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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9시의 커피]경계를 건너 희망을 노래하는 봄밤

‘I Have a Dream’ 마틴 루터 킹 커피

“커피는 영혼을 따뜻하게 데워주고
사람과 사람을 연결해준다.”
_ 커피전문가 알랭 스텔라(Alain Stell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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콘팔루는 카페 <밤9시의 커피>의 단골이다. 탄자니아 출신으로, 7년여 전 한국에 왔다. 유튜브로 우연히 만난 K-Pop에 빠졌고, 드라마, 영화, 미술 등 K-콘텐츠를 섭렵하다가 친구 따라 한국으로 향했다. 한국어 학당에 다니면서 어느덧 한국어도 익숙해졌다. 한국어가 서툴 때부터 <밤9시의 커피>에 종종 들렀다. 커피를 정말 좋아했다. 아니, 카페를 좋아하는지도 모르겠다. 수다를 떨려고 카페에 오는 것처럼 느껴질 때도 있다. 하도 수다를 떨어댄 덕에 이곳에서 친구들도 만나고, 한국어도 많이 늘었다. 

4월이 왔고, 봄밤이었다. 문이 열렸다. 콘팔루가 노래하듯 외쳤다. “I Have a Dream~♪”.
“What~ Dream?” 노래에 화답하듯 내가 물었다. 손님들이 그에게 눈이 쏠렸다. 살짝 궁금했다. 이어서 어떤 말이 나올까? 노래하듯 들어왔으니, 아바(ABBA)의 ‘I Have a Dream’이 이어질까? “(…)a song to sing. To help me cope with anything~”
아니면, 마틴 루터 킹 목사의 ‘I Have a Dream’? “(…)that one day on the red hills of Georgia~” 과연 그의 입에서는 어떤 말이 떨어질까?  

당신은 어떤 꿈을 꾸고 있나요?  

콘팔루가 문앞에 우뚝 서서 팔을 벌렸다. 그리고 입을 열었다. “They will not be judged by the color of their skin, but the content of their character. OK?”
한쪽에서 박수가 터져 나왔다. 킹 목사임을 알아챈 사람이었다. 내가 콘팔루에게 물었다. “Hey, Man. 무슨 일이야? 킹 목사는 왜 가지고 왔어? 아니면 꿈 얘기할 거야?”
“아저씨, 오늘 우리 킹 목사의 꿈 이야기해야 해. 4월이잖아, 4월. 오늘 내가 쏜다. 커피 한 잔씩 돌려돌려. 여러분, 오늘 기억해야 해. 블랙이 커피 쏘는 거니까. 별거 아냐. 봄밤 선물이라고 생각해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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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틴 루터 킹 목사


그렇게 말하곤, 커피 바에 앉아 본격 수다를 떨기 시작했다. 콘팔루가 그렇게 텐션을 높인 이유가 있었다. 미국의 인권·흑인해방운동가인, 마틴 루터 킹 목사 기일(1968년 4월 4일)이었다. 콘팔루는 흑인 인권과 역사에 관심이 많았다. 커피도 이런 관심 속에 있었다. 탄자니아를 넘어 아프리카 대륙 커피들이 제국주의의 산물이라는 사실도 안다. 그래서 그는 공정무역이나 다이렉트 커피인지 꼬박 묻곤 했다. 콘팔루는 킹 목사 이야기를 이으면서 커피에 대한 킹 목사 발언을 전했다.
“우리는 아침에 일어나 탁자에 앉아 남아메리카 사람들이 수확한 커피를 마시거나, 중국 사람들이 재배한 차를 마시거나 서아프리카 사람들이 재배한 코코아를 마신다. 우리는 일터로 나가기 전에 벌써 세계의 절반이 넘는 사람들에게 신세를 지고 있다.” 

