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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9시의 커피] 다시 첫사랑처럼 다가오는 꿈

‘전환사회’를 위해 코스타리카 커피 한 잔

커피가 독이라면,
그것은 느리게 퍼지는 독일 것이다.
_ 볼테르 

“코스타리카 코스타리카요~” 가제트가 급하게 <밤9시의커피> 카페 문을 열어젖히고 외쳤습니다. 코스타리카 따라주 커피를 내려달라는 소리입니다. 아니 뭣이 그리 급헌디, 물었습니다. 헉헉, 가제트는 가쁜 숨을 몰아쉽니다. 숨 좀 돌리자는 손짓을 건넵니다. 물을 건넸습니다. 꿀꺽꿀꺽, 캬, 시원한 탄성을 내뱉습니다. “마침내, 다음 달에 코스타리카에 갈 수 있게 됐어요. 만세, 만세.” 

와우, 커피 내릴 준비를 하다 말고 저도 탄성이 흘러나왔습니다. 야, 그렇게 오매불망하더니. 가제트는 지난 2년여 동안 보지 못한 환한 얼굴로 웃고 있습니다. 덩달아 <밤9시의커피>도 덩실덩실 춤추는 기분입니다. 여기 있는 커피 모두가 박수로 기쁨을 함께 축하하는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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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스타리카 자연 풍광


지난 2년여 힘들었습니다. 저도 당신도 세상도 그랬습니다. 코로나19 바이러스 때문이었습니다. 온 세상을 지배했던 힘이 수그러들었습니다. 사라진 것은 아닙니다. 어쩔 수 없이 같이 살게 되었다고나 할까요. ‘코로나 감옥’에 갇혀있던 사람들이 탈주(?)를 감행하고 있습니다. 그동안 억눌려 있었다는 방증이겠지요.
동네에서 환경·기후위기 활동가이자 제로웨이스트(zero waste) 숍을 공동 운영하는 가제트는 수년 전부터 코스타리카 노래를 불렀습니다. 생태 선진국 코스타리카를 둘러보겠다는 바람 때문이었습니다. 코로나19가 가로막았으나, 마침내 떠날 수 있게 되었나 봅니다. 부러웠습니다. <밤9시의커피> 탄생 배경엔 코스타리카도 자리를 잡고 있으니까요. 

코스타리카 커피는 제 첫사랑이었습니다. 배움에 있어선, 처음 누구에게 어떻게 배우느냐가 중요합니다. <밤9시의커피>가 처음 커피를 배웠던 스승은 ‘코스타리카 커피’를 좋아했습니다. 따라주(코스타리카 따라주 지역) 커피를 건네면서 이런 말을 던졌습니다. “나는 죽으면 코스타리카에 묻히고 싶어. 커피 업을 하는 사람 중에 나 같은 생각을 하는 사람이 꽤 있어.” 

커피 스승에게 코스타리카는 꿈의 나라였습니다. 죽어서라도 코스타리카 커피나무에 자양분을 제공하고픈, 코스타리카 커피 향에 자신이 뿜은 마지막 삶의 향을 삼투하고픈 의지였습니다. 그때 따라주 커피는 맛있었습니다. 향기로웠습니다. 코스타리카를 좋아하는 스승의 마음이 담겨서였을지도 모르겠습니다. 덕분에 당시 어디 커피를 좋아하느냐는 질문을 받으면, 코스타리카, 라고 답했습니다. 나도 코스타리카에서 생의 마지막 시기를 보내고 죽어서 그 땅에 묻히면 어떨까,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코스타리카는 커피가 전부는 아닙니다. 코스타리카의 매력과 로망을 드러내는 다양한 이유가 있었습니다. 

생명을 위한 나라에 대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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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남미 니카라구아(위)와 파나마(아래) 사이에 위치한 코스타리카


가제트에게 따라주 커피를 건넸습니다. 향미를 음미하면서 자신이 왜 코스타리카에 매혹됐는지 썰을 풀어 놓습니다. “코스타리카는 중립국인데, 군대 따윈 없어요.”  

코스타리카는 1948년 세계 최초로 헌법에 따라 군대를 없앴습니다. 세금으로 군대를 유지할 까닭이 없으니 막대한 국방비 따위도 없습니다. 탈영할 장병도 없고, 군 의문사로 피멍 맺힐 사람도 없습니다. 군대 내 폭력도 없습니다. 군대가 있으면 국방비로 쓰일 예산은 고스란히 국민의 삶의 질을 높이고 자연과 생태계 보존에 사용합니다. 인간 동물만을 위한 나라가 아닌 비인간 생명의 가치도 존중받습니다. 

