웹진 카페人  
지상의 쉼표
[인간극장] 구례 ‘목월빵집’의 보랏빛 소묘

시골빵집의 ‘한국인의 빵 밥상(床)’ 프로젝트

[인간극장] 구례 ‘목월빵집’의 보랏빛 소묘.

강나루 건너서 밀밭 길을 구름에 달 가듯이 가는 나그네
길은 외줄기 남도 삼백 리
술 익는 마을마다 타는 저녁놀
 

말 그대로 교과서에 나오는 오천만이 다 아는 박목월 시인의 <나그네>다. 시어 몇 개로 우리를 남도의 저녁으로 안내하는 기가 막힌 안내자! 그런데 전라남도 구례에는 술 익는 마을 대신 빵 굽는 냄새가 진동하는 집이 있다. 묘하게도 이 집의 이름은 목월빵집, ‘나그네’란 시를 떠올리며 지은 빵집 이름이다. 박목월 시인의 자작시 해설서 《보랏빛 소묘》에서 착안한 걸까? 온통 보랏빛으로 멋을 낸 집이다.  
 

인간극장1.jpg

‘너도 있었구나, 우리 밥상 위의 빵!’ 

이 공간과의 만남은 결코 쉽지 않았다. <한국인의 밥상>이란 프로그램이 햇수로 8년째 접어들던 때, 나는 이 프로그램을 맡게 되었다. 프로그램도 생명체 같아서 생로병사의 길을 걷는 법이다. 한국인의 밥상도 생명 연장을 통해, 장수 프로그램이 되기 위해, 뭔가 새로운 시도가 필요했던 시기였다.
저간의 사정도 모른 채, 제작사 공모가 나와서 후배가 하는 제작사에 기획안을 써줬고, 그게 덜컹 당선되는 바람에 느닷없이 프로그램 제작에 합류하게 되었다. 새롭게 영입된 우리 팀에게 요구되는 건, 늘 새로운 기획이었다. 10년이 가까워지다 보니, 늘 그 테마가 그 테마. 알고 보니 변화가 필요하다는 요구에 의해 우리 제작팀이 발탁되었던 것이다. 게다가 10년째 해오고 있는 제작팀이야 언제 어느 시즌에 어디를 가면 진기한 식재료와 아이템이 있는지 눈 감고도 찾을 수 있지만 우리는 눈 뜬 장님, 뭐가 어떻게 돌아가는지 파악하기도 버거웠다. 그러니 노련한 팀과 경쟁하기 위해선 새로운 기획으로 다르게 보이는 수밖에 달리 돌파구가 없었다.  

그런데 아이템이라는 게 각 잡고 앉아서 기획을 한다고 나오는 게 아니다. 농담하다가도 나오고 완전 다른 이야기를 하다가도 불쑥 나오는 게 아이템이다. 특히 나처럼 늘 시간이 부족한 작가에게는 주워듣는 얘기가 중요하다. 수다 떨다가 어쩌다 듣는 얘길 잘 주워 담으면 좋은 기획이 되기도 한다. ‘빵 이야기’도 그런 아이템 중에 하나였다.  

함께 일하던 여자 피디가 결혼 2년 만에 느닷없이 귀농을 하게 됐다고 찾아왔다. 언니가 동네 빵집을 하다가 대박이 났는데, 결혼 직후 남편이 언니 가게에 가서 제빵 기술을 배웠단다. 부러 귀농을 하겠다고 작심을 하고 배운 것은 아니었는데, 어쩌다보니 단양에 빵집을 계약했다는 것이었다.
그 때까지만 해도 그저 절친 후배의 라이프 스토리였다. 그런데 이야기를 하다 보니, 일본의 시골빵집 성공사례도 생각났고, 다큐 시선에서 시골빵집으로 아이템을 했던 것도 기억이 났다. 그뿐인가? 어쩜 그리 지역마다 100년 된 빵집들은 많은지... 이러면서, 여러 가지 이야기를 추론하기 시작했다. 100년이 됐다고 하면 일제 강점기에 들어온 것일 테고, 밀을 수확했으니 그것으로 요리를 해먹었을 것이다. 그렇다면 한국인의 밥상에 빵 이야길 할 수 있는 게 아닌가? 지화자, 그렇게 덧셈 뺄셈, 이야기를 보태가면서 아이템 하나를 낚았다! 제목은 ‘너도 있었구나 - 우리 밥상 위의 빵!’  