커피는 곧 ‘덕분에’였다. 물론 모든 음식이 그렇겠지만. 콘팔루가 말을 이었다.
“우리가 마시는 커피 있잖아. 그 속에는 세계가 있는 거야. 신세진다고 생각하면 커피가 더 찐해. 마구마구 찐해. 그래서 맛있어. 아저씨도 고마워. 우리 탄자니아에도 커피 농부들 고마워. 진짜로 고마워.”
“와, 콘팔루가 그렇게 말해주니, 나도 고맙네. 이 커피 한 잔에 세계 곳곳에서 얼마나 많은 사람이 연결돼있는 거야? 나도 커피 농부들이 참 고마워. 그 사람들 덕분에 나도 이렇게 커피를 만들고 카페를 할 수 있는 거잖아. 콘팔루도 여기서 만나고 말이야.”
“아저씨는 그런데, 꿈이 뭐야? Do you have a dream? What do you dream?”
“나는 일단 여기서 꿈 하나를 이뤘어. 콘팔루 같은 사람들에게 맛있는 커피도 주고, 이야기도 나누는 커피하우스를 운영하는 것도 내 꿈이었어.”
“그럼 이제는 다른 꿈 없어?” 

우리도 ‘에스프레소 마끼아또’처럼  

킹 목사는 간디의 비폭력 저항운동을 이어받았다. 이에 비폭력주의를 기반으로 한 공민권 운동을 펼쳤다. 1955년 12월부터 이듬해 11월까지 미국 앨라배마주 몽고메리에서 흑백 분리주의 철폐를 요구하며 집단 버스 승차 거부를 했다. 이른바 ‘몽고메리 버스 보이콧 투쟁’을 주도했다. 그의 이름이 전국적으로 널리 퍼졌다. 그리고 마침내 1956년 11월, 연방최고법원은 버스 내 흑백분리법은 위헌이라고 판결했다. 킹 목사는 흑백통합버스에 처음 승차했다. 비폭력으로 일군 승리를 상징적으로 보여준 상징적인 장면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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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3년 8월 28일, 미국 워싱턴 DC에서 열린 ‘직업과 자유를 위한 워싱턴 행진’

마침 얼마 전 들여왔던 탄자니아 음베아(Mbeya) 커피를 뽑았다. 부드러운 초콜릿 향과 상큼한 신맛이 특징이다. 공정무역 유기농 커피였다. 마침 풀 시티로 볶아 놓았기에 에스프레소 마끼아또를 만들어 콘팔루에게 건넸다. 
“와, 멋지다. 왜 이렇게 만들었어? 무슨 의미가 있는 거지? 평소에 내놓는 커피가 아니잖아. 맛있겠다. 나 먼저 먹어볼래.” 콘팔루 입술에 우유커품이 살짝 묻었다. 맛있다는 표정이 한가득 묻어났다.
“무슨 뜻이냐면, 에스프레소를 까맣다고 치자고. 그 위에 하얀 우유 거품을 살포시 얹었잖아? 흑과 백의 조화가 느껴지지 않아? 세상이 흑과 백이 조화를 이루게 되길 바라는 마음이지. 오늘은 이걸로 결정했다! 어때? 마음에 들어? 참고로 마끼아또(Macchiato)는 있잖아. 이탈리아말인데, 얼룩지다, 점을 찍다라는 뜻이야.”
“오오오 그런 뜻도 있었어? 그런데 나도 한국에서 얼룩인가?”
“내 다른 꿈은 삶이든 세상이든, 얼룩이 있으면 좋겠어. 그러니까, 콘팔루는 우리 카페든 사회에 꼭 필요한 얼룩이야. 여기저기 이런저런 것이 섞여서 얼룩덜룩해지는 거 있잖아. 얼룩이와 덜룩이가 서로를 존중하면서 섞여 사는 것. 한쪽이 다른 쪽을 차별하거나 죽이는 게 아니고, 에스프레소 마끼아또처럼 조화를 이루는 거. 그러려면 돈 좀 벌어야겠지? 하하.”
“와, 돈 버는 거 좋다. 그건 꿈이 아니고 꿈을 향한 수단이겠지만. 내 별명 정할래. 앞으로 나를 ‘얼룩’이라고 불러줘.”  