물론 코스타리카에 군대가 없다고 남성우월주의가 없는 건 아닌가 봅니다. 《군대를 버린 나라: 코스타리카 사람들의 평화 이야기》는 남성의 폭력, 무책임, 우월의식도 유별나다고 전합니다. 그래도 코스타리카 국민들은 군대가 없다는 것에 자부심이 있다고 가제트는 전합니다.  

우리는 군대를 둘러싸고 남녀가 싸우고 갈등하는 이상한 나라에 삽니다. 남녀 간에 싸울 게 아니라, 남자만 의무적으로 군대를 가야 하는 체제에 의문을 제기하고 싸워야 하지 않을까요. 코스타리카는 그런 면에서 선도국입니다. 국방 대신 자연생태 보전에 신경을 쓴 결과가 놀랍습니다. “놀라지 마세요. 전 국토의 12%가 국립공원이고 23%가 생태 보호지역이에요. 토건주의자나 개발주의자들이 흉포하게 나설 수 없게끔 장치를 마련해 놓은 거잖아요.” 들을수록 놀랍습니다. 생태주의는 코스타리카에서는 미래를 위한 구호가 아니라 현재진행형입니다. 

가제트는 코스타리카에 대한 공부를 계속하고 있었습니다. 열대우림이 원시 그대로 숨 쉬는 국립공원 몬테베르데를 이야기합니다. 이곳에는 나무늘보원숭이가 있습니다. 먹는 시간 외에는 움직이지 않는 이 생명은 ‘진화의 낙오자’로 불리지만, 움직이지 않음으로써 자연과 자신을 합일시킵니다.

“이게 한국과 코스타리카의 가장 큰 차이일 수도 있어요. 코스타리카는 성장을 이유로 움직이지 않거든요. 차라리 가만히 놔둬요. 덕분에 곳곳에 생태가 살아있죠. 근데 한국은 달라요. 성장해야 한다는 이유로, 가만히 있는 걸 못 봐요. 사람을 노동 기계로 만들고 자연과 땅을 가만 놔두지 않아요. 파고 또 파헤치고 높게만 지으려고 해요. ‘성형 괴물’은 단순히 성형을 한 사람을 두고 하는 말이 아니라, 이 나라 체제를 두고 하는 말 같아요. 성장 괴물과 같은 말이죠.”

가제트의 말을 듣자니, 코스타리카 커피는 맛있을 수밖에 없습니다. ‘떼루아(토양, 풍토)’를 그렇게 만들었는데, 커피 열매가 잘 익을 수밖에 없지 않을까요. 코스타리카 자연이 선사한 맛이니까. 그 자연이 충분히 날숨과 들숨을 쉬니까.  

여담이라며 가제트는 코스타리카 독립 영웅을 이야기합니다. 그 영웅은 여성이었습니다. 판차 카라스코(Pancha Carrasco). 1850년대 미국이 니카라과를 정복하고 코스타리카까지 노렸습니다. 전쟁이 일어났습니다. 카라스코는 당시 코스타리카 군대의 요리사 겸 간호사였데 총을 들고 나섰습니다. 마치 잔다르크 같았나 봅니다. 그런 모습에 군대는 사기가 올랐고 전쟁에서 승리했습니다. 카라스코는 조혼 풍습 때문에 여덟 살에 처음 결혼하는 등 세 번의 결혼을 했습니다. 남편은 하나같이 게으르고 무지했으나, 카라스코는 그런 남편들에 끌려 다니지 않았습니다. 스스로 삶을 개척했고 자신의 삶을 살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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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스타리카 독립 영웅, 판차 카라스코

‘푸라 비다’, 순수한 삶을 사는 즐거움

“코스타리카 땅을 밟으면 제일 먼저 이렇게 외치려고요. 푸라 비다~ 무슨 말인지 모르죠?”

푸라 비다(pura vida)는 순수한 삶(pure life)을 뜻하는 스페인어라고 합니다. 코스타리카에서 종종 들을 수 있는 말이라네요. 삶의 속도는 느리고 사회적 유대와 공동체 의식이 발달한 덕분에 행복 지수도 높습니다. 지독한 경쟁사회인 한국과는 먼 풍경의 사회상. 느긋한 생활상과 생태적 삶은 어쩌면 좋은 커피 덕분이 아니었을까요.  

“역시 커피가 좋으면 행복 지수가 높다니까요.” 부러움을 담아 가제트에게 말했습니다. 로부스타 재배가 불법인 아라비카의 천국.
“맞아요. 생태, 생명, 교육, 인권과 같은 가치가 오래전부터 국가와 헌법으로 보장돼 있으니 사람도 커피도 다 좋은 것 아니겠어요?”  

