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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9시의 커피] ‘안녕, 리버 피닉스!’

영원을 바라며 건네는 ‘피닉스 커피’

카페 <밤9시의 커피>가 문을 닫고, 조용히 하루를 마감하는 시간. 홀로 커피 한 잔을 마시며, 며칠 뒤 기일을 맞을 한 사람을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고요는 속보로 여지없이 깨졌습니다. 이태원에서 핼러윈을 앞두고 참담한 광경이 펼쳐졌습니다. 서울 한복판에서 거리를 걷던 150명 이상의 사람이 압사당했습니다. 군중 압착으로 인한 질식사였습니다. 그 아비규환에서 가까스로 살아남은 생존자들도 트라우마에 노출됐습니다.
참담한 와중에 뉴스 등 각종 콘텐츠를 통해 다시 확인했습니다. 미리 막을 수 있었습니다. 관리 부재가 부른 대참사였습니다. 공권력은 시민 아닌 권력자 안위에 매달렸습니다. 국가 안전관리시스템은 이번에도 없었습니다. 참사 책임을 시민에게 떠넘기려는 ‘2차 참사’도 일어나고 있습니다. 세월호에 이어 국가의 ‘존재 이유’를 되묻는 비극이 여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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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버 피닉스의 짧은 청춘, 그리고 <아이다호> 

<밤9시의 커피>는 국가 애도 기간에 매장을 찾은 모든 생존자에게 커피를 건넸습니다. 우리는 운 좋은 생존자였습니다. 그날 우연히 이태원에 가지 않아서, 혹은 갔어도 그 시간대 그곳에 있지 않았기에 살아남을 수 있었습니다. 커피에는 추모와 애도의 의미를 담았습니다. 희생자든 생존자든, 영혼만큼은 영생불사을 얻길 바랐습니다. 그래서 ‘피닉스 커피’라고 이름 붙였습니다. 1990년대를 관통한 당신이라면, 알만한 이름입니다.  

이 참사가 발생하기 전까지 <밤9시의커피>에서 시월의 마지막은 늘 리버 피닉스(River Phoenix)’ 차지였습니다. 어느 노래처럼 “뜻 모를 이야기만 남긴 채 헤어졌”다는 그날, 젊은 날의 저를 매혹한 한 청춘의 끝이 아로새겨졌습니다. 영화배우 리버 피닉스는 1980년대와 1990년대 미국 할리우드를 주름잡던 청춘의 이름이었습니다. 그를 떠올리면 가장 먼저 생각나는 문장이 있습니다. “우리가 정원의 꽃 중에서 가장 아름다운 꽃을 꺾어 꽃병에 꽂듯이 하늘도 가장 아름다운 인간을 먼저 꺾어 천국을 장식한다.” 하늘이 리버 피닉스라는 청춘을 지상에서 훌쩍 떼어낸 이유라고 여기고 싶었습니다.  

1993년 10월 31일, 핼러윈이었습니다. ‘유목민의 아들’로 세상에 등록했던 리버는 핼러윈 파티를 핑계로 들썩거리던 LA의 선셋대로에서 영원한 잠을 청했습니다. 동생 호아킨 피닉스(네, 바로 그 배우)가 긴급하게 911을 호출했지만 잠을 깨울 수 없었습니다. 스물셋. 약물 중독이었습니다. 누구도 예상치 못한 청춘의 끝이었습니다. 길의 감식자(鑑識者)였던 그는 아이러니하게 길 위에서 파르라니 떨면서 구름의 저편으로 향했습니다.  

매년 시월 말, 스물셋에서 영원한 청춘으로 남은 리버를 기렸습니다. 어떤 청춘은 천재라는 이름으로, 신화라는 명목으로 하늘의 이른 부름을 받습니다. 영원히 아름다운 모습으로 박제됩니다. 리버도 그랬습니다. 시작인 줄 알았던 청춘은, 어느 날 끝을 선언했습니다. 그를 사랑했던 사람들에게 영원히 기억되기 위한 선언이었을까요. 리버는, 영화를 통해서든 실제 삶에서든 청춘의 아픔이 고스란히 투영됐다는 점에서, 청춘의 아이콘이자 자화상이었습니다. 청춘 예찬이 아닌 그 맞은편에 둥지를 튼 아이콘이었습니다. 리버에겐 삶과 죽음은 이항 대립이 아닌 자웅동체의 구조물이었을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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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 면에서 영화 <아이다호>(My Own Private Idaho)는 리버를 담은 다큐멘터리와 같은 극영화입니다. 리버 의 인생을 그대로 옮긴 건 아니지만, 죽음 이후 그를 대표하는 영화가 됐습니다. 혹자는 이 영화를 보려면 큰 용기가 필요하다고 했습니다. ‘툭하면 쓰러져 둥지에서 떨어진 새처럼 길 위에서 떠는 영화 속 그의 모습이 차가운 보도블록 위에 뒹구는 그의 최후와 포개지기 때문’이라고요. 

