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커피 볶는 마을
[커피 에피소드] 외상 인심 넉넉했던 문화예술 아지트

‘낭만 다방’ 100년사 ①

[커피 에피소드] 외상 인심 넉넉했던 문화예술 아지트.

무언가를 끊임없이 사유하고 글의 구성이나 완성도에 관심이 많은 작가라는 직업은 조용하고 독립된 공간을 선호하기 마련입니다. 작가에 대한 우리의 선입견, 즉 며칠씩 날밤을 새느라 퀭해진 눈과 헝클어진 머리칼, 재떨이에 수북하게 쌓인 담배꽁초, 책상 주변에 널려 있는 파지들, 희다 못해 파리하기만 한 피부 등의 이미지도 그 외롭고 쓸쓸한 공간과 시간에서 연유한 것인지도 모르죠.  

식민지 예술인과 지식인들의 사랑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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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을 거슬러 올라간 일제강점기 때 이 땅의 가난한 문인들은 주로 어디서 글을 썼을까요? 자택을 제외한다면 일제시대, 그리고 산업화가 시작되기 전 문인들이 ‘창작 활동을 위해’ 애용하던 장소는 다름 아닌 다방(茶房)이었습니다. 독립된 집필실이나 서재는커녕 대가족이 두세 개의 방을 나눠 써야 했던 그 시절, 가난한 문인들에게 다방은 그나마 글에 몰두할 수 있는 유일한 집필 공간이었습니다.  

문인들이 다방을 즐겨 이용하기 시작한 건 초창기 다방 주인들이 대부분 식민지 치하에서 활동하던 예술가들이라는 점 때문일 겁니다. 알다시피 국내에 처음 다방이란 형태의 커피판매점이 생긴 건 1920년대 초반이죠. 충무로 근처에 일본인이 운영하던 ‘후타미(二見)’란 다방이 그것입니다. 하지만 그때만 해도 다방을 이용하는 건 주로 일본인들이었습니다.  

그러다가 1927년 드디어 종로2가에 조선사람 이경손이 운영하는 ‘카카듀’가 문을 열게 됩니다. 이경손은 소설, 동화를 쓰기도 한 작가인 동시에 <춘희>, <장한몽> 등의 영화를 만든 영화감독이었습니다. 말 그대로 예술적 소양이 풍부한 사람이었던 거죠. 이경손이 데려온 하와이 출신의 미녀가 상주하고 있었다고 하는 카카듀에는 자연스럽게 주인과 친분이 있는 문인, 화가, 음악인 등 많은 예술가들이 찾아와 객담을 나누거나 커피를 마시기 시작했습니다. 하지만 벽면에 커피 포대(마대)를 걸고 한국의 전통 탈을 진열해 실내장식을 했다던 카카듀는 몇 달 지나지 않아 경영난으로 문을 닫고 말았고 이경손 역시 가산을 정리해 상해로 떠나버리고 맙니다.  

1929년 11월 3일, 카카듀가 사라진 종로 2가에 이번에는 ‘멕시코’란 다방이 모습을 드러냅니다. 주인은 일본미술학교 도안과를 나온 화가 김영규와 배우로 활동하고 있던 심영이었습니다. 다방을 개업할 때 주인들과 알고 지내던 많은 예술가들이 조금씩 재능기부를 했다고 하는데 의자, 테이블, 실내장식에 아이디어를 제공한 것이 화가 도상봉과 구본웅, 사진작가 이해선, 무대장치가 김정환 등이었습니다. 이들은 모두 동경 유학을 다녀온 당대의 엘리트이자 유행을 선도하던 모던보이였습니다. 그래서인지 수많은 예술인, 언론인, 지식인들이 ‘멕시코’에 관심을 갖기 시작하죠. 

이 전설적인 다방에 대해서는 지금도 재밌는 일화들이 많이 전해집니다. ‘멕시코’는 커피뿐만 아니라 50여 종의 양주를 구비해 놓고 손님들에게 실비로 제공하는 다방 겸 주점이었는데, 얼마 지나지 않아 조선 문단의 실세로 행세하고 있던 춘원 이광수(소설가)를 비롯해 홍종인(음악평론가), 김을한(언론인), 복혜숙(배우), 서월영(배우) 등 많은 예술인과 지식인들이 이곳을 사랑방처럼 드나들기 시작합니다. 훗날 친일 작가로 오명을 남기게 되는 이광수는 그때만 해도 근대문학의 선구자이자 중견 언론인으로 존경을 받고 있었죠. 말 그대로 일제의 요시찰 대상이었던 겁니다. 그런 이들이 자주 이용하던 장소인 탓에 ‘멕시코’는 일본 고등계 형사들의 감시를 받았고, 가끔은 주인 김용규가 사소한 일로 트집을 잡혀 유치장 신세를 지고 나오는 일도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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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강점기 활동했던 문학평론가 이헌구가 1938년에 그린 서울 거리의 다방 약도

