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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문학카페] 드라마 <더 글로리>를 통해 본 ‘희생양 메커니즘’

욕망은 어떤 방식으로 모방되는가?

[인문학카페] 드라마 <더 글로리>를 통해 본 ‘희생양 메커니즘’.

넷플릭스의 드라마, <더 글로리>의 핵심 배경인 ‘학폭’은 냉정하고 객관적인 시각으로 봐야 합니다. 사회학적 시각에서 보면 학교는 서열과 권력이 교묘하게 작용하는 곳이기도 합니다. 사회의 폭력과 권력의 속성이 학교로 옮겨오는 현상은 어찌 보면 당연한 수순입니다. 학교에서 힘없이 당하기만 하는 피해자는 학교 폭력의 피해자가 아니라 사회의 구조를 모방한 학교에서 이루어진 사회적 폭력의 희생자인 것이죠. ‘학폭’은 순진한 미성년 학생들의 우발적인 실수가 아니라 학교 구성원들이 부지불식간에 사회의 서열구조를 습득하는 과정에서 삐뚤어진 권력을 모방하며 일어난 명확한 범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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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교가 숨겨온 사회적 욕망과 폭력 

집단폭력이라는 예민한 부분을 다루는 이 드라마는 높은 시청률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사회 에 존재하는 집단폭력에 대한 트라우마가 시청률로 이어지고 있는 셈이죠. 정의가 정상적으로 작동하지 않는 사회에 대한 대중의 내면적 반발이 표현된 건 아닐까요? 얼마 전 고위직 관료가 되려는 검사 출신의 후보자가 아들의 학교 폭력에 대처한 방식이 논란을 일으킨 적이 있습니다.
학교 폭력의 바탕에는 우리 사회 기득권의 폭력성이 대물림된 것이 깔려있습니다. 아울러 가해자들이 보인 피해자들에 대한 철저한 차별적 행태는 교묘하고 정교합니다. 학폭은 기득권의 카테고리가 자신들에게 유리하게 작용할 수 있다는 믿음이 불러온 사회적 병리현상입니다. 법의 테두리를 약삭빠르게 빠져나간 가해자들을 처벌하지 못하는 사회는 국가의 존재 자체를 불신하게 합니다. 사람들의 공분을 일으킨 것도 같은 맥락으로 볼 수 있습니다.  

플라톤의 《국가》 1권에 등장하는 청년 트라시마코스와 소크라테스의 문답은 법과 정의에 관한 논쟁이 아직도 유효하다는 점을 상기시킵니다. 2500년 전의 질문을 우리는 아직도 해결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진정으로 뼈아프게 반성하고 해결해야 할 질문입니다. 정의가 무엇이냐고 묻는 소피스트인 트라시마코스의 물음에 소크라테스는 이렇게 내뱉습니다. “정의는 강한 자들의 이익일 뿐이지.” 

폭력성을 은폐하는 ‘박해 텍스트’  

학교에서 일어난 폭력 사건의 밑바닥에는 모방된 욕망이 자리 잡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인간들의 욕망은 어떻게 만들어지는 걸까요. 생애의 대부분을 미국 대학에서 문학을 가르쳤던 르네 지라르(René Noël Théophile Girard, 1923-2015)는 세르반테스의 소설 <돈키호테>를 분석한 적이 있습니다. 그가 진행한 연구에서 주목할 지점은 욕망을 설명하는 부분입니다. 고대 그리스의 현자(賢者) 아폴로니우스를 인용하면서 지라르는 흥미로운 이야기를 들려줍니다.  

에페소스라는 도시에 페스트가 번지자 무질서와 혼란이 극에 달합니다. 절망한 사람들은 지혜로운 아폴로니우스를 찾아와 페스트를 낫게 해 달라며 애절하게 매달립니다. 그때 아폴로니우스는 힘없고 불쌍해 보이는 거지 한 명을 지목하죠. 저 거지가 바로 ‘페스트의 악령’이라고 알려줍니다. 그리고는 사람들에게 그를 향해 돌을 던지라고 명령합니다.
거지에게 돌 던지기를 머뭇거리던 사람들이 아폴로니우스의 명령이 계속되자 하나둘씩 돌을 던지기 시작합니다. 돌에 맞은 거지는 고통에 못 이겨 분노의 눈빛을 드러내기 시작합니다. 분노와 적대감으로 뒤덮인 눈빛을 확인한 사람들은 악령이 틀림없다며 주저하지 않고 돌을 던지게 됩니다. 아폴로니우스가 돌에 맞아 죽은 거지를 확인시켜 주기 위해 돌무더기를 헤쳐내자 그 자리에는 커다란 짐승 하나가 죽어 있었습니다. 이 일을 계기로 페스트는 끝이 나고 사람들은 거지, 즉 ‘페스트의 악령’이 죽은 그 자리에 자신들을 지켜주었다고 믿는 헤라클레스의 흉상을 세웁니다.  

