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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상의 쉼표
[수리수리 정가이버] 기술자의 삶

뜻하지 않은 길이었지만 소중한 인생

겨울의 끝자락에 내린 눈이 채 녹지 않은 3월 첫 주의 어느 날. 동이 트기도 전에 일어나 서둘러 아침밥을 먹고 일찌감치 집을 나섰다. 작년 가을 학기부터 이동통신을 전공하는 학생들에게 ‘디지털공학’이라는 과목을 강의하기 시작했는데 1교시인 9시까지 가려면 서둘러야 했다. 집에서 무려 100킬로미터나 떨어져 있는 학교까지는 막히는 길을 두 시간 가까이 운전해야 한다. 지난 9월 강의를 시작한 후로 학교에는 몇 번쯤 가보았지만 코로나로 온라인 수업만 진행했기 때문에 이번이 처음으로 하는 대면 수업이었고, 올해 입학한 신입생들과의 첫 만남이라 살짝 긴장되는 마음도 있었다.

모든 학교가 일제히 개학한 3월의 도로는 교통체증이 심해서 평소보다 오래 걸렸고 학교에 거의 도착했을 무렵 조교에게서 전화가 왔는데 사정이 생겨 급하게 강의실을 옮겨야 한다고 했다. 주차를 하고 겨우 제 시간에 맞춰 바뀐 강의실을 찾았지만 두 시간이나 운전을 하고 온 상태여서 화장실부터 들러야 했다.

하지만 낯선 건물에서 화장실을 쉽게 찾을 수가 없었고 기껏 찾은 것이 하필이면 여자 화장실이었는데 알고 보니 커다란 건물의 양쪽 끝에 남, 녀 화장실이 따로 있었다. 그것을 모르고 위층까지 갔다 오느라 가쁜 숨을 몰아쉬며 강의실에 도착하니 막 9시가 지나고 있었다. 학생들은 코로나 거리두기 지침에 따라 마스크를 쓰고 한 칸씩 자리를 띄어 앉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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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년 만에 찾아온 교사의 꿈

젊은 시절 대학을 졸업할 때가 다 되어서야 뒤늦게 교사가 되고 싶다는 생각을 했었지만 다시 대학에 입학하지 않고는 교사가 될 수 있는 방법이 없다는 것을 알고 포기했다. 그런데 30년 가까운 세월이 지난 후에 학생들을 가르칠 기회가 우연히 찾아온 것이다. 교사가 된다면 입시에 쫓기는 일반 고등학교가 아닌 공업학교 같은 곳에서 전공인 전자공학을 가르치면 좋겠다고 생각했는데 재미있게도 바로 그 졸업생들이 대부분인 전문대학에서 강의를 하게 된 것이다. 졸업과 동시에 군입대 대신 병역특례로 전자 관련 산업체에서 종사하게 될 학생들이다.

급하게 강의실로 들어서니 학생들이 먼저 ‘안녕하세요?’라며 활기찬 인사를 건넨다. 학생들보다 먼저 강의실에 도착해서 미리 수업준비를 하고 싶었지만 첫 수업부터 숨을 헐떡이며 교실에 들어선 것이다. 이제 막 대학에 입학한 신입생들의 모습을 보니 코로나도, 얼굴을 가린 마스크도 파릇파릇한 젊은이들의 생기를 감추지는 못하는 것 같았다.

준비해 온 자료를 보여주려면 노트북을 프로젝터에 연결해야 하는데 아무리 찾아도 연결할 수 있는 케이블이 보이지를 않았다. 화면 없이 그 동안 해왔던 일들을 설명하는 것으로 나의 소개를 마치고 앞으로 어떤 내용들을 배우게 될지에 대해서 이야기했다. 시간이 금세 지나가 버렸다. 긴장을 해서였는지 어떻게 수업 시간을 채웠는지 잘 기억나지 않는다. 요즘은 코로나 때문에 출석체크도 온라인으로 해서 학생들의 이름을 부를 기회도 거의 없다. 그래서 일부러 한 사람 한 사람 이름을 부르며 눈길을 맞춰 출석을 불렀다.

