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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치지 못한 편지] 당신과 함께 서 있던 시간

정류장, 현재와 과거가 만나는 기억의 좌표

[부치지 못한 편지] 당신과 함께 서 있던 시간.

나는 혼자서 아무 것도 가진 것 없이, 낯선 도시에 도착하는 공상을 몇 번씩이나 해보았다. 그리하여 나는 겸허하게, 아니 남루하게 살아보았으면 싶었다. 무엇보다도 그렇게 되면 ‘비밀’을 간직할 수 있을 것이다. 나 자신에 대하여 말을 한다거나 내가 어떠한 사람이라는 것을 내보인다거나 나의 이름으로 행동한다는 것은 바로 내가 지닌 중에서 그 무엇인가 가장 귀중한 것을 겉으로 드러내는 일이라는 생각을 늘 해왔다.
_ 장 그리니에, <섬> 중 

오후, 고삼저수지는 조각배를 몇 채 띄워놓고는 깊은 잠에 들었나 봅니다. 생각이 생각을 밀어내는지 물살은 같은 곳으로만 흘렀습니다. 물위를 스치듯 차고 오르던 바람이 수풀 속으로 뛰어드는 소리가 났습니다. 이내 숲에서는 기다리기라도 한 것마냥 오후 내내 감춰두었던 이파리들을 뒤집고 뒤집어 연푸르게 자맥질 중입니다. 노을에 머리를 묻은 채 저수지에 붉은 손을 씻고 있던 해는 산 너머로 건너가고 있습니다.
기억하는가요? 방갈로형의 수상 좌대를 빌려 짐을 풀고 저수지를 둘러보았을 때 멀리서 물오리떼가 저수지를 가로질러 날아오르던 때를. 이곳에 오기 위해 저는 당신을 오래오래 기억해야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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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류장에 와서 정류장을 생각합니다.

정류장은 머묾의 공간도, 지나침의 공간도 아닙니다. 그저 잠시 발걸음이 머뭇거리고 있는 곳입니다. 당신을 생각하면 저는 언제나 정류장을 떠올리게 되고, 그 정류장에서 저는 한동안 망연자실합니다. 아무런 말도 하지 못한 채 당신과 마지막 인사를 했던 곳도 정류장이었고, 처음 당신을 만난 곳도 정류장이었습니다. 흔히 정류장은 떠남의 공간이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저에게 정류장은 만남이었고, 집으로 가는 당신을 혼자 차에 태워 보내고 허전하게 돌아서던 아쉬움의 공간이었고, 끝내는 당신을 마지막으로 만났던 공간이었습니다.  

잠시 발걸음이 머뭇거렸듯, 그때 그 시간들 속에서 저 역시 당신이라는 사람을 서성이기만 했던 것은 아니었을까요. ‘사람을 서성거린다’는 말은 문법에 어긋나는 표현이지요. 그러나 저는 더 들어가지도, 더 나오지도 못했던 당신에 대해 이렇게밖에 표현할 수가 없네요. 마치 정류장에서 다음 행선지를 물끄러미 바라보며 서성거리는 것처럼 말입니다. 당신 주변을 서성거린 것이 아니라 당신을 서성거렸다는 것. 그것이 당신과 제가 함께 했던 시간에 대한 저의 정의(定義)입니다.  

정류장은 제게 섬과 같은 곳입니다.

다시 찾은 안성은 안개 자욱한 섬 같은 곳이었습니다. 고삼저수지의 낚시터에 앉아 내륙인 이곳이 왜 섬과 같을까 생각해보았습니다. 제 가슴 위로 당신은 떠있고 저는 그곳에 늘 가닿으려 했는지 모릅니다. 당신이 살던 안성은 제게 섬과 같은 곳이었습니다.  

섬은 누군가에게는 가보고 싶은 곳이거나 동경의 장소이지만, 누군가에게는 떠나고 싶은 곳입니다. ‘사람과 사람 사이에 섬이 있다’는 어느 시인의 표현이 아직도 제게 유효한 것은 그 문장이 만드는 통찰이 살아있기 때문이겠지요. 돌이켜보면 제가 지나왔던 삶의 공간은 모두 섬이었습니다. 벗어나고 싶은 곳이면서도 다시 돌아가고 싶은 섬이었습니다. 외롭지 않은 적은 없었지만 그 외로움이 제게는 언제나 낯설지 않았기에 그다지 흉물스럽거나 비루하지는 않았습니다.  