지라르는 이 이야기를 통해 인간성에 내재한 폭력성을 규명합니다. 설명에 따르면 사람들은 페스트와 같은 거대한 폭력적 상황을 해결하는 과정에서 죄 없는 희생양을 선택합니다. 그리고 대다수 사람들이 저지른 폭력을 감추기 위해 그럴싸한 이야기를 꾸며낸다고 말합니다. 당연하게도 이야기에서 강조되는 것은 대다수가 얻게 된 혜택과 보상입니다. 희생되는 거지에 대한 관심은 거의 드러나지 않습니다. 페스트를 이겨내는 과정에서 피해자였던 거지는 어쩔 수 없는 희생물일 뿐입니다. 지라르는 희생양(거지)에게 가해지는 폭력을 통해 다른 폭력(페스트)을 제압하려는 이 이야기야말로 사람들의 폭력성을 은폐하려는 의도로 쓰인 대표적인 ‘박해 텍스트’라고 규정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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윌리어 홀먼 헌트(1827-1910), <희생양>


사회의 기득권자인 아폴로니우스가 거지를 희생양으로 선택한 것은 그가 또 다른 폭력을 유발할 힘이 없는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아폴로니우스가 거지를 ‘페스트의 악령’으로 지목한 것은 무질서와 혼란의 에너지를 배출할 출구가 필요했기 때문이었죠. 처음에 사람들이 거지에게 돌 던지기를 주저했던 것은 페스트를 잠재우기 위한 대체 폭력의 희생양으로서 거지가 선택된 사실을 몰랐기 때문입니다. 그러는 사이 잠재된 그들의 폭력성이 서서히 깨어났던 것이죠.  

돌무더기에서 거지의 시체가 아니라 커다란 짐승의 시체가 나왔다는 부분은 거지에게 행사한 집단적 폭력의 본질을 은폐하기 위해 진실을 왜곡한 겁니다. 그렇다면 거지, 즉 ‘페스트의 악령’이 죽은 자리에 수호신 헤라클레스의 흉상은 왜 세웠을까요? 사람들에게 불편한 기억으로 남아있는 거지를 그냥 둘 수는 없습니다. 그럴 경우 폭력의 광기에 사로잡혔던 죄의식이 해소되지 않기 때문이죠. 이럴 때 숭배라는 집단의례가 동원됩니다. 아름답게 미화할 수 있는 상징적 장치가 필요한 거죠. 신화적 존재인 헤라클레스를 끌고 들어와 그의 흉상을 세우는 겁니다. 집단의 폭력이 집단의 욕망으로 변화하여 신성한 이야기로 바뀌게 된 겁니다. 

프로이트, 무의식의 발견

지라르의 해석을 받아들인다고 해도 질문이 생깁니다. 사회적 지위를 가진 현자가 사람들에게 폭력이라는 해결방안을 제시했을 때, 사람들의 양심과 죄의식이 그 폭력을 부정할 수는 없었을까? 페스트라는 질병이 한 사람의 악령에게서 시작되었다는 것도 이성적 인간에게는 이해하기 어려운 일입니다. 그런 점에서 위의 이야기가 고대로부터 이어져 온 이야기라는 점을 상기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이성이 인간의 행동을 통제할 수 있다고 믿기 이전의 이야기여야 수긍할 수 있으니까요.
이럴 경우 고대의 인간은 모두가 어리석은 사람들이라고 판단해야 합니다. 그렇지만 이런 설명은 현명한 해명이 될 수는 없지요. 문명 이전의 야만의 시대가 아닌데도 불구하고 폭력성과 폭력을 모방하면서 집단적 폭력으로 확산하는 인간의 심리적 현상이 해명되어야 합니다. 한 명의 희생자를 정해놓고 말 그대로 마녀사냥이라도 하듯 벌어지는 인간의 광기 어린 폭력성은 어디에서 나오는 것일까? 고대의 이야기든지 현대의 드라마든지 시대를 불문하고 등장하는 인간의 폭력성은 어떤 방식으로도 설명되어야 합니다.  

