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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커피 에피소드] 위대한 음악가의 ‘사랑과 우정 사이’

‘커피열매를 닮은 남자’ 브람스

클래식 애호가는 아니어도 어쩌다 한 번씩 들을 때마다 귀에 쏙쏙 들어오는 클래식 레코드가 있습니다. 제 경우에는 독일 신고전주의 작곡가 요하네스 브람스(Johannes Brahms; 1833-1897)의 <헝가리무곡 5번>이 그렇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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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하네스 브람스(Johannes Brahms)

이 음악을 듣고 있으면 저는 평생토록 한 곳에 정주하지 못하고 길 위를 떠도는 어느 유랑 민족의 신산한 운명과 모닥불 주위를 동그랗게 에워싼 채 열정적인 몸짓으로 춤사위에 빠져 있는 야성적인 남녀의 모습이 겹쳐 떠오릅니다. 천형(天刑)과도 같은 집시들의 고달픈 인생, 그러면서도 강렬함과 비장미가 뒤섞인 그들의 삶을 이토록 간명하게 오선지 위에 옮겨놓은 곡도 그리 많지 않을 겁니다.

집시들은 거의 모든 유럽 나라에서 천민취급을 받으며 평생 이곳저곳을 떠돌며 살아야 했던 민족이었습니다. 하지만 집시들에게는 자신들에게 전해진 질곡의 역사를 음악으로 표현하는데 천부적인 재능이 있었죠. 브람스 역시 집시음악의 매력을 느끼고 평생 동안 지대한 관심을 보인 음악가 중 한 명이었습니다.

그가 처음 집시들의 음악에 흥미를 갖게 된 것은 젊은 시절 유럽 연주여행을 함께 했던 헝가리 출신의 바이올리니스트 레메니 덕분이었습니다. 그를 통해 처음으로 헝가리 집시음계라고 불리던 ‘헝가리안 장음계와 단음계’를 접한 브람스는 그 강렬한 원형질의 매력에 끌려 기회 있을 때마다 집시음악을 채보해 편곡작업을 게을리 하지 않았습니다. 그 중의 한 곡이 바로 1869년 피아노 독주곡으로 발표됐던 ‘헝가리무곡 5번’이었던 것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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춤을 추고 있는 집시 여인.
브람스는 집시음악에 큰 관심을 보였다. by Luciano, flicker (CC BY)

존경과 사랑을 바친 ‘음악 친구’ 슈만

레메니를 따라 유럽 각 도시를 돌아다니며 연주여행을 하던 1853년, 독일 하노버에 도착한 브람스는 그를 통해 바이올린의 대가로 인정받고 있던 요제프 요아힘을 소개받게 됩니다. 요아힘은 약관 스무 살에 불과한 브람스의 천재성을 한 눈에 알아보고 곧 소개장을 하나 써주게 되죠. 다음 여행에서 혹시 뒤셀도르프에 들르게 되면 꼭 이 사람을 찾아가보라는 당부와 함께 말입니다.

요아힘이 소개해 준 것은 그 당시 음악계에서 작곡, 지휘, 평론으로 명성을 날리고 있던 슈만(Robert Alexander Schumann)이었습니다. 하지만 사실 브람스는 슈만에 대해 좋지 않은 감정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왜냐하면 바로 얼마 전 <음악신보(Neue Zeitschrift für Müsik)>라는 잡지를 발행하고 있던 슈만에게 작품을 보낸 적이 있으나 보기 좋게 무시당했기 때문이었죠.

여러 가지 일로 눈코 뜰 사이 없이 바빴던 슈만은 봉투를 개봉하지도 않은 채 반송했고 브람스는 그 일로 자존심에 큰 상처를 입은 상태였습니다. 요아힘의 추천장을 받아든 후에도 잔뜩 화가 나있던 브람스는 이제 절대로 슈만 따위는 찾아가지 않겠다고 버텼습니다. 하지만 화가 어느 정도 가라앉은 후 슈만의 작품을 천천히 살펴본 브람스는 이 중년의 음악가에게 어느덧 존경의 마음을 품게 되었고 그해 가을, 드디어 슈만의 집을 방문하게 됩니다.

슈만을 직접 만난 브람스는 곧 자신의 경솔함을 뉘우치게 됩니다. 자신이 생각한 것처럼 슈만이 사회적 성공에 도취되어 다른 사람들을 얕보거나 무시하는 오만한 사람이 아니었던 거죠. 오히려 브람스가 작곡한 피아노 소나타를 직접 들어본 슈만은 이 경이로운 천재의 음악성에 칭찬을 아끼지 않았고, 자신이 발행하던 잡지를 통해 브람스를 ‘크로노스의 머리에서 완전무장한 미네르바처럼 갑자기 나타난 거장’이라며 격찬했습니다. 당시 그의 일기장에는 하루도 빠지지 않고 브람스의 음악적 재능을 칭찬하는 글이 등장할 만큼 슈만 역시 진심으로 브람스의 작품을 높게 평가했던 듯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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슈만 박물관. by Vwpolonia75, Wekimedia (CC BY-SA)

슈만의 지원은 브람스의 인생에 중요한 분기점이었습니다. 음악적 재능은 의심의 여지가 없었지만 낭만파 음악이 득세하고 있던 시대에 보수적인 독일 고전주의적 경향이 강한 브람스의 음악적 색채는 자칫 비주류이거나 이질적인 것으로 비춰질 수도 있는 상황이었죠.

