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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상의 쉼표
[인간극장] ‘리조’씨의 움직임 교육

여성에게 월담을 허하라

《서울에 딴스홀을 허하라》. 이 묘한 제목의 책은 내 애장품 중의 하나다. 10년 넘게 간직하며 가끔씩 꺼내 보곤 하는데, 모던걸과 모던보이가 넘쳐나던 1930, 40년대 잡지에 실린 기고문들을 모아둔 책이라 꽤 흥미롭다.

이것저것 펼쳐보면, 책에 실린 글들은 그 당시로 여행을 안내하기고 하고, 또 시대가 얼마나 변화했나 가늠해 보게도 한다. ‘경성에 딴스홀을 허하라’는 1937년 〈삼천리〉라는 잡지에 실린 기고문의 제목이기도 하다. 일제는 퇴폐를 조장한다며 여성들의 댄스홀과 카페 출입을 금지하자 기생 오은희, 오늘날의 다방인 끽다점 ‘비너스’의 마담 복혜숙 등이 잡지에 글을 기고했다.
여성이라는 이유로 많은 것들이 제한되던 그 시절, 1인시위 문구 같기도 한 이 타이틀이 나에겐 무척이나 도발적이며 뭔가 모를 짜릿한 쾌감을 불러일으키곤 한다. 하지만 또 한 편 생각해 보면, 백 년 가까운 시간이 흘렀음에도 얼마나 많은 것들이 변하지 않고 단단하게 제 자리를 지키고 있는지 문득 깨닫게도 한다.  

단 한번도 ‘운동장’을 가져보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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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디가 나에게 넌지시 채 한 권을 내민다. 해보고 싶은 아이템이란다. 책 제목은 《우아하고 호쾌한 여자 축구》다. “처음 공을 찼을 때 복사뼈께에 닿던 공의 느낌, 경기를 끝낸 후, 숨이 터질 것 같은 심장의 통쾌감, 이건 내가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기쁨입니다.”
이런 신앙 고백을 하는 여성들의 이야기, 한 마디로 축구하는 여자들 이야기를 하자는 거다. 참으로 신선한 아이템이긴 했지만 뭘 얘기하려는 건지 가닥이 잡히지 않는 아이템 후보였다. 저자의 문제의식의 시작은 여성들은 단 한번도 ‘운동장’을 가져보지 못했다는 거였다. 운동장이라!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몸치였던 나에겐 운동장을 갖고 싶은 욕망이 티끌만큼도 없었다. 그러니 운동장에 대한 욕망을 알 턱이 없다. 그런데 얘길 들어보니 말이 되는 이야기였다.  

남성 여성의 사회적 역할이 너무도 확연히 나뉘는 사회 분위기 속에서 언제나 운동장을 남학생들 차지였고, 여학생들은 의례 운동장 구석에서 고무줄놀이를 하거나 도란도란 수다를 떨곤 했다. 그들 역시 나처럼 운동장에 대한 욕망이 아예 거세되었으니 저항감도 별로 없었다.
그렇게 자란 여성들이 늦바람이 났다. 운동장을 가져보지 못한 10대, 몸매를 신경 써야 하는 20대를 지나 출산의 의무까지 다 마친 30, 40대의 여성들이 축구라는 스포츠를 만났고, 그제야 비로소 운동장을 자신의 것으로 만든 작은 영웅들이 되었다는 거다. 책을 몇 장 들춰보니, 단순히 스포츠 도전기가 아니었다. 여성성이란 이름의 사회적 벽이 얼마나 높은지, 해볼 만한 이야기였다. 무엇보다도 여성문제를 딱딱하고 어려운 사회적 개념으로가 아니라, 생활 속의 문제로 접근한다는 게 매력적으로 다가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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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형지물 이용해 뛰고 넘고 구르기