외상값 때문에 문 닫은 다방 ‘멕시코’ 

다방 운영을 전담했던 김용규는 ‘멕시코’를 운영해 돈을 벌 생각은 없었습니다. 막연하게나마 ‘조선의 젊은 문화인들에게 만남의 장소를 마련해주겠다’는 생각으로 운영하던 곳이었죠. 그래서 이곳은 아침 11시부터 밤늦게 까지 문을 열었는데 특히 가난한 예술인들에게 외상을 잘 주는 것으로도 유명했습니다. 커피 한 잔에 10전 정도를 받았다고 하니 애초부터 수지타산이 맞지 않는 장사였죠. 아무튼 다른 곳에 비해 커피 값이 싸고, 외상 인심도 후한 이곳은 곧 가난한 문화예술인들의 아지트로 널리 사랑을 받게 됩니다. 손님들마다 아예 이곳을 연락장소로 이용했기 때문에 메모용지를 맡아 관리하는 사환을 둘 정도였다고 합니다.  

하지만 이 낭만적인 풍경도 2년 만에 막을 내리게 됩니다. 짐작하다시피 폐업 이유는 운영난 때문이었습니다. 개업한 지 2년 만인 1931년 8월 문을 닫을 때 ‘멕시코’에 미수로 남은 외상값은 무려 3,500원이 넘었고, 손님들의 사인을 받아둔 외상전표가 커다란 구두상자 하나를 채우고도 남았다고 합니다. 당시는 서울의 고급주택지가 평당 30원 안팎에 거래될 때였습니다. 이렇듯 적자가 심한 데도 외상값 독촉을 하지 않았으니 어지간히 인심 좋은 주인들이었던 거죠. 그렇다고 해서 함부로 그들의 경제관념을 탓할 이유는 없습니다. 대책 없는 낭만주의자 혹은 박애주의자일망정 이들 덕분에 다방은 커피만 마시는 장소가 아니라 문화와 예술을 향유하고, 지식을 전달하는 소통의 장소로 정착될 수 있었으니까요. 

꼭 ‘멕시코’ 다방의 영향 때문이라고 할 수는 없지만 종로, 충무로, 명동, 소공동 일대에는 그 이후로 비슷한 유형의 다방들이 우후죽순처럼 생겨나기 시작합니다. 동경미술학교 출신의 화가 이순석이 개업한 ‘낙랑파라’, 시인 이상이 운영했던 종로1가 ‘제비’, 극작가 유치진의 소공동 ‘플라타너스’, 배우 복혜숙의 인사동 ‘비너스’ 등이 당시 예술가들에게 많은 사랑을 받았던 다방들이었죠. 그 뿐 아니라 토월회에서 배우로 활동했던 연학년의 명동 ‘트로이카’, 음악평론가 김억이 주인인 소공동 ‘엘리사’, 영화감독 방한준의 명동 ‘라일락’ 역시 예술가, 지식인들의 사랑방으로 큰 인기를 누렸습니다.  

이 무렵부터 다방은 커피나 홍차를 파는 본래적 의미의 다방과 커피 및 맥주, 양주 등의 주류를 취급하는 카페 형태로 양분화 되는 모습을 보이게 됩니다. 즉 고급술과 여급을 갖춘 카페가 자연스럽게 자본가, 관료 등 이른바 식민지 상류층들이 이용하는 소비적 공간으로 탈바꿈해 간 데 비해 다방은 가난한 지식인, 예술가, 학생들의 집필실이나 모임장소로 완전히 자리매김하게 되는 것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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잡지 《삼천리》에 게재되었던 서울 종로, 명동 일대의 다방 광고들