이름도 졍겨워라, ‘누룽지 빵’ ‘산동막걸리 오곡빵’ 

그렇게 사례를 찾다 만난 젊은 빵장수가 장종근 씨였다. 보라색 빵떡모자만 서너 개 만들어서 돌려쓰는 남자, ‘푸우’를 닮은 청년이었다. 전라남도 구례가 고향이었던 그는, 여느 농촌 청소년들처럼 서울에서 자신의 꿈을 찾았다. 하지만 막막하기만 하고, 내가 어디서 무엇을 해야 할지 갈피를 잡지 못했다. 그러다 만난 게 제빵이었다. 처음엔 쉐프도 생각했는데, 여러 절차를 거쳐서 시간을 들여 만들어야 하는 빵이 훨씬 매력적으로 느껴져 시작한 일이었다. 그가 빵을 배운 건, 그리 특별한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특별한 것은 고향으로 돌아와 빵을 만든다는 생각이었다. 

알다시피 우리나라 시골은 노인인구만 늘어가는 곳이 아니던가? 게다가 구례는 장수지역으로 유명한 할매, 할배들의 땅이었다. 취재를 갔을 때도 왜 구례를 선택했는지, 그것이 가장 궁금했다. 그런데 이야기를 하다 보니, 구례에서 빵을 만드는 일은 나름이 역사성을 가지고 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구례로 말할 것 같으면, 1990년대에 뜨겁게 타올랐던 ‘우리 밀 살리기 운동’의 본거지였다. 우리가 먹는 밀가루에 99%는 수입 밀이다. 우리 밀 소비량은 불과 전체 밀 소비의 1%에 불과하다. 이처럼 우리 밀이 종적을 감춘 건, 1984년 밀에 대한 추곡수매가 폐지되면서 부터였다. 사주는 사람이 없는데 무슨 수로 생산을 하겠는가? 밀가루 포대에 악수하는 그림이 있어 붙었던 별명, 바로 ‘악수 밀가루’의 등장으로 시작되어 추곡수매가 폐지로 우리 밀은 역사의 뒤안길로 물러났다. 그런 밀을 살리겠다는 고집스러운 사람들이 모인 곳이 구례였다.

고향으로 돌아온 종근 씨는 자연스레 우리 밀에 관심을 갖게 되었고, 지역의 빵집이라면 지역의 식자재를 이용한 빵을 만들어야 한다는 철학을 세웠다. 그리고 열심히 식자재 공부를 했다. 아예 지역에 사는 요리 연구가를 스승으로 삼고 공부하며 빵 연구를 시작했다. 겉으로 보기엔 괴짜 같아 보이지만, 작업에 임하는 그의 생각과 태도는 진지한 연구자 같다. 그런 열정이 만들어낸 빵이 ‘수제햄 젠피 빵’ ‘누룽지 빵’ ‘산동막걸리 오곡빵’ 등이다. 다른 건 몰라도 빵집은 빵이 맛있어야 성공하는 법, 독특해서이기도 하지만 좋은 재료를 써서 만드는 빵떡모자, 장종근 사장의 빵은 맛이 있다. 
 

인간극장2.jpg

빵에다 쌈장을 발라 먹어부러? 

이것으로도 아이템이 된다고 생각했는데, 그가 구상하는 빵이 있다는 데에서 귀가 더 종긋해졌다. 아내와 유럽의 빵 공부를 겸한 유럽 여행을 갔을 때, 한식이 그리워 빵에다가 쌈장을 발라 먹었는데, 예상 이상으로 맛이 있었단다. 그걸 토대로 통밀빵 위에 쌈장을 바르고 그 위에 지리산이 키운 나물을 무쳐 올려 먹는 오픈 샌드위치를 생각하고 있다는 것!
그것이 이름하여 ‘구례 브런치’라는 것이다. 쾌재를 올렸다. 그 어떤 메뉴보다도 한국인의 밥상스러우면서도 젊은 감각이 살아있는 아이템이었다. 우리는 방송에서 이 나물빵을 소개하기로 했다. 최불암 선생님이 방문했을 때, 아내가 나물과 쌈장을 가지고 들어오는 설정으로 이야기를 꾸며 촬영을 했다. 시청률이 그닥 훌륭하진 않았지만, 참신한 아이템으로 많은 사람들에게 회자됐고, 새로운 밥상을 만들어보자는 의기투합은 그런대로 작은 성과로 발현됐다.

모든 출연자과 막역한 사이가 되는 건 아니지만, 서로 마음이 통하고 진정성을 확인한 경우엔 그 관계가 지속되는데, 장종근 씨와 우리 제작팀과의 관계도 그랬다. 답사 1박 2일에 기본 두 개 도(道) 이상을 넘나들어야 하는 살인적인 스케줄 속에서도 구례 근처를 갈 때면 우리는 늘 ‘목월빵집’에 들른다. 처음 우리가 방송했을 때는 성당 앞 작은 가게였는데, 지금은 건물 하나를 사서 몰라보게 달라졌다. 그래도 그 때 그 보라색 빵떡모자 빵장수 장종근 씨는 처음 모습 그대로 우리를 맞아 준다. 오후가 되면 매일 빵이 거덜이 날만큼 손님이 많은데, 아무리 바빠도 그는 우리를 반긴다. 우리 역시 흐믓한 마음으로 가게를 둘려본다. 그의 보라색으로 멋을 낸 빵집과 빵맛이 좋아서기도 하지만, 그를 만나면 기분 좋은 이유는 다른 데 있다.