짧은 시간 태엽처럼 휘감아 돌던 청춘의 흔적이 강렬하게 와 닿는 이유는 명백합니다. 요절했기 때문입니다. 요절이 아프고 안타깝게 다가오는 건, 더 이상 알 수 없는 미래와 가능성 때문입니다. 리버는 당시 할리우드에서 가장 촉망받는 젊은 배우였습니다. 살았다면 얼마나 좋은 필모그래피를 남겼을지, 사회에 어떤 영향력을 끼쳤을지 모릅니다. 사회 활동도 활발했습니다. ‘채식주의자 제임스 딘’으로 묘사되기도 했던 그는 동물권 권리보호와 환경보호, 정치운동 등에 힘썼습니다. 각종 환경단체와 인권단체에 기부도 많이 했습니다.  

이태원 참사 희생자 중에도 20대가 가장 많았습니다. 많은 사람이 안타까움을 표했습니다. 그들 앞에 펼쳐져야 할 미래와 가능성이 막혔기 때문입니다. 물론 이태원 참사 희생자들은 공권력 부재와 관리 부실로 인한 사회적 타살이라는 점에서 더욱 가슴이 아픕니다.  

‘불멸의 청춘’을 향한 의도된 이름? 

리버를 처음 만난 영화는 <인디아나 존스3 : 최후의 성전>(1989)이었습니다. 인디아나 존스(해리슨 포드 분)의 어린 시절로 나왔습니다. 그리고 <스니커즈>에서 재기발랄한 청년으로 나온 그를 만났습니다. 그때만 해도 아름다운 눈빛과 금발로 이어진 선 고운 외모가 인상적이었던 배우 그 이상은 아니었습니다. 그러다, <아이다호>(1991)가 왔습니다. 절친 키아누 리브스와 함께 출연한 이 영화를 통해 리버는 강렬하게 각인됐습니다. 이 영화에서 있는 힘껏 안아 주고픈 마이크로 분했던 리버였습니다. 영화에서 맞닥뜨린 죽음이 현실에서도 재현되자, 이 영화는 리버 그 자체가 됐습니다.  

리버는 독특한 체취를 풍겼습니다. 여느 할리우드 청춘 배우들과 달랐습니다. 마치 게토에 머물렀던 청춘 같았습니다. 할리우드라는 거대 울타리 안에서도 리버는 위태로운 외줄타기를 하는 것 같았습니다. 맞지 않는 옷 같았지만, 할리우드는 그런 리버의 이미지를 충분히 활용하고 있었습니다. 그는 앞선 청춘들의 집합체 같았습니다. 랭보의 <지옥에서의 한 철>, 제임스 딘의 <에덴의 동쪽>, 짐 모리슨의 <The End>를 섞어놓은 듯했습니다. 그런 와중에 날아든 리버의 부고였습니다. 죽지 않는 불멸의 새, ‘피닉스(Phoenix)’라는 이름은 아이러니였을까요. 아니면 그의 청춘을 불멸의 것으로 명명하기 위한 의도된 작명이었을까요. 

저는 후자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피닉스는 아라비아 사막에서 500∼600년마다 스스로 향나무를 쌓아 올려 불길을 붙여 죽은 뒤 잿더미 속에서 다시 살아나는 영조(靈鳥)입니다. 리버는 탐욕과 권모술수가 판치는 할리우드에서 차곡차곡 향나무를 쌓아 올린 것은 아니었을지. 히피와 같은 삶을 살았던 자유로운 영혼이 자본과 탐욕의 경계 안으로 몰렸던 것이죠. 늘 통제받고 때론 자본에 휘둘리면서 그는 약물로 괴로움을 잊고 싶었습니다. 그리고 불사(不死)의 길을 선택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리버 피닉스는 그 이름처럼 강과 같은 자유를 얻은 불사조가 되었습니다.

