 초속 4~5m고 일주일에 하루 이틀(겨울엔 3일 이상)은 초속 7~8m 이상의 바람이 부는 삼다도 제주에선 소리의 파동 역시 세찬 제주바람에 날려 흐트러지고 바람소리에 묻혀 쉽게 사그라진다. 바람의 간섭을 극복하기 위해 목소리는 키워야 하고, 앞부분이 강해지고, 약해지는 소리영역인 어미는 과감히 날려버려야 한다. 또한 퍼지는 ‘ㅏ’ 대신 모이는 ‘ㅗ’ 발음이 멀리 가기에 ‘ㅏ’를 ‘ㅗ’로 발음하게 된다. 촛불을 끌 때 입을 활짝 벌리지 않고 입술을 모아 바람을 부는 원리와 같다.
 

육지에 비해 지붕도 낮고 처마 길이도 짧게 함으로써 바람을 극복하려는 제주인의 지혜가 언어에까지 자연스럽게 녹아있는 것이다. 에너지는 적게 들여가며 의미는 온전히 전달하려는 효율적이면서도 가성비 갑인 언어가 바로 제주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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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멸위험 높은 언어에서 호감언어로 

이렇게 멋지고 훌륭한 제주어를 유네스코는 10년 전쯤 전 세계 언어 중 소멸위험이 가장 높은 4등급 언어로 지정했다. 내 또래의 원주민들은 학교 다닐 때 제주사투리를 쓰면 표준어를 쓰라며 선생님한테 꾸중을 듣기까지 했다는데 다행히 최근 지역 초등학교에서는 제주어를 지키기 위해 정규수업 외에 제주어 과정을 별도로 진행하고 있다. 하지만 학년이 올라가도 똑같이 반복되는 수업과 선생님들조차 제주어에 대한 내공이 깊지 않기에 학생들이 제주어 배우기에 재미를 느끼지 못하고 있단 얘기가 지역 언론에서 나오고 있다. 


이런 와중에 가뭄 속 단비처럼 <우리들의 블루스>는 제주어 지킴이 역할을 훌륭히 수행했다. 제주어를 쓰는 원주민들이 듣기엔 다소 어색할지라도 낯설고 우스꽝스럽게 치부된 제주사투리에 전 국민이 호감과 흥미를 갖는 것만으로도 제주어의 미래는 밝아진다. 드라마를 넘어 개그맨들 사이에서도 제주를 소재로 한 꽁트 개발 붐이 이어져 나갔으면 좋겠다. 도 차원에서 <우리들의 블루스>에 출연한 몇몇 배우들을 제주 명예 홍보대사로 임명부터 하자.


어느덧 주말이다. <우리들의 블루스>도 <나의 해방일지>도 다 끝나 버렸고…. 헛헛하다.

글 | 지준호
지준호 님은 전직 광고맨(오리콤, 제일기획 등), 10년차 제주이주민으로 구좌 세화리 부티크 제주민박 살롱드탱자와 유쾌한 제주돌집 탱자싸롱을 운영 중입니다.‘바삭한 주노씨’란 작가명으로 브런치(httP://brunch.co.kr/@junoji)에 재치 있는 에세이와 패러디 광고를 쓰며 조용히 살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