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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문학카페] ‘신영복 ‘글 집’을 읽는 세 가지 카테고리

삶의 파토스, 윤리적 에토스, 이성의 로고스

물 한 모금으로 목을 축이더니 인부는 노란색 수건을 다시 목에 두릅니다. 꽤나 멀리 떨어진 거리이지만 수건에 맺혀있는 땀내가 달구어진 땅보다도 뜨겁게 느껴집니다. 60평쯤 되는 신축건물을 짓고 있는 공사장에서 한여름이 보여준 것은 건물이 올라가는 과정이었고, 인부들의 거침없는 노동이었지만 실은 어떤 기억을 투명한 햇살에 드러내 보인 건 아닌가 싶은 생각이 듭니다. 저 집이 완성되면 인부들은 떠나겠지만 누군가는 섭씨 30도의 공기보다 더 팽팽한 인부들의 팔뚝이 만들어준 집에 거주하며 안온한 휴식을 가질 겁니다. 거푸집을 만드는 일정이 끝나면 적절한 배합을 마친 콘크리트가 거푸집을 채우려 쏟아지겠지요. 
 

새 집을 짓는 공사 현장을 보며 인문학적 향기가 짙게 밴 글들을 연상하는 것은 좋은 글을 읽고 난 직후이기 때문입니다. 좋은 글들은 좋은 집이 그렇듯, 생각의 그늘이 되고 육체의 안식이 됩니다. 거푸집으로 콘크리트가 채워지듯이, 반듯하게 굳어가면서도 세상을 유연하게 바라볼 수 있도록 사고의 확장을 경험하게 했던 신영복 작가의 몇 편의 글들을 다시 읽어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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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리적 사유와 따뜻한 시선

신영복 작가(1941~2016)는 반공주의가 시대의 이데올로기였던 1968년 ‘통일혁명당’ 사건에 연루되어 무기징역을 선고받았습니다. 정확히 20년 20일을 복역한 후 1988년 가석방된 작가는 경제학자, 교수 등 여러 방면으로 사회 활동을 펼칩니다. 특히 수감 중 지인들에게 보낸 글들을 모아 《감옥으로부터의 사색》(1988)을 처음 출간한 이후 활발한 저작활동을 합니다. 여러 호칭을 쓸 수 있겠지만, 신영복 작가라는 말이 자연스럽게 느껴집니다. 작가가 쓴 세 편의 에세이를 다시 읽으며 좋은 글에는 논리와 사유가 교차하면서도 사람들의 삶의 비애를 감싸는 따뜻함이 있다는 점을 새삼 느낍니다. 
 

그리스 철학자 아리스토텔레스는 사람을 설득하는 데 필요한 요소로 세 가지를 언급했습니다. 의사소통 과정에서 타자와의 관계를 통한 설득이 이루어지기 위해 효과적인 진술 방식이 필요하다는 것이지요. 그 세 가지는 파토스(Pathos), 로고스(Logos), 에토스(Ethos)를 말합니다. 의사소통 과정에서 적절하게 이 요소들을 갖출 때 효과적인 소통과 설득이 가능하다는 게 그의 설명입니다. 
 

파토스는 흔히 페이소스라고 부르기도 하는 말이죠. 인간의 삶에서 비애와 연민, 슬픔의 감정은 타인을 이해하는 데 중요하게 작동하는 부분입니다. 
에토스는 발화자의 고유한 성품과 인격을 의미합니다. 가장 주관적인 요소이지만 아리스토텔레스는 이 부분이 가장 중요하다고 강조한 바가 있습니다. 설득의 과정에서 발화자의 인격이 무엇보다 중요하다는 의미로 이해됩니다. 
끝으로 로고스는 이성적이고 논리적인 영역을 말합니다. 파토스가 직관적인 부분과 연결된다면 로고스는 냉정하고 이성적인 정신작용을 말합니다. 


신영복 작가의 글을 이 세 가지 키워드로 접근해보는 것이 호사가의 얄팍한 호기심일 수도 있겠지요. 그러나 좋은 글을 함께 읽어본다는 점에서는 그다지 비난받을 일만은 아닐 수도 있습니다. 좋은 집은 그 공간을 꾸미고 가꾸는 사람들의 노력으로 더 아름다워 질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인간에 대한 사랑, 파토스

