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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문학카페] 예술이 추구하는 4가지 미(美) 의식

헤겔과 니체가 만난다면 무슨 얘기를 나눌까?

[인문학카페] 예술이 추구하는 4가지 미(美) 의식.

머리숱이 빠져 듬성듬성한 백발의 한 노인 앞에 젊은 청년이 서 있습니다. 완고한 성격을 드러내듯 약간의 굽은 콧날을 지닌 노인은 청년의 앞으로 한 발짝 더 가까이 다가섰습니다.
“독일 최고의 문학가인 괴테도 초기 문학 작품들의 세계관은 미숙하기 짝이 없었네. 미학적으로 완성되었거나 세련되었다고 할 수도 없지. 지적으로는 성숙하지 못했던 탓이야. 괴테는 노년기에 들어서야 비로소 지성적 통찰을 예술미로 끌어올릴 수 있었지.” 

어떤 작업을 하다 온 듯 보이는 청년은 들고 있던 묵직한 물건을 책상 위로 올려놓습니다. 망치였습니다. 아무리 견고해 보이는 것이라도 금세 부서뜨릴 수 있을 것 같은 강철로 된 쇠망치. 청년은 진지한 표정으로 노인에게 다그치듯 되묻습니다.
“지금 말씀대로라면 선생님께서는 모순된 이야기를 하신 게 됩니다. 평소 주장하신 기본 논증 방법을 적용하면 이론적으로는 철학의 하위 개념이라고 얘기하신 예술이 지성적 통찰을 가질 수도 있다는 말씀이니까요. 외면성을 특징으로 하는 예술이 내면성을 바탕으로 하는 절대정신인 철학의 경지까지 오를 수 있다는 거 아닌가요? 선생님께서 말씀하신 변증법의 이론이 현실에서는 맞지 않는다는 걸 스스로 인정하신 겁니다.” 

근대와 현대의 교차로에 서 있는 두 현자

철학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두 인물이 만났다고 가정해보죠. 상상으로 구성한 이 장면이 이루어진다면 그들은 아마 이런 대화를 나누지 않을까 싶네요. 허구이기는 하지만 이런 상황이 실제 일어난다면 참 흥분되는 일이기도 합니다.
이미 고인이 된 두 사람이 한자리에 모이면 그들은 무슨 이야기를 나눌지에 대한 호기심에서 비롯되었지만 이 장면은 철학사에서 매우 의미 있는 만남입니다. 생몰 연도가 달라 한자리에 함께 할 수 없지만 그들의 학문적 업적을 생각해 보면 두 사람이 만나는 상황만으로도 ‘역사’가 될 수 있을 것입니다. 물론 이런 가정과 상상은 아주 주관적일 수 있으므로 반박의 가능성도 열어 두어야 합니다. 반증이야말로 철학의 핵심이라고 주장한 사람이 이 장면에 등장하기 때문이죠.  

노인은 근대 철학을 완성했다고 일컬어지는 헤겔(Georg Wilhelm Friedrich Hegel : 1770 -1831)이고, 젊은 청년은 현대 철학의 시작을 알린 니체(Friedrich Wilhelm Nietzsche : 1844-1900)입니다. 쇠망치를 들고 있는 상황을 설정한 것은 근대 철학의 성과를 부정하면서 현대 철학의 출발점을 알린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중고생들이 가볍게 읽는 대중적 철학서 표지에서 망치를 들고 있는 이가 바로 니체입니다. 근대 철학의 결과물을 비판적으로 수용하려 했던 니체의 철학적 경향을 상징하는 물건이 망치인 셈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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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겔과 니체

‘정-반-합’의 발전 지향 이론

변증법은 근대 철학을 완성했다고 평가받는 헤겔의 업적입니다. 변증법은 ‘정립–반정립–종합’의 논리 구조를 일컫는 말입니다. ‘정반합’으로 통칭되는 철학사의 대표적인 논증이죠. 변증법에서 정립과 반정립에 대응하는 위상은 단순히 대립적인 두 범주를 의미하지는 않습니다. 궁극적으로는 조화로운 통일을 이루어 가는 수렴적 상향성을 특징으로 하죠.