그때 당신은 인생에서 가장 화려한 순간을 준비하고 있었지요.

굳이 저와 같이 배고픈 사랑을 할 필요가 없었지요. 며칠 머무는 여행이라면 섬은 낯섦에 대한 동경이며 매력적인 곳이지만, 섬을 벗어날 수 없거나 벗어나기 위해 몸부림치는 섬사람들에게 섬은 극복과 부정의 공간입니다. 당신은 제가 섬처럼 보였을 것이지만, 저는 빈곤과 피로의 섬에 발이 묶인 남루한 청춘이었습니다. 내면의 상처를 겨우겨우 이겨내던 주변인이었습니다.  

빙산의 일각. 제게 섬은 단지 보이는 것에 대한 걱정거리가 아니었죠. 수면 위로는 보이지 않지만, 거대하게 뿌리를 박고 있는 섬뜩한 공포와 두려움의 근원 같은 것이었습니다. 어디로 가야할지 뚜렷하게 방향을 못 잡고 서성거렸던 정류장. 언제까지 옮겨 다니며 살아야 할지, 도대체 밑바닥을 알 수 없던 삶에서 정류장은 유일하게 익숙한 제 삶의 실체였습니다.  

경기도 안성은 당신의 고향입니다.

저는 지금 안성의 어느 버스정류장에 서 있고, 기억은 시간을 거슬러 당신과 함께 있던 공간을 더듬고 있습니다. 밥벌이를 하러 서울에서 이곳까지 오간지 2년여쯤 됩니다. 일주일에 하루 이틀 동안 이곳, 안성에 머물면서 지난 시절 당신과 나눴던 많은 얘기들을 들춰내곤 했습니다.  

차를 두고 일부러 이 정류장을 찾아옵니다. 산책하듯이 시간을 거슬러 오르고 탐색하듯이 공간을 훑어 볼 때 어디선가 당신이 불쑥, 모퉁이에서라도 나타날 것 같은 착각이 듭니다. 그리고 이제 다시 그 기억을 남겨놓아야 할 때입니다. 다시 안성을 떠나야 할 상황이 생겼기 때문입니다. 어쩌면 이곳은 제가 영원히 서성거려야 하는 곳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안성…이라고, 당신…이라고 낮게 읊조려 봅니다. 그렇게 몇 번을 부르니 어느 새 봄이 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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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에게 두 가지를 되돌려 드리고자 합니다.

이곳을 다시 언제 올 수 있을지 모르겠습니다만 더 늦기 전에 당신에게 편지를 써야하겠다고 마음먹게 됩니다. 막상 당신, 이라고 불러보니 할 말보다는 형태가 잡히지 않는 기억들이 뒤엉키어 혼란스럽습니다. 아마도 안성의 아침과 저녁에 허기처럼 찾아오는 안개의 기억이 겹치기 때문일 겁니다.
이곳을 떠올리면 저에게는 두 가지가 언제나 머릿속에 꽉 차오릅니다. 하나는 당신이 읊조리던 허밍에 전해지던 노랫소리이고, 또 하나는 안개입니다.  

이곳에는 언제나 지나 온 길이 있고, 또 가야할 길이 있습니다.

당신과 함께 바로 이 정류장에 서있던 시간을 떠올려 봅니다. 십여 년도 훌쩍 지난 시간입니다만 기억은 또렷합니다. 지나버린 기억과 눈앞에 있는 현재의 차이를 생각해봅니다. 형태가 없고 소유할 수 없다는 점에서 기억이나 현재 모두는 아무 것도 아닐 수 있습니다. 다만 그 모두가 제가 아니면 어떤 가치도 없다는 점에서 새롭기도 합니다.  

이런 요설을 횡설수설하는 데에는 이곳이 바로 안성이기 때문입니다. 어떤 장소는 단순히 이름만으로 부를 수 없는 곳도 있죠. 그럴 때 그 장소에는 기억이 깃들여 있는 겁니다. 당신을 생각하면 늘 생각나는 노래가 있지요. 얼마 전 TV에서 신인가수가 이 노래를 부를 때의 익숙함이라니…. 신기할 정도로 시간이란 것의 허무함을 실감했습니다. 그때 당신이 늘 부르던 그 노래를 통해 기억이 재생되고 시간은 정말 쏜살같이 기억을 거슬러 가더군요.  