현대 철학은 이성을 통해 객관적이며 보편적인 진리를 찾을 수 있다는 근대 이성의 확고한 신념을 전면 부정하며 등장했습니다. 현대 철학에서 빼놓을 수 없는 부분인 정신분석학이라는 학문을 만들고 탐구해나갔던 철학자가 지그문트 프로이트(Sigmund Freud, 1856-1939)입니다. “창을 던지는 대신 욕설을 최초로 사용했던 자가 바로 문명의 창시자이다”라고 선언한 프로이트는 대부분의 인간 행위가 자유롭거나 자발적으로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 자신도 알지 못하는 무의식적 동기에 의해 이루어진다는 것을 밝혀냅니다.
그는 자신이 창시한 정신분석학이 일으킨 충격을 코페르니쿠스에 비유한 적이 있습니다. 지동설을 주장해 신의 영역에 도전했다는 이유로 가톨릭이 지배하던 시대에 이단아로 몰렸던 코페르니쿠스의 과학적 혁명에 정신분석학을 빗댄 것은 무의식의 발견이 철학계로서는 그만큼 충격적인 사건이었다는 의미일 것입니다.  

프로이트는 무의식을 단순히 우리가 알지 못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알면서도 스스로 억압한 것, 그래서 의식에서 밀려난 것이라 보았죠. 비유하자면 이런 거죠. 바다에서 섬을 보았을 때, 바닷물의 표면 밖으로 드러난 섬이 의식이라면 섬의 아래 바다 밑에 광대하게 뿌리내리고 있는 훨씬 더 큰 부분이 무의식이라고 이해할 수 있습니다. 무의식에 비하면 의식은 조금 과장해서 말하자면 빙산의 일각이라는 겁니다.
그는 정신이상과 같은 병리적 현상이나 무의미해 보이는 말실수, 시공간의 질서나 논리적 연관이 무시되는 꿈을 무의식에 접근하는 주요 통로로 파악했습니다. 특히 프로이트는 꿈을 인간의 무의식적인 정신생활을 이해하는 지름길로 보고 이를 위해 자유 연상법을 활용했습니다. 자유 연상법을 무의식에 접근하는 과학적 방법이라 생각한 이유는 꿈 자체나 자유 연상, 그리고 인간의 모든 정신 활동은 결코 자의적으로 이루어지지 않는다고 이해했기 때문입니다. 인간의 정신 활동은 내면에서 갈등하고 부딪히는 여러 생각들 사이의 역학 관계에 의해 규정된다는 것이죠. 다시 말해 인간의 진짜 욕망은 무의식에서 발현되는 심리적 현상이라는 거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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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욕망의 삼각 구조’ 

르네 지라르는 근원적인 폭력성을 설명하면서 욕망이 어디에서 비롯하는지 관심을 가집니다. 가시화되고 표면화된 욕망은 사회 구성원들의 동의를 얻어야 하고, 정당성을 가져야 합니다. 이 과정에서 폭력이 올바르다고 평가받을 수는 없지요. 그래서 그는 욕망이 발생하는 구조를 찾아내고, 이를 ‘욕망의 삼각 구조’로 불렀습니다. 프로이트가 인간의 무의식을 발견해냈다면 지라르는 문학작품을 분석하는 과정에서 무의식이 욕망과 어떻게 연결되는지를 찾아낸 학자로 볼 수 있습니다. 지라르는 소설을 분석하면서 무의식을 주인공의 욕망이 발현되는 근원이라고 본 거죠.  

그가 설명한 소설 <돈키호테>를 다시 들여다보겠습니다. 아마디스는 돈키호테가 즐겨 읽던 중세 기사도 이야기 속의 주인공입니다. 잘 생긴데다가 고결한 정신과 강한 무예를 지녔으며 단 한 번도 패한 적이 없는 위대한 기사입니다.
주인공 돈키호테는 전설의 기사 아마디스를 동경하죠. 그가 지향하는 기사도 정신은 모두 아마디스에게서 나온 것입니다. 다시 말해 이상적인 기사가 되고자 하는 돈키호테의 욕망은 자신의 내부에서 우러난 것처럼 보이지만 실은 이상적인 기사가 되고자 했던 ‘아마디스의 욕망을 모방한 것’일 뿐입니다. 이처럼 주체가 어떤 대상을 자발적이고 직접적으로 원하는 것 같지만 사실은 그 사이에 매개자가 있으며, 그 매개자를 무의식적으로 따르게 된다는 것이 르네 지라르가 말한 욕망의 삼각 구조입니다.  

