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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극장] 밥상으로 독립운동 한 여인들

눈물 어린 강구(講究)

[인간극장] 밥상으로 독립운동 한 여인들.

‘대책을 강구해봐!’ 흔히 대책이나 계획을 세울 때 쓰는 한자어가 ‘강구(講究)’란 말이다. 그런데 중국에서는 이 말이 조금 다른 의미로 쓰인다고 한다. 쟝저우(강구)는 ‘음식을 만들 때 이리저리 머리를 짜내고 궁리한 끝에 새로 개발한’이란 뜻이다.  

음식 만들기를 좋아하는 사람은 이 말의 뜻을 익히 잘 알 것이다. 뭔가 있는 재료를 가지고 어떻게 해먹을까? 궁리하고 궁리하면서 한 접시, 한 접시가 나오는 법이니까. 그런데 전혀 익숙하지 않은 난감한 사회적 환경, 전쟁이나 난민이 되는 특수한 상황에서 사람들은 어떤 강구를 통해 자기들의 음식문화를 이어나갈까?  

지난 2019년, 3.1운동 100주년을 기념해 <한국인의 밥상>에서는 특집을 준비했다. 3.1운동과 관련해 뜻깊은 ‘밥상’을 찾아야 했다. 100년 쯤 지났으면 이젠 새로운 것이 안 나올 만큼 발굴된 것이 많아야 하는데, 현실은 그렇지 않았다. 여전히 새로 서훈 받는 이가 있고, 여전히 새로운 문서들이 찾아진다. 생각해보면, 얼마나 오래 방기했는지에 대한 방증이며 부끄러운 일이다.  

그래서 새로 서훈을 받은 사례, 스토리가 재미있는 사례를 찾았다. 후손이 아니라, 동네 면장이 <범죄인명부>란 고문서에서 이름을 찾아내 99년 만에 서훈을 받게 한 사례여서 흥미로웠다. 또 평생을 노름꾼으로 비난을 받고 산 한 종손, 알고 보니 일본경찰을 속이기 위한 위장이었고 독립운동으로 집안 전 재산을 만주의 신흥무관학교 설립 자금으로 보냈다는 숨은 이야기를 발굴했다.  

그런데 뭔가 한 구석 미진한 부분이 있었다. 밥상인데, 보다 직접적인 밥과 관련된 사례가 있었으면 하는 욕심이 생겼다. 방송쟁이들의 이 까탈스런 욕심이 언제는 특별한 것을 만들기에 집요하게 물고 늘어졌다. 한국의 유산이라고 북 소리, 둥 하고 역사 이야기를 전하는 1분짜리 프로그램을 할 때, ‘임정의 어머니’라 불리는 정정화 지사 스토리를 발굴했던 기억이 났다. 그는 말 그대로 밥을 지어주며 독립운동을 지원했던 인물이다. 이런 인물이 필요했다. 함께 일하는 취재작가에게 한 마디를 했다. “예인아! 밥상으로 독립운동한 사람들 찾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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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운동가 후손의 ‘특별한’ 일상 밥

한참 이리저리 전화를 돌리더니 취재작가가 괜찮을 거 같은 인물이 있는데, 바쁘고 특별한 음식이 없어서 거절했다는 비보를 전했다. 그리곤 다른 사례자를 알아보겠다고 했다. 그리고 이튿날, 취재작가가 약간 흥분한 목소리로 다시 소식을 전했다. 어제 거절했던 그 분이 다시 하겠다고 연락이 왔다는 거다.  

사연은 이랬다. 퇴근하고 돌아온 아들에게 낮에 <한국인의 밥상>에서 섭외 전화가 왔다는 얘길 하면서, 우리 집에 특별한 음식이 없어서 거절했다는 얘기까지 했단다. 그런데 아들 왈, ‘엄마 우리 집 음식 다 특이해. 친구들 집 가서 밥 먹어봐도 이런 거 없어.’ 이러더란다. 그리고 생각해보니, 오징어채, 무짠지 볶음, 오겹살 졸임 등 자주 해먹는 음식들이 대부분 할머니를 이어 어머니가 해주시던 음식이었음을 깨닫고 마음을 바꾸었다고 했다. 그렇지, 매일 반복되는 일상은 누구에게는 특별하지 않는 말 그대로 일상인 법! 그걸 특별하게 만들어주는 건, 언제나 제3의 눈인 법이다. 서둘러 그 독립운동가 후손을 만나보기로 했다.  

분당에서 사는 박천민 씨의 집, 현관 입구부터 김구 선생의 친필 글씨가 손님을 맞았다. 예사롭지 않았다. 알고 보니 박천민 씨는 임시정부를 주도한 아주 유명한 독립운동가의 후손이었다. 천민 씨의 친할아버지 박찬익 선생은 1911년 만주로 망명하여 1940년 임시정부의 국무위원과 법무부장을 맡은 인물이었고, 외할아버지 신건식 선생은 임시정부의 재무차장으로 두 분 다 임정의 요직을 맡았던 지도자였다. 두 사람은 의형제를 맺었고 그의 자제를 결혼시켰다.  

천민 씨의 어머니 아버지 박영준, 신순호 역시 부모의 피를 이어받아 한국광복군으로 활동하다가 해방과 함께 조국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그의 가족 중에는 빼놓을 수 없는, 숨은 독립운동가 외할머니 오건해 지사가 있었다. 그녀는 망명한 남편을 찾아 네 살 된 딸 순호를 업고 중국 땅을 디딘 용기 넘치는 여성이었다. 그리고 그녀는 임정의 어머니로 임정의 안살림을 도맡아 했다. 특히 1938년 ‘남목청사건’으로 김구 선생이 총상을 입었을 때, 임정에서 회의를 통해 그의 병수발을 오건해 지사가 맡는 것을 결정할 만큼, 그녀는 다부진 살림꾼이었다. 