다시 태어난다면 다시 사랑한다면
그때는 우리 이러지 말아요
조금 덜 만나고 조금 덜 기대하며 많은 약속 않기로 해요
다시 이별이 와도 서로 큰 아픔 없이 돌아설 수 있을 만큼
버려도 되는 가벼운 추억만 서로의 가슴에 만들기로 해요
_ 도원경, <다시 사랑한다면>(2001년) 

안개는 제게 언제나 푸른 빛깔의 모습입니다.

그때가 언제인지 정확하지는 않지만 당신과 함께 걸었던 이곳 어느 제방의 안개가 먼저 떠오릅니다. 몽환과 같은 형태로 떠오르는 안개의 기억은 당신의 뒷모습처럼 뿌옇기만 합니다. 예전에도 지금처럼 참 많은 안개가 끼곤 했지요. 낯설지 않게 저를 맞아주던 안개가 마치 저를 반겨주는 듯한 느낌도 든 적이 있습니다.  

그렇지요. 기억이라는 것도, 그립다던가, 쓸쓸하다던가 하는 것들이 아무런 실체도 없는 거지요. 그래서 잡히지 않는 것들 때문에 우리는 가끔은 몸서리를 칠 때가 있지요. 당신의 일기장 하드커버에 푸른 색 글씨로 적어놓았던 어느 소설의 첫 장면은, 불현듯 당신을 생각할 때면 푸른빛이 맴도는 몽환적인 꿈에서 만난 적도 있지요.

“아침에 잠자리에서 일어나서 밖으로 나오면 밤사이에 진주해온 적군들처럼 안개가 무진을 삥 둘러싸고 있는 것이다. 무진을 둘러싸고 있던 산들도 안개에 의하여 보이지 않는 먼 곳으로 유배당해 버리고 없었다. 안개는 마치 이승에 한이 있어 매일 밤 찾아오는 여귀(女鬼)가 뿜어내놓은 입김과 같았다. 해가 떠오르고 바람이 바다 쪽에서 방향을 바꾸어 불어오기 전에는 사람들의 힘으로써는 그것을 헤쳐 버릴 수가 없었다. 손으로 잡을 수 없으면서도 그것은 뚜렷이 존재했고 사람들을 둘러쌌고 먼 곳에 있는 것으로부터 사람들을 떼어놓았다. 안개, 무진의 안개, 무진의 아침에 사람들이 만나는 안개, 사람들로 하여금 해를, 바람을 간절히 부르게 하는 무진의 안개, 그것이 무진의 명산물이 아닐 수 있을까!”
_ 김승옥, <무진 기행>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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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을 보는 두 가지 방법이 있습니다.

아주 자세히, 치밀하고 꼼꼼한 시선으로 들여다보아야 할 일들이 있는가하면, 폭넓은 시각으로 처음과 끝을 훑어보아야 할 일들도 있습니다. 미시적인 사유는 분석적인 사고를 키운다고들 하죠. 거시적인 생각의 틀을 갖추면 통찰력과 직관력을 높입니다. 당신에 대한 제 생각을 그리움이라고 부르든, 스쳐간 기억이라고 부르든 지나간 시간은 통찰력과 분석력 사이에 좌표를 찍고 언제나 제 비망록 안에 들어있었다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이런 생각을 하게 된 이유는 당신을 떠올려보는 제 삶의 좌표가 어디쯤 와있을까라는 생각에 미쳤을 때였습니다. 우리가 밥을 먹었던 식당이 놀랍게도 그대로 자리를 지키고 있었습니다. 시간이 지나면서 모든 게 다 낡고, 바뀌고, 자리를 옮겨가고는 했지만 놀랍게도 그 자리는 그대로 있었습니다. 좌표가 다를 뿐 당신은 지금 어느 곳에서 당신의 삶을 살고 있을 것입니다. 다만, 당신이 처음이라고 불러보는 어느 순간이 올 때, 제가 그 자리에 처음 웃으면서 만나던 그 모습대로 있기를 바랍니다.
우리 사이에 기다림은 이미 의미가 없는 단어가 되었지만 삶에도 좌표라는 게 있다면, 그 안쪽에 제가 있기를 바랍니다. 안개처럼 몽롱하고, 정류장처럼 스치듯 머물러있을지라도 그 시간을 버릴 수는 없듯이, 제 자리가 그 어딘가에 서성거리듯 찍혀 있기를 바랍니다. 다시 봄입니다. 건강하십시오.

글 | 오형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