사임당의 고아한 화조도(花鳥圖)에서는 단 한 점도 발견할 수 없었던 봉건적 질곡의 흔적이 난설헌의 차가운 시비(詩碑) 곳곳에 점철되어 있었습니다. 개인의 진실이 그대로 역사의 진실이 될 수는 없습니다. 자연마저 인공적으로 만들어 놓음으로써 대리 현실을 창조하는 문화 속에서 우리가 역사를 제대로 만날 수 있기는 갈수록 더욱 어렵다고 생각합니다.(중략)
그러나 그렇기 때문에 당신은 지월리로 오시기 바랍니다. 어린 남매의 무덤 앞에 냉수 떠 놓고 소지 올려 넋을 부르며 “밤마다 사이좋게 손잡고 놀아라.”라고 당부하던 허초희(허난설헌)의 음성이 시비에 각인되어 있습니다. 완전히 새로운 감수성과 시대가 선포되고 과거와 함께 현재의 모순까지 묻혀 가는 오늘의 현실에 맞서서 진정한 인간적 고뇌를 형상화하는 작업보다 우리를 힘 있게 지탱해주는 가치는 없다고 믿습니다.
중부고속도로를 질주하는 자동차의 소음이 쉴 새 없이 귓전을 할퀴고 지나가는 가파른 언덕에 지금은 그녀가 그토록 가슴 아파했던 두 아이의 무덤을 옆에서 지키고 있습니다. 정승 아들을 옆에 거두지도 못하고, 남편과 함께 묻히지도 못한 채 자욱한 아침 안개 속에 앉아 있습니다. 열락(悅樂)은 그 기쁨을 타 버린 재로 남기고 비극은 그 아픔을 정직한 진실로 이끌어 준다던 당신의 약속을 당신은 이곳 지월리에서 지켜야 합니다.
_ <비극은 그 아픔을 정직한 진실로 이끌어 줍니다> 중


이 글은 강원도 명주군 사천리에 있는 애일당(愛日堂) 옛터를 다녀온 작가의 경험을 바탕으로 역사적 진실과 올바른 평가가 어떠해야 하는지를 독자들에게 묻고 있는 글입니다. 글쓴이의 기행 수필집 《나무야 나무야》(1996)에 실려 있으며, ‘당신’이라는 독자를 설정하여 서간문의 문체로 내용을 전개하고 있습니다. 글쓴이는 허균, 신사임당과 율곡 이이, 허난설헌 등 역사적 인물과 관련된 유적을 탐방하고 이들에 대한 글쓴이 개인의 평가를 드러냅니다. 그리고 오늘날의 시점에서 주목해야 할 삶의 모습이 무엇인지를 성찰합니다. 성찰의 배경이 되는 현대 사회의 모순을 자연스럽게 일깨워주면서 경쟁을 통한 성취와 쾌락을 추구하는 현대인들의 사고방식을 비판적으로 들여다봅니다. 글의 말미에는 진정한 인간적 고뇌에 주목함으로써 시대의 모순에 맞서는 일에 동참할 것을 독자들에게 권하고 있습니다. 

작가는 봉건적 시대 질서가 추구하는 가치를 실현해 제도권 역사의 평가에서 정점에 오른 신사임당과 그의 아들 이이의 삶을 떠올립니다. 동시에 자유분방했지만 시대의 한계에 도전했던 허균과, 불행한 질곡의 삶을 살았던 난설헌 허초희의 삶을 대비적으로 바라봅니다. 

‘시대의 모순을 비켜 간 사람들이 화려하게 각광받고 있는 우리의 현재’에 대해 반성적 성찰이 필요하다고 작가는 독자에게 묻습니다. 시대의 모순을 온몸으로 경험한 작가의 물음은 독자들의 비애감을 증폭시킵니다. 작가의 삶이 억울하다거나 잘못된 법의 판단을 묻는 것이 아닙니다. 


가석방 후에 작가가 글과 강연을 통해 전한 일관된 메시지는 소외된 존재에 대한 관심과 사랑입니다. 자기 삶의 이력을 증거로 작가는 독자들에게 묻는 겁니다. 한 시대의 질서에 가장 잘 부합해 세속적으로 성공한 인물 못지않게 시대와의 불화로 고통에 빠진 사람들의 아픔을 어루만져야 한다고 말입니다. 이 시대의 ‘허균’과 ‘허난설헌’은 지금도 어느 곳에서 어깨보다 무거운 눈물의 무게를 견디지 못해 엎드린 채 울고 있을지도 모를 일이니까요. 삶의 페이소스는 결국 인간에 대한 사랑입니다.

인간 정신의 발현, 에토스

나는 폐허가 되어 있는 콜로세움을 돌아보는 동안 이곳에서 혈투를 벌이다 죽어 간 검투사들의 환영이 떠올라 극도로 침울한 마음이 되었습니다. 더욱 암울한 것은 스탠드를 가득 메운 50,000 관중의 환호 소리입니다. 빵과 서커스와 혈투에 열광하던 이 거대한 공간을 우리는 어떤 이름으로 불러야 할지 막막합니다. 내게는 여민락(與民樂)의 광장이 아니라 우민(愚民)의 광장으로 다가왔습니다. 

“콜로세움이 멸망할 때 로마도 멸망하며 세계도 멸망한다.”라고 하는 말이 콜로세움의 위용을 찬탄하는 명구로 회자되지만 내게는 콜로세움이 건설될 때 로마는 무너지기 시작했다는 의미로 읽힙니다. “로마는 게르만 인이나 한니발에 의해서가 아니라 자기 자신의 힘 때문에 무너지리라.”라고 했던 호라티우스의 시구가 떠올랐습니다. 어떠한 제국이든 어떠한 문명이든 그것이 무너지는 것은 그것을 떠받치고 있는 하부가 무너짐으로써 붕괴되는 것입니다.
_ 〈우리들에게는 우리를 잠재우는 거대한 콜로세움은 없는가〉 중

 

역사 인식의 통념 중의 하나가 ‘역사는 승리한 자의 것’이라는 점입니다. 이런 통념은 때때로 이면에 감춰진 역사의 진실을 바로 보지 못하게 방해할 때가 있습니다. 이면을 보는 눈은 암기와 시험 점수로 갖춰지는 것이 아닙니다. 창의적인 독서와 비판적 사고가 바탕이 될 때, 진실을 볼 수 있는 새로운 시각을 갖출 수 있습니다. 