‘희망이 만든 모든 것’을 위하여

킹 목사는 이렇게 말했다. “이 세상에서 이루어진 모든 것은 희망이 만든 것이다.” 그는 미국 곳곳을 누비며 약자들과 함께 나섰다. 하지만 68혁명이 프랑스에서 5월에 본격 발기하기 전, 4월 4일 암살당했다. 미국 멤피스에서 흑인 청소부의 파업을 지원하다가 스러졌다. 

킹 목사의 탄생을 기리는 미국의 공휴일, ‘마틴 루터 킹’데이는 그래서 탄생했다. 그의 실제 생일은 1월 15일이지만 미국은 1월 셋째 주 월요일을 공휴일로 지정했다. 미국 시민으로서 국가 공휴일에 이름을 올린 사람은 킹 목사가 처음이다. 초대 대통령 조지 워싱턴을 기린 ‘조지 워싱턴의 날’이 있지만, 공식 이름은 ‘대통령들의 날’이고 ‘콜럼버스의 날’은 이탈리아인 이름을 딴 것이다. 한국에도 특정 시민 이름을 올린 공휴일이 없다. 부처나 예수는 시민이 아니니 거론하지 마시라. 이토록 영원하고 위대한 이름을 콘팔루가 기리는 건 당연해 뵌다. 그는 자신의 정체성에 아프리카가 있다는 사실을 늘 자랑스러워한다.
“콘팔루, 킹 목사가 돌아가시기 전날인 4월 3일은 무슨 날인지 알아?”
“아니, 무슨 날이야? 그날도 누가 죽은 건가?” 

그에게 ‘제주 4·3 사건’을 이야기해줬다. 콘팔루는 붉으락푸르락하면서 4·3 이야기에 집중했다. 역시 얼룩을 용서하지 못하는 못된 자들의 소행이라고 알려줬다. 더구나 아직 묻혀 있는 진실이 있고, 끝나지 않은 현재진행형의 비극이라고 건넸다.
“아저씨. 너무 열 받아. 모든 건 희망이 만든 거라고 했는데, 맞아? 너무 하잖아. 울고 싶어. 나도 우리 가족도 힘들었거든. 그래도 우리 가족이 한국에 온 건 희망이 만든 거라고 생각했지만, 4·3은 너무 힘들다.”
“아직 4·3은 희망을 만들어가고 있는 과정이라고 생각해. 결론이 늦게 날 뿐이야. 물론 그 늦어지는 것 때문에 피해받고 아픈 사람도 너무 많지만.” 

콘팔루 가족은 난민이었다. 어머니와 아버지는 난민으로 여러 나라를 떠돌았다. 그 험난한 고생길을 콘팔루는 어릴 때부터 들었다. 그가 부모를 존경하는 이유였다. 그는 2021년 노벨문학상 수상자이자 탄자니아 난민 출신 소설가인 압둘라자크 구르나도 좋아했다. 

노래를 흘렸다. 아바(ABBA)의 노래였다. 경계를 넘고 건너는 사람들이 하나둘 흘러가고 있었다. 콘팔루가 그랬고, 콘팔루의 부모가 그랬다. 킹 목사는 흑인들과 함께 시대를 건넜다. 그리고 4·3 희생자와 생존자, 유가족들도 더디지만, 시민들과 함께 희망을 향해 가고 있다고 생각하고 싶었다. 우리는 여전히 꿈을 꿔야만 한다.  

I believe in angels
Something good in everything I see
I believe in angels
When I know the time is right for me
I'll cross the stream - I have a dream

 

글 | 낭만(김이준수)
낭만 님은 미국 아트/옥션 전문 인터넷매체 <옥션데일리>의 한국 콘텐트 디렉터를 맡고 있습니다. ‘행복하고 아름다운 세계는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멋대로 만들어내는 것’이라는 말을 현실화하고자 천천히 걷고 있습니다. 《마을을 상상하는 20가지 방법》을 썼고, 《그림자아이가 울고 있다》 《청소년 스마트폰 디톡스》 《고통의 곁에 우리가 있다면》 등에서 스토리텔링을 맡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