예를 하나 들어볼까요. 인류의 생산양식을 결정하는 경제 체제에는 자본주의와 사회주의라는 두 방식이 있습니다. 변증법에 의하면 자본주의와 사회주의 체제는 단순한 대립적 개념만은 아닙니다. 이 대립을 넘어서 좀 더 발전적인 방향으로 나갈 수 있다고 보는 거죠. 그 결과가 수정자본주의 체제인 복지국가 형태라고 할 수 있습니다. 자본주의를 정(正), 사회주의를 반(反)이라고 보면 수정자본주의가 합(合)이 되는 거죠. 두 체제의 대립이 발전 지향적 측면에서 종합되는 것이죠.  

궁극적으로 근대는 발전의 시대였습니다. 그리고 그 시대에 철학계를 대표했던 헤겔은 발전론자입니다. 그에게 역사는 정체되어있는 것이 아니라 발전을 향하는 유기체입니다. 역사는 ‘정반합’이라는 수레바퀴에 실려 언제나 더 나아지기를 지향하는 생물이죠.  

절대정신의 세 형태, 예술·종교·철학

변증법의 논증을 밝히는 과정에서 헤겔이 파악한 인간의 최고 지성은 세 가지가 있습니다. 예술과 종교, 철학입니다. 미학의 대상인 예술은 종교, 철학과 마찬가지로 ‘절대정신’의 한 형태입니다. 절대정신은 절대적 진리인 ‘이념’을 인식하는 인간 정신의 영역을 가리킵니다. 그리고 절대정신의 세 형태, 즉 예술, 종교, 철학에 각각 대응하는 인식적 형식은 직관, 표상, 사유입니다. 직관에 의한 예술은 주어진 물질적 대상을 감각적으로 지각하는 지성이고, 표상에 의한 종교는 물질적 대상의 유무와 무관하게 내면에서 심상을 떠올리는 지성이죠. 사유로 귀결되는 철학은 개념을 통해 대상을 파악하려는 순수한 논리적 지성입니다.  

헤겔에 따르면 직관의 외면성과 표상의 내면성은 사유에서 종합되고, 이에 맞춰 예술의 객관성과 종교의 주관성은 철학에서 종합됩니다. 헤겔은 세 가지 인식 형식인 예술, 종교, 철학 모두 진리를 동일한 내용으로 하지만 굳이 우열을 가린다면 예술이나 종교보다 더 우위에 있는 것이 철학이라고 주장합니다. 절대적 지성의 형식을 ‘직관-표상-사유’ 순으로 구성하고 이에 맞춰 절대정신을 ‘예술-종교-철학’ 순으로 대응한 전략은 변증법 모델에 따른 전형적 구성으로 보입니다. 

그러나 변증법의 논증 원리에 따르면 정반합이 이루어진다고 해서 논증이 종결되어서는 안 됩니다. 변증법은 발전 지향적이어야 하니까요. 다시 말해 철학에서 종합된 인간의 절대지성은 다시 정반합의 과정을 거쳐 새로운 발전을 향해 가야 합니다. 그런데 헤겔은 철학이야말로 지성의 최고 정점이라고 마침표를 찍은 겁니다.  

헤겔과 니체가 만나는 장면으로 다시 돌아가 볼까요. 니체가 지적한 헤겔의 논리적 모순은 연속성이 지켜지지 않는다는 것을 지적한 겁니다. 예술, 종교, 철학이 대등한 위상을 가지다가 변증법적 논증을 거쳐 철학으로 종합되었다고 하더라도 변증법의 논증 체계에 의하면 다시 변증법은 계속 진행되어야 합니다. 그런데 헤겔 스스로 철학을 인간이 지닌 최고의 지성이라고 종지부를 찍는 순간, 순환관계에 있는 변증법의 수레는 멈춰버리고 만다는 겁니다.  

망치를 들고 서 있는 니체가 도발한 지점은 바로 이 지점을 지적한 것이지요. 끊임없는 정반합의 과정을 거쳐 발전을 거듭해야할 논증 체계가 철학이라는 정점에서 멈춰버린다면 헤겔 스스로 내세운 내적 논리가 모순이 되는 셈이죠. 니체의 입장에서는 이런 점이 비판의 대상이 된 것은 아니었을지. 

