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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문학카페] 3인칭에서 2인칭으로… 빛나는 환희

‘당신’이라고 부를 수 있어 행복합니다

결핍이 욕구를 낳고 욕구는 우리의 행동에 동기를 부여합니다. 좀 모자라다는 생각이 들면 우리는 더 많아지고 싶고 더 잘 되고 싶어하지요. 제 경우에는 그랬습니다. 문제는 무엇이 결핍돼 있는가를 알아차리는 순간의 진실성에 있었습니다. 물질이 결핍되면 생활은 불편해지고 관계가 틀어지면 저는 쓸쓸했습니다.

생각해 보면 모든 사람살이가 물질이든 사람이든 상대적 가치에서 비롯되는 것은 아닐까 싶네요. 스스로를 응시하는 따스한 시선만큼만 다른 사람 즉, ‘당신’을 대한다면 우리는 얼마나 행복하고 만족하며 살 수가 있을까요?

지난 2006년 <타임>지가 선정한 ‘올해를 빛낸 인물’의 주인공이 ‘당신’이었습니다. 이 소식은 제게 매혹적이면서도 무척 신선하게 다가왔습니다. <타임>지 평론가 그로스먼은 “당신이 정보사회를 통제한다”는 말로 올해의 인물로 ‘당신’을 선정한 배경을 밝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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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 새로운 주체로서의 선언

정보사회라는 말을 굳이 딱딱하게 인유하지 않더라도 우리가 살아내고 있는 이 세상은 늘 ‘당신’들이 주인공이었다고 생각합니다. 다만 너무나 많고 흔하기에 잃어버리고 있던 가치를 타임지가 진지한 시선으로 들여다본 건 아닌가 싶습니다. 정보사회건 산업사회건 혹은 농경사회였던 간에 ‘내’가 살아가는 이유가 바로 ‘당신’이었던 것은 누구도 부인하기 힘들 겁니다. 물과 공기와 흙이 우리 삶의 버팀목이듯이 ‘당신’은 나이면서 너이고 우리 모두였으니까요.

<타임>이 선정한 ‘당신’은 현대 정보사회에서 문화텍스트의 주요 매개자이면서 창출자라는 매력 넘치는 힘의 주체입니다. 백과사전의 대명사격인 브리태니커의 아성을 무너뜨린 위키피디아는 익명의 ‘당신’들이 참여해 일약 지식의 표준체계로 자리 잡게 했습니다. 또한 블로그는 개인이 매체의 주체이자 정보가공자가 될 수 있다는 ‘당신’의 힘을 보여준 대표적인 경우입니다.

이라크 전쟁이 얼마나 참혹하고 무모한 짓인가를 보여줬던 블로그 작가 ‘살람 팍스’와 중국 경찰의 비무장 시위대를 향한 현장을 생생하게 고발했던 블로그 등은 어디선가 얼굴 없이 살고 있는 ‘당신’이 진정 이 세상의 진실을 향한 창이자 통로임을 보여준 사례라고 할 수 있을 겁니다.

국내에서도 이런 사례는 많습니다. 지하철 개똥녀 사건과 부실 도시락 사건, 어린이집 원장 폭행사건 등은 사회문화와 정부정책에 변화를 가져온, ‘당신’들이 만든 블로그가 가진 힘을 보여준 경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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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래학자 앨빈 토플러가 그의 저서 《제3의 물결》에서 처음 사용한 용어 중에 ‘프로슈머’라는 단어가 있습니다. 생산자(Producer)와 소비자(Consumer)를 합성한 이 용어는 자신의 취미활동에 몰두해 전문가 못지않은 식견과 영향력을 발휘하는 새로운 소비군을 뜻합니다. 현대 정보사회에서는 소비자가 소비만 하는 수동적인 입장에서 벗어나 제품의 개발과 유통과정에도 직접 참여하는 능동적인 소비자로 변화한다는 것을 예견한 것인데요. 이 역시 ‘당신’들의 힘을 보여주는 사례인 거죠.

굳이 블로그나 인터넷 매체를 언급하지 않더라도 ‘당신’들의 역할이 사회의 많은 변화를 가져올 것이 분명합니다. 조금 우려되는 것은 기존의 언론매체나 생산 기업들이 보여준 기득권 의식이 ‘당신’들이 펼쳐나가는 세상에는 없었으면 한다는 점입니다. 사생활의 침해나 잘못된 여론을 형성하는 일은 없어야 하겠다는 것이죠.

우리가 살면서 그 혹은 그녀였던 3인칭의 대상이 당신이라는 2인칭으로 바뀔 때의 간절함과 설렘이 그 자리를 대신했으면 합니다. 그였던, 혹은 그녀였던 사람이 나만의 ‘당신’이라고 불릴 때의 그 빛나던 환희를 여러분도 기억하시죠?