그런 와중에 이미 독일 음악계에 큰 영향력을 갖고 있던 슈만의 찬사는 브람스가 작곡가로서 널리 인정받을 수 있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이에 그치지 않고 슈만은 브람스를 여러 음악가들에게 소개해주며 음악적 발판을 만들어주려는 노력을 아끼지 않았습니다. 브람스로서는 말 그대로 평생의 은인을 만난 셈이었던 거죠.

스무 살에 만난 ‘은인의 아내’ 클라라

그해 가을, 약 한달 간 슈만의 집에 머물며 브람스는 슈만과 스물세 살이라는 나이차를 떠나 깊은 우정을 나눴습니다. 브람스의 음악적 재능에 호감을 보인 건 슈만뿐만이 아니었습니다. 슈만의 아내인 클라라 역시 남편 못지않게 브람스의 재능에 탄복하며 격려를 보내주던 든든한 음악적 동지였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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슈만의 아내 클라라

클라라는 매우 사려 깊고 아름다운 여성이었습니다. 열여덟 살 때 아버지의 반대를 무릅쓰고 자신보다 아홉 살 많은 무명의 작곡가 슈만과 결혼을 강행했을 만큼 강단도 있는 여성이었죠. 무엇보다도 그녀는 진심으로 음악을 사랑하고 그 자신도 뛰어난 재능을 가진 여성이었습니다.

아홉 살 때 첫 공식연주회를 가진 뒤로 38회나 국외연주회를 벌였을 만큼 당대에도 손꼽히는 피아니스트였던 그녀의 후원자 중에는 문호 괴테, 바이올린 마스터 파가니니, 피아니스트 리스트, 작곡가 멘델스존 같은 명사들도 있었습니다. 그랬으니 청년 브람스가 원숙한 미모와 사교성, 음악에 대한 해박한 지식과 재능을 두루 갖춘 이 서른네 살의 아름다운 여성에게 은연 중 흠모의 마음을 품게 된 것도 이상한 일은 아닐 겁니다.

하지만 브람스는 스승이자 은인인 슈만과의 의리를 저버릴 만큼 경박한 사람은 아니었습니다. 클라라를 향한 연모의 마음은 브람스의 마음속에서만 활활 타오르는 불길이었죠. 브람스는 클라라에 대한 짝사랑을 내색하지 않은 채 창작에 더욱 매달렸습니다. 그렇다고 스무 살 청년의 정념이 쉽게 수그러들 리는 없었습니다. 갈수록 커져만 가는 연모의 정 때문에 브람스의 번민도 깊어만 갔습니다.

당시 그가 작곡하고 있던 작품 ‘피아노 4중주 C단조 작품 60’의 도입부에는 진퇴양난에 놓인 자신의 처지를 암시하는 듯한 일화가 전해집니다. 친구에게 보낸 편지에서 그는 곡의 도입부에 대해 설명하며 이렇게 마음을 토로했다고 합니다.

“이 곡은 곧 자신의 머리를 향해 방아쇠를 당기려고 하는 한 남자를 상상하며 쓰고 있네. 그에게는 다른 선택의 여지가 없어. 왜냐하면 그에게는 달리 할 수 있는 일이 없으니 말이야.”

브람스는 클라라에 대한 사랑과 자신의 은인이며 친구인 슈만에 대한 죄책감 사이에서 갈팡질팡하고 있었습니다. 그가 처해 있던 상황은 마치 이룰 수 없는 사랑에 절망해 권총자살로 생을 마감하는 괴테의 소설 속 주인공 베르테르를 연상케 할 만큼 비극적이었죠.

그런데 브람스가 클라라를 만난 지 3년째 되던 1856년 7월, 이런 악몽의 사슬을 끊어낼 운명적인 사건이 일어납니다. 정신착란으로 라인강에서 투신자살을 기도한 뒤로 요양원에 입원해 있던 슈만이 2년여의 투병 끝에 숨을 거두고 말았던 것이죠. 브람스는 사랑하는 남편을 보내고 슬픔에 빠져 있던 클라라의 곁에서 그녀가 다시 몸과 마음을 추스르도록 사심 없이 물심양면으로 도움을 주었습니다.

그리고 얼마간의 시간이 흐른 뒤 브람스는 드디어 혼자가 된 클라라에게 조심스럽게 우정과 연모가 뒤섞인 자신의 감정을 우회적으로 고백합니다. 이미 7남매의 엄마인데다 열네 살이나 연상이었던 은인의 아내였지만 브람스는 더 이상은 자신의 마음을 숨길 수 없었습니다.