그렇다면 변증법에 충실하려면 헤겔은 어떻게 해야 했을까요. 철학에서 성취된 완전한 주관성이 재객관화되는 단계의 절대정신을 추가했어야 합니다. 철학으로 논증이 끝난다면 변증법은 방법적 정당성을 잃어버릴 수 있으니까요. 변증법의 지속성이 사라지면 안 되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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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에 대한 반정립으로서의 예술

한 번 더 변증법의 논증을 따라간다면 철학을 정립으로 볼 때 반정립에 해당하는 지성이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 종합이 이루어져 논증의 순환이 이어질 수 있습니다. 철학에 대립하는 반정립의 강력한 길항이 존재해야 합니다. 이때 후보로 등장할 수 있는 절대지성이 바로 예술입니다. 괴테는 철학과 대응할 수 있는 예술을 통해 미의식의 절정을 보여준 사람입니다. 그렇다면 예술은 어떤 특징과 매력이 있는 걸까요. 

예술 작품이 표현하는 미적 인식은 인간의 절대 지성을 관통하는 핵심이 될 수 있습니다. 미적 인식이란 말 그대로 대상의 아름다움을 인식하는 인간 정신을 의미합니다. ‘있어야 할 것’과 ‘있는 것’은 다릅니다. ‘있어야 할 것’을 공동의 선(善)으로 설명하는 학자들도 있습니다. ‘있는 것’은 개인의 현실로 설명하기도 합니다.
이 세계에서 추구하려는 바가 실현되느냐의 여부에 따라 아름다움에 대한 인식이 달라집니다. 좌절을 느끼는 경우와 충족을 느끼는 경우는 분명히 다른 감정일 테니까요. 예술은 이 둘을 구분해 표현합니다. 자신을 둘러싼 세계에 대해 비장한 심정을 느끼는 경우와 추구하는 게 실현되었을 경우에 느끼는 조화로움을 구분합니다.
대상에 대한 인식 역시 미의식을 구분하는 데 중요한 기준이 됩니다. 부정적인 대상을 향해서는 풍자와 비난의 인식이 지배적이고, 우러러보고 존경하는 대상에 대해서는 숭고한 생각을 가지게 됩니다.  

예술에는 여러 분야가 있습니다만, 괴테의 ‘문학 세계’를 바탕으로 미적 인식을 적용해 본다면 네 가지 미의식으로 집약할 수 있습니다. 문학의 미의식은 ‘비장미(悲壯美), 숭고미(崇高美), 우아미(優雅美), 골계미(滑稽美)’로 구분됩니다. 

우월한 존재에 대한 비장미와 숭고미

비장미는 부정적 현실이 우세할 때, 그 상황에 대한 대결 의식이 표면화하는 순간 드러납니다. 원하지 않는 상황을 극복하려고 마음먹을 때 세계와의 갈등은 불가피하죠. 그에 따른 희생이 어쩔 수 없다 하다라도 지향하는 이상세계가 확고한 이상, 부정적 현실을 넘어서려는 의지는 강화되고 비장미는 더욱 고조됩니다. 허위와 모순, 억압의 현실을 용납할 수 없는 인간의 실존적 인식은 어찌 보면 본능적인 것으로 볼 수도 있습니다. 주로 전쟁을 소재로 하는 예술과 문학에서 많이 표현됩니다.
인용하는 문학 작품은 전쟁을 배경으로 한 소설입니다. 병자호란을 맞이한 지배계층과 백성들이 어떤 상황이었을지 생각해보면 비장미가 어떤 의미인지 실감하실 겁니다. 

임금과 신료들, 백성과 군병과 노복들이 냉잇국에 밥을 말아 먹었다. 언 땅에서 뽑아낸 냉이 뿌리는 통째로 씹으면 쌉쌀했고 국물에서는 해토머리의 흙냄새와 햇볕 냄새가 났다. 겨우내 묵은 몸속으로 냉이 국물은 체액처럼 퍼져서 창자의 먼 끝을 적셨다. 쌀뜨물에 토장을 풀어 냉이 뿌리를 끓인 다음 고춧가루를 한 숟갈 뿌렸는데, 도살장 계집종의 솜씨와 수라간 상궁의 솜씨가 다르지 않았다. 태평성대에는 냉잇국에 모시조개 서너 마리를 넣었는데, 정축년 정월의 남한산성 안에는 모시조개가 없었다. 냉잇국을 넘기면서 임금은 중얼거렸다. 백성들의 국물에서는 흙냄새가 나는구나…….