프로그램 때문에 특별한 사람들을 만나기 시작했다. 그때 만난 ‘리조’라는 여성은 짧은 머리에 티셔츠를 입은 미소년 같은 모습이었다. 그는 움직임연구소 ‘변화하는 월담’ 대표. 특기는 ‘파쿠르(Parkour)’다. 파쿠르는 도시의 지형지물을 이용해 인간 한계에 도전하는 일종의 익스트림 스포츠다. 처음엔 빌딩에서 빌딩으로 넘어 다니는 액션 스타의 멋진 모습을 기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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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THOR - Parkour Foundation Winter, wikimedia (CC BY)


하지만 ‘리조표’ 파쿠르는 익스트림 스포츠와는 영 다른 움직임이었다. 그렇게 격렬하지도 않았고 목적도 영 딴판이었다. 자기가 살고 있는 지형지물을 이용해서 움직임의 능력을 회복하는 것이 그만의 스포츠의 목적. 몸을 움직여 딱딱하게 굳어있는 마음을 녹이고 단절돼 있는 사회적 관계까지 원래대로 만드는 것이 그가 움직임을 가르치는 원리였다. 평생을 손가락과 머리로만 살아온 나에겐 참으로 신선한 분야였다. 다시 태어난다면, 아니 제2의 직업을 만든다면 머리가 아닌 몸으로 살아보고 싶다는 나의 욕망을 자극하기 충분했다.  

그는 좋은 대학에서 행정학을 전공한 재원이었다. 좋은 스펙을 가진 그녀는 졸업 후 전공을 살려 외국기업에서 일을 했다. 매일 사무실에 앉아서 살아야 하는 게 쉽지 않았던 그는 대부분의 현대인이 그렇듯 그 놈의 밥벌이에 매달리느라 영혼은 탈탈 털리고 허리 병까지 얻었다. 몇 년 후, 그녀는 직장을 그만두고 ‘어떻게 살 것인가’를 고민했다.
그때 그녀의 잡아 끈 것은 어릴 적 경험이었다. 아버지 직업 때문에 초등학교 시절에 유럽에서 몇 년 학교를 다녔던 그. 수학적 원리도 문학적 표현도 몸을 이용해 터득했던 당시의 교육이 그녀를 사로잡았고, 결국 움직임 교육을 통해 삐뚤어지고 편향된 교육을 바로잡아 보고 싶어졌다. 그렇게 시작한 것이 그녀만의 파쿠르 움직임 교육이었다.  

촬영을 위해 시연된 그의 첫 수업, 귀농자들이 많은 홍성의 3,40대 주부들을 대상으로 하는 움직임 수업이었다. 그곳은 취재 허가가 까다롭기로 유명한 곳인데, 리조와 움직임 교육을 알리는 일이라면 기꺼이 촬영 협조를 해주겠다고 나섰다. 작년에 이어 올해 이어진 움직임 수업, 맨발로 땅을 딛는 것부터 시작했다. 이어서 한 발로 서기. 자신이 얼마나 균형이 깨져있는지 확인하는 시간이다. 대부분의 스포츠 센터에서 운동을 시킬 때는 공포 분위기를 조장하며 허리가 휘었네, 어깨가 굳었네, 이렇게 유연성이 없으면 큰일 나네 등등 위협을 주기 마련이다. 하지만 이 수업에선 그런 협박은 없다. 스스로 자신을 들여다보고, 움직임을 살피면 그만이다. 서기와 걷기에 이어, 뛰어가 벽 타보기, 구령대 넘어보기….  