아니, 어쩌면 ‘미이라 콤플렉스’에 시달렸는지도 모릅니다. 미이라처럼 사후에도 영원히 감정을 박제하고픈 욕망을 가졌던 것은 아닐까요. 청춘이 어떠했든, 그 시절을 봉인해야 청춘의 가치를 지킬 수 있다고 봤다면? 아니면, 동서고금을 통틀어 언제나 예찬하는 청춘을 지키기 위해, 리버는 자신만의 선택을 감행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청춘은 지나고 나면 박제하고픈 가상현실로 남기도 합니다. 물론 누군가에겐 다시는 떠올리고 싶지 않은 시절일 수도 있지요. 어떤 청춘이든 영원히 버릴 수 없고, 지울 수 없는 그림자가 우리네 청춘입니다. 

리버 피닉스에 더해진 ‘이태원의 꽃들’  

거대한 참사 앞에 <밤9시의 커피>가 할 수 있는 건, 커피를 건네며 마음을 나누는 일이었습니다. 작지만, 할 수 있는 것을 하고 싶었습니다. 커피와 마음을 나누면서 느슨한 느낌의 공동체가 된 것 같은 느낌을 받았습니다. 누군가는 울었고, 누군가는 국가 없는 세상에 분노했습니다. 누군가는 함께 묵상할 것을 청했습니다. 그 모든 것이 애도였습니다. 우리가 할 수 있고, 해야 하는 길이었습니다. 

<아이다호>에서 마이크(리버)는 영원한 마음의 고향을 찾아 헤맵니다. 세상에 버림받았던 그는 끝이 없을 것 같은 2차선 길 위에서 방황합니다. 청춘은 마치 그러해야 하는 듯 말입니다. ‘그 길을 간 적이 있음에도’ ‘엔진을 끄지 말아야 했음에도’ ‘일그러져 보이는 그 길을’, 리버는 거닙니다. 그리고 죽음 같은 몽환 속으로 빠져듭니다.

“평생 길을 맛볼 거야. 이 길은 끝이 없어. 지구의 어디라도 갈 수 있어...” 마이크의 속삭임은 리버가 길의 감식자이자 청춘의 감식자라는 사실을 보여줍니다. 영원히 보고 싶고 그리운 생의 감식자입니다. 

가을이 겨울을 넘보는 문턱이 되면, 늘 찾아왔던 청춘의 얼굴이 그였습니다. 시월의 마지막을 장식했습니다. 이런 말을 건네줄 것도 같았습니다. “안녕? 나와 함께 아이다호로 가주지 않겠니?”
하지만 그가 피닉스처럼 나타나길 바라지는 않습니다. 박제된 청춘 그대로 가슴 속에 살아 숨 쉬길 바랐습니다. 다시 태어나도 같은 굴레에 있다면 그 신비감을 유지한 상태가 좋다고 생각했습니다. 사람의 있을 곳이란, 그렇게 누군가의 가슴 속밖에 없습니다. 누구에게나 청춘은 시간과 함께 소멸할 것이지만 가슴에 영원한 청춘으로 머물 수 있는 존재가 있다면 그것으로 충분했습니다. 그것이 <밤9시의 커피>가 매년 시월의 마지막 날에 피닉스 커피를 제공했던 이유였습니다. ‘안녕, 리버 피닉스!’라는 문구와 함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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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내년부터는 어떻게 될지 모르겠습니다. 예년과 마찬가지로 피닉스 커피를 줄지, 또 다른 방식으로 참사를 기억하는 추도를 할지 아직은 알 수 없습니다. 이태원 참사의 모든 희생자는 나이에 상관없이 꽃 같은 청춘입니다. 시들 것을 알지만 기어이 피고 마는 꽃이라고 생각하고 싶습니다. 매년 그렇게 피어나서 공동체의 안전을 지켜주는 꽃말입니다. 핼러윈 즈음이면 찾아왔던 리버 피닉스에 또 하나의 꽃이 추가되었습니다.  

(※ 이태원 참사 희생자의 명복을 빕니다. 아울러 당시 현장에 있었던 생존자들의 트라우마가 치유되길 기원합니다.)

글 | 낭만(김이준수)
낭만 님은 미국 옥션 전문 인터넷매체 <옥션데일리>의 한국 디렉터를 맡고 있습니다. ‘행복하고 아름다운 세계는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멋대로 만들어내는 것’이라는 말을 현실화하고자 천천히 걷고 있습니다. 《마을을 상상하는 20가지 방법》을 썼고, 《그림자아이가 울고 있다》의 스토리텔링을 맡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