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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문학카페] 세 가지 유형의 사람들

당신은 세상에 필요한 사람입니까?

그때 당신이 물었습니다.

“우린 어떤 사람일까? 삶에 좌표가 있다면 우리 어디쯤 와 있을까?”

여름이 막 시작되던 때라 후박나무에 물이 한껏 오르는지 개미들도 덩달아 바삐 움직이고 있었습니다. 2층 카페의 창가에서 바라보던 후박나무 푸른 그늘이 당신의 말간 이마에도 어느새 물들고 있었지요.  

그 여름은 참 더웠습니다. ‘특별한 사람이 어디 있을까’ 싶던 시절이었습니다. 기껏해야 외로움밖에 생각할 수 없던 시절이었지요. 제 안에 있는 마음의 감옥에 꽉 붙들려 아무것도 못할 것 같던 때였으니까요. 불현듯 당신은 세 가지 유형의 사람에 대해 말했습니다.

“세상에는 꼭 필요한 사람, 있으나마나한 사람, 결코 있어서는 안 될 사람. 이렇게 세 가지 유형이 있대. 생각해 봐. 이렇게 사람을 나눌 수 있는지. 그렇게 나누는 게 맞다면 우린 어떤 유형일까?” 

그 질문에 답을 할 수 없었지요. 한 번도 생각해보지 않았으니까요. 무엇보다 그런 질문을 하는 당신의 정신이 무척 단단해 보여서 함부로 답하고 싶지 않았습니다. 혹여 기대에 못 미치는 답을 해 실망감을 준다든가, 얼토당토않은 말로 저를 함부로 규정하기도 싫었으니까요. 그리고 지금, 시간이 꽤 많이 흘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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능력만으로 사람을 평가하는 게 정당한가

살아보니 당신의 그 질문은 참 유용한 것이었습니다. 세상이 요구하는 것은 능력과 필요성을 갖춘 사람이었습니다. 이력서 한 줄을 써도 ‘내가 당신들이 얼마나 필요로 하는 사람인줄 알아? 난 이런 능력을 갖췄단 말이야’라고 자랑할 줄 아는 사람이 ‘훌륭한’ 사람이기 때문이죠.  

반대로 ‘사람들을 위해서 이만큼 이타적이었고, 공평무사했으며 자기희생이라고 할 정도로 누군가를 사랑했다’고 누군가가 이력서에 써봐야 웃음거리밖에 안 되는 세상입니다. 그렇지만 한 사람의 진정성이 순진하거나 아직 뭘 모르는 미숙한 사람으로 치부되는 건 문제가 있지 않을까요. 자기희생적이고 공평무사한 사람이 세상에서 ‘있으나마나 한 사람’이 되어서는 안 되기 때문입니다. 혹시 그렇게 이력서를 쓰는 사람이 있다면, 그리고 제가 인사권자라면 저는 기꺼이 그 사람을 채용할 생각입니다. 자신의 삶을 기능과 필요로 먼저 요약하지 않는 사람이라면, 그의 이력서 뒷장에는 누구보다 많은 업무 능력과 사회적 힘이 있지 않을까요. 

모두들 ‘돈, 돈’ 하는 세상에 어쩔 수 없이 등 떠밀려 살고 있긴 하지만 조금이라도 비켜서서 ‘인간적’으로 살아보려고 애를 써봅니다. 생각만큼, 마음먹은 만큼 잘 되지는 않더군요. 사람들을 대하는 것도 참 쉽지 않습니다. ‘참 오래 만났구나’ 싶어 마음을 놓다가도 한 두 마디의 말이나 행동에 상처 주고, 상처 입는 일들을 겪다보면 불쑥불쑥 ‘어떻게 살아야 하는 건가’라는 생각이 들곤 합니다.  

밥을 먹다가도 울컥해지고, 후회가 얹히듯 밀려와 밥숟가락을 내려놓으면 끊었던 담배 생각이 나곤 합니다. 창가를 보다가도 문득 생각이 나고, 주문한 커피가 나오는 그 시간 동안에도 멍하니 그런 순간이 떠오르고, 아버지 눈을 뜨게 하려고 인당수에 몸을 던지는 심청이 얘기를 아이에게 읽어주다가도 어떻게 살아야하나 싶어 한숨도 나고, 어느덧 하얗게 새치가 올라오는 머리카락을 염색하느라 미용실 의자에 증명사진처럼 꽂혀 있을 때면 견디기 힘들 정도로 어떻게 사는 게 맞나 싶어 가슴이 먹먹해집니다.  

