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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문학카페] 뒤르케임의 <자살론>과 소포클레스의 <오이디푸스 왕>

실패에 대한 탐색

성공만이 살 길이라고 강요하는 시대일수록 오히려 실패의 원인을 따져보고 실패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탐색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행여 실패를 경험했다하더라도 좌절할 일은 아니지요. 그 경험이야말로 희망을 갖고 내일을 살아내야 하는 우리에게 정작 필요한 것일 테니까요.

궁상을 떨고 진저리쳐지는 싸구려 같은 삶이라 하더라도 그 삶을 실패했다고 해서는 안 됩니다. 욕망을 충족하지 못해 결핍된 삶은 있지만 세상에 실패한 삶은 없기 때문입니다. 역설적으로 실패는 재창조와 재도전의 자양분이 될 수 있지 않을까요. 이에 생물적 인간의 실패라 할 수 있는 자살과 오이디푸스라는 영웅의 몰락이 어떤 의미를 갖는지를 살펴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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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구조 속에서 재발견된 자살

흔히 적극적이고 난폭한 자기모순적 행위를 자살이라고 부릅니다. 그 책이 나오기 전까지 인류는 자살을 한 개인의 실패로 치부했고, 부정적인 태도를 취했습니다. 20세기를 앞둔 세기말, 발간된 한 책이 이런 오랜 고정관념에 반기를 듭니다. 1897년 에밀 뒤르케임(Emile Durkheim, 1858 ~ 1917)이 발표한 《자살론》입니다. 그는 이 책을 통해 자살을 개인이 아닌 사회적인 문제로 끌어올렸습니다.

뒤르케임은 사회학의 대상을 ‘사회적 사실’에 대한 연구로 설정하고, 사회적 사실을 ‘사물’로 연구해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그의 이론이 지금까지 유효한 데는 그가 사회의 도덕적 토대 위에서 개인의 행위를 지켜봐야 한다고 한 까닭에 있습니다.

산업화와 근대화 과정에서 더 뛰어난 효율을 위해 고안된 분업체계는 기존의 종교가 결속시켜왔던 사회적 연대와 바탕을 위협하게 됩니다. 공동체라는 사회적 가치가 개인의 생산성과 효율성에 의해 무너지면서 사람들을 정신적 공황으로 몰아간다는 것이지요. 이는 ‘아노미’라는 목적 부재의 상황이 발생하는 데까지 이르게 됩니다. 쉽게 말해 무엇을 위해 살아야 할지 헷갈리게 되는 멍한 상황이 찾아온다는 겁니다.

그는 산업화가 진행될수록 자살률이 급증하는 상황에서 사람들의 자살이 단순한 개인의 선택이 아니라 사회의 구조적 변화에서 원인을 찾아야 한며 자살을 크게 세 가지 유형으로 구분합니다.

먼저 ‘이기적 자살’입니다. 한 개인이 자신이 지닌 우월함과 확고한 내적 신념에 대한 도취가 너무 강할 때, 즉 개인적 자아가 사회적 자아보다 훨씬 우월하다고 생각해 사회의 구조적 변화 자체를 거부하고 사회에 적응하지 못해 벌어지는 자살입니다.

다음은 ‘이타적 자살’입니다. 종교 또는 정치 집단이나 그 보다 더 높은 차원의 목적을 위해 개인이 스스로 목숨을 버리고 희생하는 것이죠. 종교에 대한 맹목적 신앙과 군대의 규율, 사회적 명예 등에 의해 자신을 버리는 경우가 여기에 속합니다.

끝으로 개인에 대한 사회의 규제가 약화될 때 나타나는 ‘아노미적 자살’입니다. 사회가 개인의 욕구와 충족을 집단의식을 통해 조정해오다 이 규제가 제거될 때 개인의 욕구는 끝없이 증가해 발생합니다. ‘숙명적 자살’로도 불립니다.

저주스런 신탁의 진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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샤를 잘라베르, <오이디푸스와 안티고네>(1842)

그리스의 도시 국가 테베에 끔찍한 돌림병이 번져나갑니다. 사람들은 이 전염병의 원인이 오이디푸스 왕의 잘못에서 빚어진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그가 이전 왕인 라이오스를 죽이고 왕위를 빼앗았을 뿐 아니라 미망인 이오카스테와 결혼해 두 딸을 낳았기 때문이죠. 살인자가 벌을 받을 때까지 돌림병은 계속 될 것으로 믿은 겁니다.

그런데 이 이야기에는 숨어있는 진실이 있습니다. 진실이기는 하지만 상당히 끔찍합니다. 그리스의 비극시인인 소포클레스가 쓴 <오이디푸스 왕>은 영웅의 실패가 환기하는 절대적 비극과 함께 평범한 일반 시민들이 이 이야기를 통해 얻게 되는 카타르시스(정화작용)가 함께 녹아 있습니다.