코스타리카의 유서 깊은 복지정책은 유명합니다. 세계 최초로 1869년 무상 초등교육을 의무화한 것을 시작으로 무상 의료 정책도 펴고 있습니다. 가난을 줄여 일정 수준의 행복을 유지할 수 있다고 믿은 정치 엘리트들의 신념이 국가 정책의 뼈대가 되었습니다. 보험료를 못 낸 사람이나 미등록체류자도 무료로 치료해준다니. 이게 가능한 이야기냐고 되물을 사람이 많을 겁니다.  

가제트는 코스타리카가 어떻게 생태계를 지켜내고 생태적 삶을 꾸리는지 직접 볼 생각에 한껏 부풀어 있습니다. 코스타리카는 2021년 만들어진 환경 분야 노벨상으로 불리는 ‘어스샷(Earthshot) 상’ 5개 분야 중 자연보호 및 회복 분야에서 첫 수상했습니다.
사실 코스타리카는 1970년대 무차별 벌목 등으로 남미에서 산림 황폐화가 가장 심했던 나라였습니다. 이에 정부는 적극적인 산림보호 정책을 폈고 산림 비율을 50% 이상 끌어올렸습니다. 특히 놀라운 건, 2004년 석유를 발견했지만 개발하지 않았고, 전력의 99%를 재생에너지에서 얻는 등 생태 가치 보전에 전력을 쏟고 있습니다. 덕분에 단위 면적당 생물다양성이 세계 2위입니다. 코스타리카가 생태 관광지로서 주목받는 이유입니다.  

“코스타리카에서는 부처 중에서 환경부 힘이 가장 세대요. 군대를 버리고 생태와 평화를 얻은 나라이니 당연할 만도 하겠죠? 오죽하면 환경을 살리고자 군대를 없앴다는 말도 있대요. 이 정도면 살맛 날 텐데, 이게 다 커피의 힘이라고 할 거죠? 하하.” 

볼테르와 오마르 하이얌을 떠올리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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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렴. 부러움이 두둥실 떠오를 무렵, 느닷없이 볼테르가 떠올랐습니다. 1755년 포르투갈 리스본에서 리히터 규모 9.0의 엄청난 지진이 일어났습니다. 건물 대다수가 파괴되고 수만 명이 사망했으며, 식량 부족과 감염병 등이 도시를 휩쓸었습니다.
리스본 지진 3주 뒤 볼테르는 시를 남겼고, “리스본은 폐허가 되었는데, 여기 파리에서 우리는 춤을 추네”라고 읊조렸습니다. 그는 끔찍한 폐허와 불운을 똑바로 응시하자고 말했습니다. 인간과 신의 관계에 대한 고찰을 주문했습니다. 세상일을 신의 뜻으로 설명한 당대의 신정론을 부정했고, 계몽주의가 싹트면서 근대의 문이 열리기 시작했습니다. 

코로나19로 폐허가 된 세상에서 생태선진국 코스타리카로 향하는 가제트의 여정이 ‘전환사회’를 여는 작은 시금석이 됐으면 좋겠다는 바람이 떠올랐습니다. 단순히 코로나19 이전으로 회복이 아닌 기후위기와 맞물려 근본적인 전환을 꾀하는 디그로쓰(DeGrowth; 성장지양·탈성장) 사회 말입니다. 성장 강박과 화석연료 의존에서 벗어나 재생에너지와 순환경제를 기반으로 하는 경제 구조를 함께 꿈꾸고 싶습니다.  

코스타리카 커피는 첫사랑처럼 다시 다가오는 것일까요. 가제트에게 작은 부탁을 건넵니다. 코스타리카에서 커피를 마시면서 이 시를 읊어달라고, ‘포도주 한 병’을 ‘커피 한 잔’으로 바꾸어서….  

나뭇가지 아래 놓인 시집 한 권,
빵 한 덩어리, 포도주 한 병,
그리고 당신 또한 내 곁에서 노래하시니
오, 황야도 천국과 다름없습니다. 

_ 오마르 하이얌(11세기 페르시아의 수학자, 철학자, 시인), <당신이 내 곁에서 노래하고 있으니>

글 | 낭만(김이준수)
낭만 님은 미국 옥션 전문 인터넷매체 <옥션데일리>의 한국 디렉터를 맡고 있습니다. ‘행복하고 아름다운 세계는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멋대로 만들어내는 것’이라는 말을 현실화하고자 천천히 걷고 있습니다. 《마을을 상상하는 20가지 방법》을 썼고, 《그림자아이가 울고 있다》의 스토리텔링을 맡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