이번에는 제가 당신께 묻고 싶은 게 생겼습니다. 당신은 과연 어떤 사람이었는지, 지금은 어떤 사람으로 살고 있는지 말입니다. 누군가에게는 아무 것도 아닌 질문과 아무 가치도 없는 답을 사이에 두고, 당신과 저의 시간만 허망하게 흘러가고 말았습니다. 어떻게 사는 게 옳은 건지, 아직도 정답을 말할 수 없지만 참 아름다운 사람이라는 느낌을 주었던 이들이 생각납니다.  

한 사람은 18세기 조선을 살았던 소설 속의 인물입니다. 또 한 사람은 1997년 한국이 국제통화기금의 경제 위기 속에 있을 때, 우리의 농촌을 온몸으로 지켜낸 사람입니다. 제가 아는 두 사람 얘기를 들려드릴까 합니다. 먼저 말한 사람은 엄행수로 불렸으며 뒤의 사람은 황만근으로 불린 사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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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행수, 조선 후기 새로운 인물의 전형

조선 후기에 들면서 조선 사회는 변화의 바람이 불기 시작합니다. 엄격한 신분제를 유지하던 조선이 새로운 시대를 준비해야 하는 상황이 된 거죠. 중국 대륙의 주인이 명나라에서 청나라로 바뀌면서 변화는 시작됐습니다. 그 무렵 실학사상이라는, 새로운 시대가 요구하는 이데올로기가 태동기를 맞습니다.  

이때 조선 후기 소설가 박지원은 새로운 시대를 상징하는 인물을 한 명 창조하지요. 《연암집》의 <방경각외전>에 실려 있는 소설 <예덕선생전>에는 상당히 인상적인 인물이 등장합니다. 그 당시로서는 가히 혁명적이라고 할 수 있는 인물이었습니다. 대부분의 고전소설의 등장인물들이 뛰어난 능력과 아름다운 모습을 지닌 이른바 재자가인형(才子佳人型)인데 비해 박지원의 소설에 나오는 엄행수라는 사람은 천한 직업과 하층민의 신분이었죠. 잠깐 내용을 들여다보겠습니다. 

선귤자(실학자 이덕무의 호)라는 스승에게 벗이 한 명 있습니다. 그 벗의 이름은 엄행수입니다. 성이 엄씨이고, 똥오줌을 치우는 직업을 가진 하층민입니다. 행수(行首)라는 말은 막노동을 하는 늙은이를 일컫는 말입니다. 높은 덕망을 가진 스승에게 그런 천한 벗이 있다는 걸 참을 수 없었던 제자 자목이 어느 날 스승에게 “세속적인 방법으로 벗을 사귀는 것이 필요하다”고 따져 묻죠.
“스승님에게 가르침을 받고자 하는 양반들이 수두룩한데 선생님께서는 어째서 저런 천한 인간과 벗을 삼고 계십니까? 벗이란 동거하지 않는 아내요, 한 탯줄에서 나오지 않는 형제라고 가르치시지 않으셨습니까? 그렇게 소중한 벗인데 어찌해서 저런 자와 교분을 맺으시는지 이유를 알 수 없어 부끄럽기 짝이 없습니다. 하여 저는 스승의 곁을 떠나려 합니다.”
제자의 힐난에 선귤자가 대답하는 소설의 한 장면은 이렇습니다.
“잇속으로 사귀어서는 지속되기 어렵고, 아첨으로 사귀면 오래가지 못하는 것이 벗일세. 오직 마음으로 벗을 사귀며 인격으로 벗을 찾아야만 도덕과 의리의 벗으로 되네.” 