<중략>

칸의 문서가 성 안으로 들어온 적이 없고, 아무도 칸을 보았다는 자가 없었지만 칸은 일월처럼 확실하게 성 밖에 와 있었다. 칸의 존재는 망월봉 위의 황색 일산과 도망쳐 온 땅꾼의 진술에 실려 성 안으로 들어왔고, 성 안으로 들어온 칸의 그림자는 다시 풍문으로 풀어졌다. 서장대에서 내려다보이는 청군의 접근으로 풍문은 또 확실해졌는데, 확실한 것이 다시 풍문으로 떠다녔다.

청군의 근접 배치가 끝나던 날, 냉잇국으로 아침을 먹은 신료들은 어전에 모였다. 신료들은 입을 다물었고 임금이 먼저 말을 꺼냈다.

_ 김훈, <남한산성> 일부 

숭고미는 열악한 현실에서 이상적인 것을 추구함으로써 나타납니다. 숭고미는 현실보다 이상적인 것의 가치가 우세한 가운데 심리적 갈등을 겪지만 긍정적인 상황을 지향하는 것이기 때문에 두 요소가 융합되면서 성립되는 미의식입니다. 이 경우 지향하려는 대상이 위대하고 탁월한 존재일수록 숭고미는 극대화됩니다. 문학에 있어 숭고미는 초월적 상황에 대한 외경으로부터 출발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대표적인 것이 신화이죠. 신성함을 특징으로 하는 신화는 일상보다 한층 차원 높은 질서와 존재를 포괄합니다.

신라 시대 향가인 <찬기파랑가>가 그렇습니다. “기파랑이 지니시던 / 마음의 끝을 좇으련다 / 아아 잣나무 가지 높아 / 서리 모를 화반이여”라는 구절은 화랑의 우두머리인 기파랑의 인격을 찬양하고 좇으려는 작가의 인식이 잘 드러나는 부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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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화로운 우아미와 비판성의 골계미

우아미는 현실에 대한 긍정에서 비롯하는 감정입니다. 정신적 만족과 함께 이상적인 상황에서 얻어지는 충만함이 가득할 때 조화로움으로 표현되는 문학적 양상입니다. 대상에 대한 내적 모순이 없는 가운데 이루어지는 미적 인식은 궁극적으로는 개인의 자기발전을 이끌면서도 공동체의 안정을 도모할 수 있도록 해줍니다. 자연친화적 인식을 표현하는 시문학에서 많이 발견되는 경향이 있습니다. 대표적인 시 한 편을 소개합니다. 

산 너머 남촌에는 누가 살길래 / 해마다 봄바람이 남으로 오네 //
꽃 피는 사월이면 진달래 향기 / 밀 익는 오월이면 보리 내음새 //
어느 것 한 가진들 실어 안 오리 / 남촌서 남풍 불 제 나는 좋대나
_김동환, <산 너머 남촌에는> 일부
 

골계미는 현실에서 결핍과 모순을 느끼는 상황에서 자신보다 못한 대상이나 존재에 대한 비판적 인식이 결합할 때 드러납니다. 대상에 대해서 부정적 태도를 보인다는 점에서는 비장미와 같은 계열이지만 대상이 우월하지 않고 열등한 존재라는 점에서 차이가 있습니다. 문학에서는 직접적인 비난이나 공격보다는 해학과 유머를 함께 동반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조선 후기에 유행했던 작자 미상의 사설시조 한 편을 소개합니다. 임과 이별한 상황은 분명 결핍된 현실이지만 그 심정을 더욱 악화시키는 존재인 개에게 푸념을 늘어놓는 화자의 모습에서 골계미의 특징이 드러납니다.  

개를 열 마리 남짓 기르지만 요녀석만큼 얄미운 개가 없다.
미워하는 사람이 오면 꼬리를 마구 흔들며 올라뛰고 내리뛰며 반겨 달려들고,
좋아하는 사람이 오면 뒷발을 버둥버둥 뻗대고 앞뒤로 왔다갔다 하며 캉캉 짖어 쫓아낸다.
쉰밥이 아무리 그릇그릇 넘쳐난다고 해도 널 먹일 것 같으냐?

글 | 오형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