점점 수위가 높아지는데, 수업이 진행되는 동안 어느새 주부들은 어린 시절로 돌아간 듯, 신이 나있다. 허구한 날 아이들 위험하게 놀면 말리러 다녔는데, 오늘은 아이들에게 하지 말라고 했던 그 모든 행동을 스스로 하고 있다는 사실에 모두 놀란 눈치였다.
움직임 수업이 끝난 후, 숙제를 하듯 오늘 수업에 대한 소회를 적고 그것을 발표했다. 흰 종이에 적힌 그들의 고백은 온통 반성문이었다. 그 중 가장 인상적이었던 건, 자기는 여태 움직이는 것을 싫어하는 사람인 줄 알았다는 것이다. 조신하라, 얌전히 행동하라는 사회적 주문에 사로잡혀 스스로 움직임을 멀리하고 살았다는 고백이 이어졌다. 움직여보니, 여성이라고 소극적일 필요가 없을뿐더러, 움직이며 배우고 느끼는 것이 너무도 많다는 걸 깨달았다는 홍성의 여인들은 그 어느 때보다 환한 낯빛으로 집으로 돌아갔다.  

‘이 담 한번 넘어가 볼까요?’

그의 두 번째 수업은 홍대 앞 한 공원에서 시작됐다. 그날 모인 여성들은 모두 원피스를 입고 있었다. 오늘 수업의 컨셉은 ‘원피스 파쿠르’였다. 예쁜 여성성을 강조하는 원피스라는 사회적 통념을 편하고 자유로운 의상으로 바꾸는 것이 수업의 목표였다. 20대에서 50대까지 모인 교육생들은 도심을 돌아다니며 뛰고 구르며 쾌감을 만끽했다. 그리고 급기야 리조는 제 키를 훌쩍 넘은 담벼락 앞에 서서, 이 담을 넘자고 제안했다. 이것이 바로 그녀가 움직임 연구소 이름으로 쓴 ‘월담’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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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인 교육생들은 도전하고 도전했다. 리조는 옆에서 어떤 근육을 움직여야 하는지, 어디에 힘을 줘야 하는지 찬찬히 설명했다. 혼자 힘으로 도저히 어려운 교육생들은 밀어주고 끌어주었다. 함께 목표를 완수해내는 새로운 경험이었다. 늘 다른 사람의 눈치를 봐야하고 조신하기를 강요받던 그들에겐 말 그대로 해방의 경험 그 자체였다. 이들 역시 얼굴이 환해졌다.  

이 모습을 보면서 머릿속을 휙 지나간 문구가 바로 ‘서울의 딴스홀을 허하라’였다. 여성이라고 춤추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단 100년 전 사회, 지금은 얼마나 변한 걸까? 아니, 변하긴 한 걸까? 누군가는 한 번도 가져 보지 못한 여성의 운동장 이야기가 아이템이라고 했더니, 누가 여성들에게 운동장에서 뛰지 말라고 했냐고 되묻는다. 그는 여성들도 인식하지 못할 만큼, 짙은 안개처럼 내려앉은 성역할의 강요가 얼마나 무거웠는지 모르는 사람이다. 이런 사람을 요즘 말로는 ‘젠더 감수성이 꽝인 사람’이라고 부른다. 여성들이 스스럼없이 ‘월담’을 하고, 자유롭게 남자들과 어깨를 부딪치며 운동장을 뛰놀 때, 세상은 변할 것이다.
딴스홀 출입을 불허하던 그 때부터 지금까지 철옹성처럼 무너지지 않는 우리 사회의 벽이 조금은 무너질 것이다. 말끝마다 맥락과 흐름 속에서 사물을 이해해야 한다고 말하던 단단한 여성 리조. 내가 열린 마음으로 여성들의 굳은 몸을 살펴주던 움직임 선생님을 응원하는 이유다.

글 | 한지원
한지원 님은 1990년부터 방송작가로 활동하고 있습니다. <인간극장> <KBS 스페셜> <그것이 알고 싶다> <VJ 특공대> <명작 스캔들> <TV 책을 보다> <EBS 다큐시선> 등 주로 교양프로그램과 다큐멘터리를 집필했습니다. 현재 KBS <한국인의 밥상> 작가로 활동하고 있습니다.
[인간극장] ‘리조’씨의 움직임 교육