그러니까 그들은 바로 우리가 찾던 ‘밥으로 독립운동을 한 인물’이었다. 선조들이 살아온 이력이 이러하니, 이 집에 내려오는 손맛은 당연 중국식의 아주 독특한 음식들일 수밖에! 천민 씨는 10년 전 어머니가 돌아가신 후, 숱한 소장품들을 박물관에 기탁하고, 자신이 소중히 여기는 사진과 물품 몇 개만 간직하고 있었다. 여담이지만, 몇 해 전 천민 씨는 부모의 유물들을 들고 <TV 진품명품>에 출연해 꽤 높은 가격을 확인하기도 했단다. 그러나 아무데에도 공개되지 않은 더 귀한 유물이 그에게 있었다. 그건 바로, 손에서 손으로 이어져 온 당시의 음식이었다.  

어머니가 남긴 아름다운 유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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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민 씨의 내림 손맛, 음식 만들기가 시작되었다. 요리의 대부분은 뜻도 모르는 중국식 이름을 가진 음식이었다. ‘홍써’라는 요리는 돼지고기 오겹살을 채 썬 생강과 간장에 졸인 동파육과 비슷한 요리다. 하지만 향신료가 익숙하지 않은 한국인을 위해 향신료를 넣지 않았으며, 설탕대신 중국요리에서 꽤 많이 쓰이는 얼음사탕으로 맛을 낸 요리다. 특히 회의가 끝나고 술 한 잔씩 걸칠 때 술안주로 많이 먹었던 음식이라고 한다.  

그런가하면 김치 대신 먹던 게 무짠지 볶음이었다고 하는데, 무짠지를 잘게 채 썰어 뜨거운 불에 볶아내는 음식이다. 대체로 기름에 볶는 요리들이 많았는데, 중국 요리의 특징이기도 하지만 많은 사람을 빨리 만들어 먹이기에 볶음 요리만한 게 없다는 게 이유였으리라. 이 음식들이 외할머니와 어머니에게는 임정의 밥상이지만, 천민 씨에게는 그저 엄마의 손길을 느낄 수 있는 소울푸드, 그 중에서도 루빙은 단맛 나는 소 하나 들어가지 않은 맹맹한 중국식 밀가루 호떡인데, 본인이 아플 때마다 어머니가 해주던 음식이었기에, 지금도 몸과 마음이 아플 때면 그 음식이 그립단다.  

천민 씨의 요리 중에 가장 손이 많이 가는 요리는 납작두부 요리인데, 두부 위에 반나절 이상, 댓돌을 올려놓고 두부를 납작하게 만든다. 그리고 그걸 얇게 저며 다시 생강과 간장 소스에 볶는 음식이다. 당시 외할머니는 신분이 노출되는 게 두려워, 외출을 극도로 자제했다. 그래서 두부도 손수 만들어 요리를 했단다. 또 단백질을 보충하기 이 얼마나 요긴한 식재료인가? 삶아 먹고 지져 먹는 것으로도 모자라, 그것을 눌러 식감을 달리하여 다시 볶아 새로운 음식을 만들어냈다. 이것이 바로 ‘강구’인 것이다. 목숨 걸고 싸우며 얻은 눈물 어린 강구!  

음식을 만들다 말고, 천민 씨는 기어이 눈물을 터뜨렸다. 우리에게 보여주려고 며칠 음식 준비를 하면서 어머니 생각이 많이 났다는 것이다. 왜 아니겠는가? 음식이야말로 그의 체취를 느낄 수 있는 가장 아름다운 유산이니 그러고도 남을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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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써 눈물을 감추는 그녀를 보며, 나도 그녀의 삶을 되새겼다. 네 살 때 엄마 등에 업혀 시작한 독립운동, 24살까지 조국 해방을 위해 그야말로 청춘을 바친 여인. 3년을 자리보전하고 앓았다는데, 사진 속 노년의 그녀는 어딘가 모르게 당당해보였다. 그녀의 삶의 이력이 고스란히 느껴졌다. 그 느낌을 가슴에 간직하고 천민 씨가 눈물 흘리는 장면 뒤 원고를 채웠다.

“음식을 하다 보니 어느덧 평생 고생 많았던 할머니와 어머니의 인생이 떠올라, 천민 씨 코끝을 찌릅니다. 3년을 자리보전하고 많이 앓다가, 2009년 어머닌 세상을 떠났습니다.
네 살에 엄마 등에 업혀 시작한 독립운동가의 삶, 임시정부 직원으로 독립군으로 위험천만한 하루 하루였을 테지요.
그러나 끝까지 강인했던 어머니…. 이제 할머니와 어머니가 떠난 자리에 그들의 손맛이 남아 고소하고 달큰한 향이, 천민 씨를 위로합니다.”

글 | 한지원
한지원 님은 1990년부터 방송작가로 활동하고 있습니다. <인간극장> <KBS 스페셜> <그것이 알고 싶다> <VJ 특공대> <명작 스캔들> <TV 책을 보다> <EBS 다큐시선> 등 주로 교양프로그램과 다큐멘터리를 집필했습니다. 현재 KBS <한국인의 밥상> 작가로 활동하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