이때 필요한 기준이 윤리성입니다. 로마로 당당하게 입성하는 개선장군의 번쩍 든 칼날만 볼 것이 아니라 수많은 사람들을 짓밟았던 말발굽을 들여다볼 줄 알 때 인식의 에토스는 눈을 뜹니다. 탐욕의 역사는 언제인가는 무너질 것입니다. 에토스는 행동 규범을 넘어서는 인간 정신의 발현이기도 하기 때문입니다. 

본질을 파헤치는 로고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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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다는 가장 낮은 물이고 평화로운 물이지만 이제부터는 하늘로 오르는 도약의 출발점입니다. 자신의 의지와 자신의 목표를 회복하고 청천 하늘의 흰 구름으로 승화하는 평화의 세계입니다. 방법으로서의 평화가 아니라 최후의 목표로서의 평화입니다. 평화는 평등과 조화이며 평등과 조화는 갇혀 있는 우리의 이성과 역량을 해방해 겨레의 자존(自尊)을 지키고 진정한 삶의 가치를 깨닫게 함으로써 자기(自己)의 이유(理由)로 걸어갈 수 있게 하는 자유(自由) 그 자체입니다. 

나는 당신이 언젠가 이곳에 서서 강물의 끝과 바다의 시작을 바라보기 바랍니다. 그리고 당신이 받은 색종이에 담긴 바다의 이야기를 읽어 주기 바랍니다. 그동안 우리 국토와 역사의 뒤안길을 걸어왔던 나의 작은 발길도 생각하면 바다로 향하는 강물의 여정이었는지도 모릅니다. 나는 마지막 엽서를 당신이 내게 띄울 몫으로 이곳에 남겨 두고 떠납니다. 강물이 바다에게 띄우는 이야기를 듣고 싶기 때문입니다.
_ <칠산리의 강과 바다> 중

 

작은 샘터에서 시작된 물방울의 여정은 시내를 거쳐 강물에 닿아 물길이 됩니다. 그리고 물길은 바다에 닿아 마침내 대장정의 막을 내립니다. 바다로 나가는 물길의 과정을 민족의 자존을 세우고 역사의 상처를 치유하는 과정이라고 논리적으로 역설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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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삼독(書三讀)이라는 말을 처음 들었을 때가 떠오릅니다. 책은 반드시 세 번 읽어야 한다고 작가는 말했습니다. 먼저 텍스트를 읽고 다음으로 그 필자를 읽고 그리고 최종적으로는 그것을 읽고 있는 독자 자신을 읽어야 한다고 합니다. 제가 이 글을 몇 번씩 읽으면서 가졌던 생각은 글이라는 텍스트를 어느 순간에 읽느냐에 따라 글의 의미를 다르게 받아들일 수 있다는 사실입니다. 

 

‘석과불식(碩果不食)’은 신영복 작가가 20년의 수감 생활을 견디게 해준 희망의 언어라고 합니다. ‘씨 과실은 먹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흔히 까치밥이라고 하기도 하죠. 이 말에 작가의 세계관과 가치관이 들어 있습니다. 신영복 작가는 석과불식이 우리에게 주는 교훈을 엽락(葉落), 체로(體露), 분본(糞本)의 세 가지로 구분한 적이 있지요. 

엽락은 잎이 떨어지는 것을 말합니다. 현실을 냉정하게 직시하고 환상과 거품을 거두어내는 행위입니다. 무지몽매와 잘못된 신념과 아집을 청산할 때 필요한 이성적 로고스입니다. 

체로는 엽락 후의 나목(裸木) 상태를 말합니다. 환상과 거품으로 가려져 있던 우리의 삶과 사회의 근본 구조를 바꾸는 것을 말하죠. 윤리적 에토스가 올바르게 작동할 때 삶은 정직해질 수 있습니다. 
분본은 뿌리에 거름을 주는 것을 의미합니다. 뿌리, 즉 사람을 거름 주어 길러내고 키우는 것입니다. 낙엽이 뿌리를 덮어주듯이 사람을 연민할 수 있는 따뜻한 인간애가 파토스(페이소스)의 근본입니다. 비애는 결코 부정적 감정이 아닙니다. 사랑이 채 미치지 못해 안타까워하는 마음이 비애이며 연민입니다. 

 

이렇듯 아름다운 ‘글 집’을 짓고 그는 떠났습니다. 훌륭한 목수는 제 집에 살지 않는 법입니다. 다른 이들이 사는 것입니다. 그는 목수였으며 연금술사였습니다. 작가의 글이 시간이 지날수록 더욱 생생해집니다. 

글 | 오형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