나와 너, 나와 그것

“길들인다는 게 무슨 말이니?”

“넌 여기 사는 아이가 아니구나. 무얼 찾고 있니?”

“사람들을 찾고 있어. 그런데 길들인다는 게 무슨 말이니?”

“사람들은 총으로 사냥을 해. 대단히 귀찮은 노릇이긴 하지만 사람들은 닭을 기르기도 해. 사람이란 그저 한 가지밖에 쓸모가 없다니까. 너도 닭이 필요하니?”

“아니 난 친구를 찾고 있어. 도대체 길들인다는 게 무슨 말이냐구.”

“모두들 잊고 있는 건데, 관계를 맺는다는 뜻이란다.”

“관계를 맺는다구?”

“응, 지금 너는 다른 애들 수만 명과 조금도 다름없는 사내애에 지나지 않는다. 그리고 나는 네가 필요 없구, 너는 내가 아쉽지도 않은 거야. 네가 보기엔 나도 다른 수만 마리의 여우와 똑같잖아? 그렇지만 네가 나를 길들이면 우리는 서로 아쉬워질 거야. 내게는 네가 세상에서 하나밖에 없는 존재가 될 것이구, 네게도 내가 이 세상에 하나밖에 없는 여우가 될 거야.”

“이제 좀 알아 듣겠어. 나에게 꽃이 하나 있는데, 그 꽃이 나를 길들였나봐.” 어린 왕자가 말했다. (중략)

“사람들은 이 진리를 잊어버렸어. 하지만 너는 잊어버리면 안 돼. 네가 길들인 것에 대해서는 영원히 네가 '책임을 지게 되는 거야. 너는 장미꽃에 대해서 책임이 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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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텍쥐페리의 소설 《어린왕자》의 일부를 조금 길게 인용해 보았습니다. 구성원의 역할 분담이 확실한 이런 시대에는 인간 대 인간은 형식적인 만남을 가질 수밖에 없지요. 이 아름다운 우화는 인간들이 현재의 삶의 고민들을 어떻게 이해하고 풀어나갈 지를 제시하고 있습니다.

‘관계를 맺는다는 말’에서 관계란 형식적이고 실용적인 사회적 사귐이 아니라 정서적 유대관계를 의미합니다. 또 “네가 길들인 것에 대해 영원히 네가 책임을 지게 된다”는 말 또한 의미심장한 질문을 던지고 있지요. 친구나 연인, 가족 구성원들에 대해 우리는 얼마나 책임을 지고 있을까요. 진정한 의미에서 인간의 정체성을 구현하는 방법이 과연 무엇인지 우리는 얼마나 생각해 봤을까요.

독일의 유대인 사상가인 마르틴 부버(Martin Buber, 1878-1965)는 《나와 너》에서 인간사회의 형식성과 경직성을 ‘인간들의 잘못된 관계 설정’으로 분석했더군요. 그는 인간들이 세계와 관계 맺는 방식이 두 가지라고 말합니다. 하나는 ‘나와 너(또는 당신)’이고 다른 하나는 ‘나와 그것’의 관계입니다.

‘나와 너(또는 당신)’의 관계는 주체와 주체의 만남을 의미합니다. 반면 ‘나와 그것’의 관계는 주체 대 주체의 관계가 아니라 주체 대 객체의 관계만을 의미합니다. 쉽게 말해 인간의 관계는 정서적이고 삶을 풍부하게 하지만 물질과의 관계에서는 소외될 수밖에 없다는 거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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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인칭 대명사 ‘당신’을 꿈꾸며

이 1인칭과 2인칭 대명사의 만남은 모든 만남과 관계가 지향해야 할 근원으로 볼 수 있습니다. 우리가 ‘너’ 또는 ‘당신’이라고 부르는 순간의 설렘과 정서적 평화는 모든 정신적 에너지의 근원이 되지요.

직장에서, 모임에서, 혹은 어떤 익명의 관계에서 3인칭인 ‘그것’과의 만남에서 시작한 인간의 관계가 어느 날 2인칭의 관계로 돌아설 때 우리는 그것을 사랑이라고도 부르고 친구라고도 부르지 않나요? 2인칭 대명사 ‘당신’은 그래서 특별합니다. 그 말소리에는 마음을 풀어주는 생명의 힘이 있고 정서적 환희가 깃들어 있죠.

지금 누군가를 “당신”이라고 나직이 소리 내 불러보세요. 그 묘한 음성의 화음이 퍼뜨리는 인간적인 냄새를 한 번 맡아보시죠.

글 | 오형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