문인들이 다방을 떠나지 못한 이유 

많은 예술인들이 카페가 아닌 다방의 고객으로 남은 것은 단순히 경제적 이유 때문만은 아니었습니다. 지식인에게는 자신의 주의 , 주장 혹은 작품에 대한 이야기를 경청해줄 청중과 그것을 보완하고 비평하며 격려해줄 동료 집단과의 접촉이 필수적인 요소입니다. 식민지 조선의 다방 역시 유럽 각국에서 커피하우스가 발달해온 경위와 비슷한 과정을 밟아가기 시작한 것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위에 언급했던 초창기 다방들도 출판 기념회, 시 낭송회, 음악 감상회, 서화 전시회 등의 문화행사를 주기적으로 개최해 큰 주목을 끌게 됩니다. 물론 여기 초대된 작가나 청중 또한 실은 그곳의 단골손님인 동료, 청중들이었죠. 이런 식으로 다방은 신물문과 지식을 나누는 사교의 장이자 문화공간으로 활동 영역을 넓혀가게 됩니다. 그럴수록 예술과 지식에 목마른 룸펜, 학생들까지 아예 하루 일과처럼 시내 여러 곳의 다방을 기웃거리게 되었죠.  

다방은 예술가들, 그 중에서도 특히 문인들에게 무척 유용한 창작 공간이었습니다. 문인들은 화가나 음악가, 영화인들처럼 창작 활동에 별도의 도구가 필요하지 않은 직업군입니다. 글 쓰는 일은 이젤이나 물감을 펼쳐 놓을 필요도 없고, 악기가 필요하지도 않습니다.
그래서 다방 풍속도를 전하는 당시의 신문기사들을 보면 구석 자리에 홀로 앉아 시상(詩想)을 고르거나, 동료 문인들과 상의해가며 시구(詩句)를 다듬는 문인들의 이야기가 많이 나옵니다. 그 뿐만 아니었죠. 하나의 작품을 주제로 각자의 문학관을 토로하기도 하고, 서구 문단의 정보와 지식을 교환하는 것도 언제든 가능했습니다. 특히 탈고한 작품이 활자화되기 전 동료 문인들에게 작품을 공개해 의견을 청취하는 것도 다방에서 이뤄지던 중요한 행사였죠.  

그러다보니 다방에는 얼치기 문인들도 없진 않았습니다. 하루 종일 다방에 죽치고 앉아 너나 할 것 없이 작가를 사칭하는 바람에 당시 신문에 ‘머리와 수염을 길게 기른 스무 살 남짓한 애송이가 겨드랑이엔 책을 끼고 다방에 와서 문학을 논하고 작가를 비평하고 영화를 아는 체하지만 기실은 아무 것도 모르는 얼간이들’이라는 풍자글이 등장하기도 할 정도였죠. 그런가 하면 다방을 중심으로 이뤄지는 폐쇄적 작풍을 비판하는 이런 글도 있습니다.
“다방 예술! 이런 것이 나온다 할지라도 우리는 거기에 많은 것을 기대할 수 없다. 시대의 불안과 생활의 과로가 너 나를 불문하고 다방의 한 구석으로 끌어감이 사실이지만, 냉정하게 돌아보면 다방이란 결코 고마운 존재가 아님에는 틀림이 없다. 다방 경영하는 예술가들도, 거기 모이는 시대의 예술가들도 마땅히 다방을 뒤로 하고 밖으로 나서야 할 것이다.”

소설가 박태원은 1934년 8월, 이런 비생산적인 작태를 풍자한 <소설가 구보 씨의 일일>이란 세태소설을 발표하기도 합니다. 실제로 당시 문인들의 집합소 역할을 하던 ‘낙랑파라’를 모델로 한 작품이었죠 작가는 소설의 주인공 구보 씨를 내세워 하는 일 없이 다방, 백화점, 전차, 역전, 술집, 거리를 배회하는 식민지 예술가의 일상을 담담하게 그려내고 있습니다.  

박태원이 실제로 중편 분량의 그 소설을 다방에 앉아 썼을 리는 없을 겁니다. 하지만 그 역시 작품을 구상하며 하루 종일 담배연기로 자욱한 다방의 풍경과 시적(詩的) 유희를 탐하는 문인들의 공허한 목소리를 떠올렸을 겁니다. 어쩌면 그 무기력하기만 한 일상은 작가 자신의 것이었는지도 모르지요.

다방은 그 후 1970년대까지도 문인들의 집필 공간으로 변함없는 사랑을 받게 됩니다. 그곳에는 일일이 이름을 열거하는 게 무의미할 만큼 근대기에 활동했던 모든 작가들의 발자취가 남겨져 있죠. 그곳에서 문인들은 열심히 글을 쓰고, 문학을 논하고, 독자를 만났습니다. 하긴 누군들 그 아늑한 공간을 제 발로 박차고 나설 수 있었을까요. 그토록 사랑하는 커피와 문학, 음악, 동료, 언론, 독자가 모두 다 거기 있는데…. (2편으로 이어집니다.)

글 | 편집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