그의 머릿속에는 참 많은 아이디어가 꿈틀대고 있다. 촬영할 때는 작은 제분기에 아버지가 직접 키운 우리 밀을 갈아서 빵을 만들었는데, 다음번에 갔을 때는 독일에서 수입한 커다란 제분기로 우리 밀을 갈고 있었다. 빵집 뒤에 땅을 조금 더 사서, 거기에 밀을 심어 밀밭 가운데 빵집이 놓인 풍경을 만들겠단다. 이야기를 들을 때마다 독특한 풍경이 눈앞에 그려져 우리는 물개 박수를 치며 그의 아이디어에 응원을 보낸다.  
 

인간극장3.JPG

KBS <한국인의 밥상> 화면 갈무리

팥빵의 고수, 할머니 제빵사  

그런데 다른 어떤 아이디어보다 더 재미있는 프로젝트가 있었다. 바로 ‘할머니 제빵사 프로젝트’였다.
스토리는 이렇다. 구례 시내에 ‘블란서빵집’이란 아주 오래된 빵집이 있는데, 문을 닫게 되었다. 그런데 빵집 분위기가 말 그대로 레트로 분위기 그 자체! 그게 없어진다는 게 너무 아쉽고 애틋했단다. 그래서 그 집을 살릴 방도를 생각해 낸 것이다. 시골 할매들은 옛날부터 팥 삼고 밀가루 반죽해 팥빵을 만들었던 숨은 고수들이 아니던가? 그 할머니들이 실력발휘 할 수 있도록 할머니 팥빵만 만드는 빵집을 구상 중이다. 그저 경쟁에 밀려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질 뻔한 블란서빵집이 그렇게 다시 살아날 용트림을 하고 있다.
얼마 전 연락할 일이 있어 물었더니, 코로나 때문에 아직 문을 열지 못했고, 할매 제빵사들을 하루 서 너 시간 단팥빵을 만들고 있단다. 코로나가 끝날 때 즈음이면, 인스타그램엔 #블란서 빵집 #할머니 제빵사 #맛있어 하면서 얼마나 많은 사진과 글이 올라올지 벌써부터 기대가 된다.  

빵집 인테리어도 온통 보라색이고, 빵떡모자도 죄다 보라색이다. 언젠가 한 번은 왜 보라색이냐고 물었다. 그저 보라색이 좋아서 그렇다고 짧게 대답했다. ‘보라색을 좋아하면 또라이라는데...’ 넌지시 건네니, 그저 빙긋 웃는다. 보라색은 빨간색과 파란색의 극단을 어우른 색이다. 그저 두 개의 조합이라고 하기엔 그 자체가 풍기는 보라란 색이 너무도 고혹적이어서 흔히들 예술가의 색이라고 말한다. 그걸 ‘또라이’라는 비속어로 표현하는 것이리라.  

그의 행보는 더도 덜도 아닌 ‘보라색’ 만들기가 아닌가 싶다. 한국인의 밥상 위에 빵을 올리듯, 그는 이질적인 것들은 잘 버무려, 구례의 시골빵집이란 새로운 보라색 문화를 만들고 있다. 그래서 이곳은 나에게 푸근함을 주는 공간이라기보다는, 창조적 에너지를 수혈 받는 곳이다. ‘빵장수’와 ‘빵떡모자’, ‘젠피’와 ‘빵’, ‘구례 나물’과 ‘호밀빵’ 이런 엉뚱한 조합이 의외로 기발한 돌파구가 될 수 있으니 말이다.  

생각이 막혀 답답할 때, 무언가 새로운 것을 만들고 싶을 때 찾아가 보시라! 보랏빛 빵떡모자 빵장수가 당신에게 새로운 영감을 줄지도 모를 일이다. 하지만 그의 빵 맛을 보려거든, 일찌감치 가야한다. 방송을 여러 번 타서인지, 빵 맛 때문인지 그곳은 늘 문전성시다!

[한국인의 밥상 : 구례의 산물로 만든 건강한 빵! 요약 보기] https://www.youtube.com/watch?v=2uVcFlogCJg

글 | 한지원
한지원 님은 1990년부터 방송작가로 활동하고 있습니다. <인간극장> <KBS 스페셜> <그것이 알고 싶다> <VJ 특공대> <명작 스캔들> <TV 책을 보다> <EBS 다큐시선> 등 주로 교양프로그램과 다큐멘터리를 집필했습니다. 현재 KBS <한국인의 밥상> 작가로 활동하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