박지원은 제자 자목의 말을 통해 인간의 가치가 직업이나 신분으로 평가받는 당대를 우회적으로 비판한 것이죠. 한편으로는 엄행수라는 인물을 내세워 새로운 시대에 맞는 인물상을 제시합니다. 누구나 기피하는 똥을 저 나르는 전형적인 하층민을 선귤자는 가장 참된 은사로 생각합니다. 그래서 그를 예덕 선생이라고까지 칭하지요.  

예덕(穢德)은 더러움을 뜻하는 ‘예’자에 ‘덕’을 붙임으로써 엄행수야말로 더럽고 미천한 일을 하지만 가장 덕이 있는 존재임을 상기시킵니다. 그의 이름은 직분에 충실하고, 소박할 뿐만 아니라 검소하고 본분을 지키는 겸손한 사람이라는 뜻이지요. 선귤자는 비천한 엄행수와 교분을 나눔으로써 당대 양반을 대표하는 제자 자목에게 참다운 인간관계의 의미를 알려줍니다. 박지원은 이 소설을 통해 당시의 모순과 위선을 꼬집으며 새로운 시대에 어울리는 자유노동계층의 한 인물을 그려내고 있습니다. 

황만근의 삶이 보여준 아름다운 인간상

작가 성석제는 <황만근은 이렇게 말했다>에서 마을사람들에게 ‘반푼이’로 취급받지만 결코 바보가 아닌 황만근이라는 유니크한 인물을 만들어 냅니다. IMF 외환위기를 겪던 1997년쯤의 농촌을 배경으로 한 이 소설은 이기적인 현대인에 대한 풍자와 함께 암울해져 가는 농촌의 인심을 그리고 있습니다.  

마을 사람들은 황만근을 ‘만그이’로 부릅니다. 나이와 상관없지요. 심지어는 아이들마저 황만근을 ‘만그이’로 부릅니다. 예전부터 그는 바보로 불렸기 때문이지요. 평소에는 있는 듯 없는 듯 취급 받지만 마을에 궂은일이 생기면 그의 존재감은 확연히 드러납니다. 그 궂은일이란 게 마을의 분뇨(똥오줌)을 치우는 것과 같이 누구나 싫어하는 일입니다. 누구도 하기 싫어하는 일이 생기면 사람들은 황만근을 찾습니다. 평소에는 ‘있으나마나 한 사람’이었던 황만근이 사람들이 싫어하는 일이 생길 때면 ‘꼭 필요한 사람’이 되는 겁니다. 그는 그렇게 이타적이고 자기희생적으로 살다 그 우직함 때문에 결국 죽고 맙니다. 

인정이 넘칠 것만 같은 우리의 농촌이 물질중심주의적으로 바뀌어 가는 세태에도 황만근은 개의치 않고 자신의 일만 묵묵히 합니다. 우직하다 못해 거의 바보수준입니다. 남들의 비웃음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그는 자신의 일을 해나갑니다. 누구나 싫어하는 일을 불평은커녕, 싱글싱글 웃어가며 묵묵히 해내는 그의 인간미는 어디서 온 것일까요.

작가는 소설의 후반부에서 논평 형식의 묘비명을 통해 하늘과 땅이 낸 사람이라고 평가합니다. 황만근의 마지막 대사는 그의 넉넉하면서도 여유 있는 삶의 태도를 드러냅니다.
“내가 왜 빚을 안 졌니야고. 아무도 나한테 빚 준다고 안캐. 바보라고 아무도 보증서라는 이야기도 안했다. 나는 내 짓고 싶은 대로 농사지민서 안 망하고 백 년을 살끼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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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질을 소비하듯, 사람을 소비하는 사회

엄행수의 삶이나 황만근의 행적은 화려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보는 시각에 따라서는 그 시대에 꼭 필요한 사람이 아니었을까요. 보기에 천한 일도 어떤 가치관에 따라 평가하느냐에 의해 달라질 수 있습니다.  

아름다운 사람은 누구의 필요에 의해 규정되는 건 아닙니다. 시대에 따라 필요와 능력의 잣대는 달라지겠지만 아름다운 사람의 됨됨이는 예나 지금이나 한결같은 것이겠지요. 물질을 소비하듯 사람과 사람의 가치를 소비하는 요즈음, 한번쯤 스스로에게 물어볼 필요가 있을 듯합니다.

 

글 | 오형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