하지만 클라라의 입장은 단호했습니다. 클라라는 기품을 잃지 않은 태도로 자신은 여전히 슈만의 아내라는 사실을 상기시키며 앞으로도 브람스에게 오직 ‘모성애와 다를 바 없는 우정’만 줄 수 있다고 이야기합니다.

짝사랑 연인 곁에서 평생 독신으로

클라라 역시 나이에 비해 사려 깊고 진중한데다 뛰어난 음악적 재능으로 앞날이 창창한 젊은 브람스에게 호감을 느끼지 않은 건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브람스와의 우정을 통해 그녀 역시 삶에 대한 새로운 의미를 느끼고 마음의 위안을 느끼던 차였지요. 하지만 그녀는 계속되는 브람스의 구애를 거절한 채 슈만의 생전에 그랬던 것처럼 음악적 동반자이자 친구로 남기를 고집했습니다.

그녀의 대답에 낙담한 브람스는 결국 클라라의 곁을 떠나갔을까요? 이후 40여 년 동안 브람스는 결혼도 하지 않고 평생을 독신으로 지내며 우리가 아는 숱한 명곡을 작곡했습니다. 물론 클라라의 곁을 떠나지도 않았지요. 그랬다면 아마도 이 글의 주인공으로 등장하지도 않았을 겁니다.

평생 클라라와 변치 않는 우정으로 맺어진 브람스는 클라라에 대한 지고지순한 사랑을 창작에 대한 열정으로 승화시켜 1865년 어머니의 죽음 이후 착수해 3년 만에 완성한 <독일레퀴엠>을 비롯해 <알토랩소디>, <승리의 노래> 등 클래식 팬들의 사랑을 받는 관현악곡과 성악곡, 교향곡들을 세상에 내놓았습니다. 무려 20년 동안 구상해온 <제1교향곡>을 비롯해 <바이올린협주곡(D장조)>와 <바이올린소나타>, <대학축전 서곡> 등의 명곡들도 차례로 선을 보이며 작곡가로서 원숙한 기량을 입증하기에 이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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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 바덴바덴에 있는 브람스하우스.브람스의 숨결이 들리는 듯하다.
이웃한 곳에 클라라의 집이 있었다.

브람스의 명성은 더욱 높아졌고 중년에 접어들기도 전에 그는 어느덧 모든 유럽인들이 인정하는 세기의 음악가로 불리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의 뒤에는 어머니처럼, 연인처럼, 친구처럼 브람스의 음악적 성장을 지켜봐주는 클라라가 있었습니다.

그녀를 만난 스무 살 때 이후 45년간 이어진 브람스의 음악인생 모두가 실은 그녀에게 바치는 사랑의 헌사였는지도 모르겠습니다. 1897년 예순네 살의 나이로 세상을 떠날 때까지 브람스의 마음속에 자리 잡고 있었던 단 한 사람의 여인은 클라라뿐이었습니다. 영원히 지구 주위를 선회해야만 하는 달의 운명처럼 브람스는 평생 동안 클라라 곁을 떠나지 않았습니다.

사랑하면서도 평생 일정한 거리를 두고 서로를 지켜보았던 이 두 사람의 숭고한 관계를 대체 어떤 말로 설명할 수 있을까요. 하지만 브람스는 정말 태어날 때부터 신의 계시라도 받은 사람처럼 한 평생 클라라에 대한 사랑을 거두지 않았습니다. 젊고 아름다운 여인들의 구애조차 마다하고 자신의 곁을 맴돌기만 하는 브람스를 지켜보며 클라라는 또 어떤 생각을 했을까요?

지독한 커피애호가였던 브람스는 생전에 매일 아침 진하고 독한 블랙커피 한 잔을 마시며 일과를 시작하는 습관이 있었습니다. 커피에 대한 그의 취향도 무척 외골수인 데가 있어서 자신만큼 향기가 짙은 커피를 끓이지 못한다는 이유로 매일 아침 손수 커피를 끓여 마셨다지요.

생의 마지막 순간까지 슈만의 아내로, 브람스의 친구로 남길 바랐던 클라라는 브람스보다 한 해 앞서 77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나기 전 “그의 음악은 투박한 껍질 안에 가장 달콤한 알맹이가 들어있는 커피열매와 같다”고 말했다고 합니다. 하지만 생각해보면 어디 그게 음악뿐이었을까요?

이 한마디 말 속에는 평생 동안 자신에 대한 사랑을 버리지 못한 채 수도승 같은 삶을 살아온 브람스에 대한 연민과 고마움이 절절히 배어 있습니다. 어쩌면 그건 살아생전 그의 사랑을 받아줄 수 없었던 클라라가 브람스에게 보내는 최고의 찬사였겠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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겉은 커피 열매처럼 투박하고 무뚝뚝하지만 마음 속에 달콤한 사랑을 품고 살았던 요하네스 브람스. 이 위대한 음악가를 생각하며 저는 오늘도 커피 한 잔이 전해주는 인생의 교훈을 다시 한 번 떠올려 봅니다.

 

글 | 김정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