절대적 권력자인 영웅의 몰락이 의미하는 것은 한 세계의 붕괴입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그 몰락과 실패에서 일상에서 지친 삶을 위로받고 별것 아닌 것 같은 자신의 삶이 어쩌면 더 행복할 수 있을 것이라는 위안을 얻게 되는 것이죠. 힘든 일과가 끝나고 퇴근 후 어느 소극장에서 영웅의 몰락이 펼쳐지는 연극 한 편을 보면서 소시민의 삶의 가치가 재확인되고 있는 셈이죠.

다시 이야기 속으로 돌아가 보겠습니다. 테베의 왕 라이오스와 왕비 이오카스테 사이에 비극의 씨앗이 되는 아들이 태어납니다. 그런데 수년 전에 라이오스 왕이 들은 신탁의 내용이 이들의 삶을 헝클어 놓습니다. 두 번에 걸쳐 이루어지는 신탁은 첫째, 자신이 아들에게 죽임을 당할 것과 둘째, 아들이 친부를 죽이고 어머니와 결혼할 것을 예언합니다. 말만 들어도 끔찍하지요. 존속살인에 근친상간이라니, 이건 말이 안 되는 상황입니다.

라이오스 왕이 아들을 산에 버리자 한 목동이 갓 난 사내아이를 발견해 이웃 나라의 코린트 왕에게 입양시킵니다. 세월이 흘러 두 나라 간의 전쟁에 참여한 오이디푸스는 신탁의 예언대로 라이오스 왕을 처형하고 당시의 관례대로 패배한 왕이 소유했던 모든 것을 가지게 됩니다. 이리하여 왕의 미망인을 아내로 맞아들임으로써 신탁은 완성됩니다.

모든 사실을 알고 있던 궁정의 노쇠한 신하가 이 사실을 우연히 발설하면서 비극은 절정을 향해 치닫습니다. 첫 번째로 이 사실을 알게 된 인물은 이오카스테 왕비입니다. 오래 전에 버린 아이가 바로 지금의 남편, 즉 오이디푸스라는 사실을 안 그녀의 심정은 어땠을까요. 자기가 아들의 아이를 낳았다는 사실에 절망한 그녀는 스스로 목을 매 죽습니다. 이 죽음을 조사하던 오이디푸스 또한 모든 전말을 알게 됩니다. 아버지를 죽이고 어머니와 근친상간을 저지른 자가 본인이라는 사실을 알게 된 겁니다.

이 끔찍한 상황에서 오이디푸스는 무슨 생각을 했을까요. 그가 선택한 길은 이렇습니다. 그는 이오카스테의 옷에 달려 있던 브로치를 떼어내 그 바늘로 자신의 눈을 찌릅니다. 그리고 장님이 된 그는 스스로 왕위를 내려놓고 유배의 길에 오릅니다. 자살로 끝난 왕비와 달리 눈을 찌르고 왕의 자리를 포기한 이 영웅의 몰락이 의미하는 것은 상징적 ‘죽음’입니다. 고대 그리스의 거지는 신분이 보장되지 않을 뿐더러 법의 울타리 밖에 존재함으로써 ‘인간’이 아닌 존재가 되기 때문입니다.

이를 지켜보는 시민들은 영웅의 불행과 실패를 보며 고통을 느낄 것입니다. 무대에서 펼쳐지는 절망적 상황 속에서 어떤 장면에서는 동정과 안타까움의 감정이 생길 것이며 최고 권력자의 몰락을 보며 유약한 인간으로서 느끼는 두려움을 쏟아지는 눈물로 증폭시킬 것입니다.

영웅의 실패, 그리고 카타르시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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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IES MANUEL GARCÍA BARROS A ESTRADA- PONTEVEDRA, Flickr (CC BY)

카타르시스 형태로 드러나는 이 눈물로 인해 시민들의 감정은 정화됩니다. 속 시원히 울고 나면 뭔가 개운하고 속이 뻥 뚫리는 듯한 감정을 경험해보셨을 겁니다. 아리스토텔레스가 <시학>에서 언급한 카타르시스, 즉 정화작용이 일어나는 거지요. 타인의 고통을 간접 경험하는 순간 스스로의 부정적 감정은 사라지기 때문입니다. 이 매력적인 경험이 바로 비극을 이어온 서사구조의 핵심이 됩니다.

일상에 지치고 경쟁에 낙오된 사람들이 이 연극을 관람하는 순간 정화는 일어나고 집단적 치유를 경험하게 됩니다. 관객을 대리해 실패를 경험하는 영웅을 봄으로써 위안을 얻게 되는 것입니다. ‘저 위대한 왕의 삶이 그럴진대 나의 삶은 차라리 행복한 거구나’ 라고 말이죠.

다른 이들을 위해 상징적 희생이 된 오이디푸스는 결국 관객들에게 희망을 선물하는 ‘영웅’으로 거듭나게 됩니다. 우리의 삶과 일상에, 그리고 가슴 한 켠에 자리 잡고 있지만 봉인되어 있는 희망을 일깨워 주는 이타적 영웅으로 말이죠. 힘들지만 오늘 하루를 살아가는 많은 사람들의 심장에 봉인된 희망이 열리기를….

글 | 오형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