삼각형을 이루는 욕망 구조에서 중요한 것은 매개자입니다. 매개자로 기능하기 위해서는 일정한 조건이 필요합니다. 소설 <돈키호테>에서는 매개자인 아마디스가 돈키호테보다 훨씬 우월한 위치(전설의 인물; 외적매개)에 있기 때문에 거부감 없이 무의식적으로 선택됩니다. 이럴 경우 욕망의 주체는 매개자를 모방하고 있다는 사실을 쉽게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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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돈키호테》 1905년판에 삽입된 그림


그러나 욕망의 주체와 매개자(현실의 인물; 내적 매개)의 차이가 없어지면 주체와 매개자는 동일한 대상을 욕망하는 경쟁자가 되어 버립니다. 즉, 주체가 매개자를 초월할 수 있다고 생각하고, ‘내가 저 사람이 누리는 것을 내가 누리지 못할 이유는 없지 않는가’라며 매개자를 증오하게 되는 것이죠.  

이렇게 주체와 매개자가 동일한 대상을 욕망하는 일이 벌어지면 두 존재는 끝없는 경쟁과 증오로 인해 걷잡을 수 없는 폭력을 낳게 됩니다. 모방을 부추기는 사회일수록 시기와 질투가 넘칩니다. 예를 들어 한 여성을 사이에 둔 두 남성이 있다고 할 때, 본보기가 된 매개자인 남성과 그 남성의 욕망을 무의식적으로 동경한 다른 남성의 경쟁이 공동체 차원으로 확대되어 심각한 폭력으로 변질될 가능성이 있습니다. 이런 경쟁관계는 개별 주체들에 국한되지 않고 사회 전체를 위기에 빠트릴 수 있습니다.  

위기 시 작동하는 ‘희생양 메커니즘’ 

처음으로 돌아가 볼까요. 지라르는 이러한 위기가 닥칠 때 ‘희생양 메커니즘’이 작동한다고 보았습니다. 희생양 메커니즘이란 공동체가 어떤 존재를 희생시킴으로써 공동체의 위기 상황을 극복해 가는 제의(祭儀)의 과정입니다. 희생양은 차이의 소멸로 생성된 극단의 무질서와 폭력의 에너지를 일정한 방향으로 배출시키는 일종의 ‘대체 폭력’입니다.  

선택된 희생양은 위기에 빠진 집단의 내부적 폭력을 정화하는 기능을 합니다. 이때 희생양으로 선택되는 존재들은 주로 이방인, 전쟁 포로, 짐승 등 ‘타자’이거나 ‘타자로 만들어진 존재’입니다. 희생양에 대한 폭력을 통해 공동체의 위기 상황이 해결된다 해도 그것은 일시적인 방편일 뿐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인간의 모방 욕망 자체가 소멸되지는 않습니다. 공동체의 위기 상황은 계속 반복될 수 있습니다.  

희생양 메커니즘이 오랜 세월 동안 반복되어 온 것에 대해 지라르는 다음과 같이 설명합니다. 희생양에 대한 두 가지 방향에서 왜곡이 발생한다는 사실입니다. 그 왜곡이 사건의 본질적 양상을 은폐할 수 있다고 본 거죠.
첫 번째 왜곡은 무고한 자에게 갈등의 책임, 집단 전체를 둘러싼 위기의 책임을 전가하는 것입니다. 두 번째 왜곡은 집단적 폭력이 행해지고 난 뒤, 희생물이 사회를 위기에서 구원하고 화해를 가져오는 존재로 신성화하는 것입니다. 이런 왜곡 과정을 통해 희생양 메커니즘은 근원적인 폭력성을 성스러움으로 탈바꿈시키는 제의적 성격을 갖게 됩니다.

모방 욕망은 어쩔 수 없이 발현되는 인간의 본능이라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희생양 메커니즘을 드러내고 진실을 전하는 사람들도 있어왔습니다. 자라르는 그 욕망을 긍정적인 방향으로 돌린 모델로 예수를 언급합니다. 용서와 비폭력으로 폭력의 악순환을 해체시켰다고….

글 | 오형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