어떻게 하면 학생들이 좀 더 관심을 가지고 재미있게 수업을 듣게 할 수 있을까? 그저 학점을 따야하는 의무로서의 과정이 아니라 궁금증을 가지고 듣고 싶은 강의가 되기를 바라는데, 그것은 가르치는 사람에게 더 많은 책임이 있는 것 같다. 아무리 내용이 훌륭한 강의라도 학생들이 처음부터 그 가치를 알아보긴 쉽지 않다. 아는 만큼 보인다고 하는데 몰라서 배우기 위해 모인 것이니 그런 안목이 있을 리 없기 때문이다. 학생들에게 학습의 동기를 유발하고 교수에 대한 믿음을 주는 것도 가르치는 사람의 능력에 속하는 것 같다. 배우는 사람이 선생에 대한 믿음이 없이는 교육이 제대로 진행될 수 없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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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분히 경험하고 가르치니 늦은 게 오히려 다행

대학을 졸업한 후로 지금까지 기술자로서 해오고 있는 일들을 설명하며 그 일들이 앞으로 수업하게 될 내용과 어떤 관련이 있는지를 설명했다. 줄줄이 참여했던 프로젝트와 개발했던 제품들이 어떤 기술을 사용했는지를 소개했는데, 어찌 보면 자랑처럼 들릴 수도 있는 것들이지만 학생들에게 믿음을 주기 위한 일이라 여기니 자랑한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그리고 우리가 공부하는 것이 소위 4차산업혁명 또는 디지털 문명이라 불리는 시대에 가장 기본이 되는 것을 배우게 될 것이라고 얘기해 줬다. 사회에 진출했을 때 제품을 개발하는 역할을 담당하지 않고 전자 장비를 운영, 생산하거나 또는 아주 다른 일을 하더라도 우리 시대를 이해하는데 필요한 최소한의 상식으로서도 의미 있는 공부가 될 거라는 말도 덧붙였다.

요즘은 학생들을 가르치는 일이 가장 즐겁고 책이 아닌 현장에서 얻은 경험을 전해주는 게 보람 있게 느껴진다. 대학을 졸업하자마자 바로 교사가 되었다면 책에 쓰여 있는 내용밖에는 전해줄 수 없었을 텐데 현장에서 충분히 경험하고 가르치게 되었으니 오히려 잘 된 것 같다. 실무 경험이 없이 학생들을 가르치게 되었다면 마치 책으로 연애를 배우고는 다른 사람에게 연애하는 법을 가르치는 것과 다름없었을 것 같다.

중고등학교 시절의 꿈은 과학자가 되는 것이었지만 입시에서 원하던 대학의 학과에 진학하지 못하면서 꿈에서 멀어졌다고 생각하니 대학 공부가 재미있게 느껴지지 않았다. 하지만 원하지 않았던 전공은 생계를 위한 평생의 직업이 되었고 바라던 모습이 아니었지만 기술자의 삶을 차츰 나의 것으로 받아들이게 되었다. 나이가 들어가며 인생이 원하는 대로만 되지도 않고 원하는 대로 된다고 해서 꼭 행복해지거나 그렇지 않다고 불행해 지는 것은 아니라는 걸 깨닫게 되었다. 지금 나는 기술자인 것이 자랑스럽고 기술자로서의 삶을 나의 소중한 인생으로 받아들인다. 그렇지 않다면 앞으로 기술자로 살아갈 학생들을 만나서 가르친다는 것이 기쁘지 않았을 것 같다.

경험과 지식 전달뿐 아니라 자부심을 심어주는 일

학생들을 가르치는 것은 평생을 기술자로서 살아오며 얻은 경험과 지식을 전달하는 일뿐 아니라 학생들이 기술자로서의 삶에 대한 자부심을 가질 수 있도록 돕는 일이기도 하다. 사회에서 기술자가 될 학생들에게 병역특례의 혜택을 주는 건 젊은이들이 그런 일을 하지 않으려 하기 때문이라는 반증이기도 하다. 심지어 전자기술자가 3D 업종이라는 이야기를 들은 적도 있다. 하지만 우리 사회에는 기술자가 꼭 필요하니 세상 사람들이 어떻게 평가하든 학생들이 기술자로서의 자부심을 가질 수 있으면 좋겠다.

글. 정한섭
1994년부터 통신과 방송 관련 장비를 개발하는 전자 엔지니어로 일하고 있습니다. 재택근무를 하며 아빠로서 두 아이의 육아를 담당하기도 하였습니다. 요즘은 아이들에게 수학과 코딩을 가르치는 일을 겸하고 있습니다. bearfeet@naver.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