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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탱자 가라사대] ‘내멋대로 논리’와 정도전의 논리

사투리 ‘알쓸신잡’

“경상도 어디쯤에서 제주로 놀러오셨나 보군요?”
“와, 제가 경상도 출신인 걸 금방 어떻게 아셨어요?”
지난 10년간 게스트하우스와 민박을 운영하면서 전국 각지에서 온 다양한 게스트들을 만났다. 그 분들과 많은 대화를 하다 보니 국문학자도 아닌데 지역별로 재밌는 발음 습관을 잡아내는 능력이 생겼다. 특유의 억양이나 어미를 보면 어디서 오셨는지 금방 알 수 있는 경우를 제외하고, ‘서울 경기 등 수도권에 살며 표준어를 쓰는 영호남사람’을 금방 알아볼 수 있는 나만의 노하우는 이렇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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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역별 재밌는 발음 습관

가령 목요일에 방문한 게스트에게 내일이 무슨 요일이냐고 물었을 때, ‘금뇨일’이라 발음하는 분은 영락없이 영남 출신이다. 그분들에겐 월요일[워료일], 금요일[그묘일] 같이 연음법칙이 적용돼야 할 단어에 자음접변(순행동화)이 일어나는 특징이 있다. 경상도에선 삼성라이온즈의 포수였던 진갑용[진가뵹]은 ‘진감뇽’이고, 윤석열[윤서결] 대통령은 ‘윤성녈’이다.

서울 사람이라 소개하지만 호남 출신이라는 걸 알아차릴 수 있는 결정적 힌트는 ‘격음화 무시’이다. 그분들은 가령 서귀포시 법환동[버판동]을 ‘버반동’으로, 답답해[답다패]를 ‘답다배’로, 곱하기[고파기]를 ‘고바기’로, 융복합산업[융보캅산업]을 ‘융보갑산업’으로 발음하는 원리와 같다. 격음화 대신 연음화가 일어난다. 8090 가수 박학기[바카키]는 전라도에선 ‘바가끼’다.

표준어에 가장 민감해야 할 상당수의 지역방송 아나운서들도 이 습관은 쉽게 고치기 힘들다. 그렇다면 모두가 이렇게 발음 습관을 쉽게 바꾸지 못하는 이유는 뭘까? 무엇이건 가설을 세우기 좋아하는 나의 ‘내멋대로 논리’는 다음과 같다.

언어의 사회학…영남 사람 vs 호남 사람

부드럽게 넘겨야 할 받침을 끝까지 포기 안하고 발음을 하다 보니 영남 사람들은 다소 까칠하거나 논리적으로 따지는 성향이 언어습관에 반영된 건 아닐까 추측해 본다. 경북 안동 출신인 내 아버님이 이런 가설에 상당한 논거를 뒷받침해준다.

반대로 호남 사람들은 ‘ㅋ, ㅌ, ㅍ’ 같은 격한 소리(격음)에 거부반응을 갖고 있는 걸 보면, 왠지 주위 사람들에게 부드러운 사람으로 비춰지고 싶어 하거나, 싸움이나 논쟁보다는 스리슬쩍, 소위 ‘유도리 있게’ 넘어가고픈 무의식적 성향이 언어로 발현된 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사투리를 잘 못 고치는 영남 사람들에 비해 호남 출신들이 표준어를 상대적으로 능숙하게 구사하는 이유도 일맥상통한다. 오랜 기간 기득권을 누려 온 영남인들은 사투리를 고치지 않아도 사회생활 하는데 불편을 겪지 않은데 비해, 상대적으로 소외받았던 호남 출신은 사투리를 쓰면 차별을 받았던, 말도 안 되는 경험들이 있던 터라 표준어를 체득하는 데 더욱 적극적으로 노력했을 것이다.

논리가 부족할 땐 자고로 위인들의 말씀을 앞세우는 법. 팔도사람들의 특징을 이성계 앞에서 사자성어로 표현한 삼봉 정도전의 말에서 추가 근거를 찾아보았다.

삼봉은 경상도를 태산교악(泰山喬嶽; 큰 산과 험한 고개처럼 선이 굵고 우직하다)이나 송죽대절(松竹大節; 소나무 대나무 같이 곧은 절개가 있다)에 비유했고, 전라도는 풍전세류(風前細柳; 바람결에 날리는 버드나무처럼 멋을 알고 풍류를 즐긴다)로 표현했다. 절개 있는 사람은 좀 까칠해 보이고, 풍류를 즐기는 사람은 일단 유해 보인다. 그러니 육백여 년 전 삼봉 정도전의 눈썰미가 아예 틀린 건 아닌 것 같다.

지인이 들려준 제주 방언의 비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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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사는 제주에도 독특한 발음 습관이 있다. ‘ㄴ, ㄹ’이 ‘ㅎ’을 만나면 ‘ㅎ’ 발음이 묻혀 버린다. 가령 올해는 ‘올래’, 일학년은 ‘일락년’으로 발음하는 식이다. ‘전나, 전나!’하며 핸드폰을 건네시던 이웃 분의 말을 욕으로 알아듣고 순간적으로 오해했던 기억이 난다. 눈치 챘겠지만 ‘전나’는 전화다.

제주어 중 또 하나 재밌는 특징은 ‘ㅏ’발음이 ‘ㅗ’로 나는 것이다. 제주토박이 분들은 바람을 ‘보롬’이라 발음한다. ‘아래아’의 영향이란 설명은 왠지 공허하다. 역시나 제주 토박이 지인이 꽤 재밌는 학설을 들려주었다. 바람을 ‘보롬’이라 발음하는 이유가 다름 아닌 제주의 세찬 바람 때문이라는 것이다. 말소리 또한 세찬 제주바람에 날려 사그러든다 해서 입술이 퍼지는 ‘ㅏ’ 발음 대신 모이는 ‘ㅗ’ 발음이 보편화됐다는 얘기였다.

생각이 말을, 말이 행동을, 행동이 습관을, 습관이 성격을, 성격이 운명을 결정한다. 어쩌다 보니 표준어의 정의가 교양 있는 서울사람이 쓰는 말이 됐지만, 무슨 사투리를 쓰건 간에 적재적소에 어울리는 단어를 취사선택해 자기의 생각을 명료하게 말하는 사람이 훨씬 더 매력적으로 보이는 건 분명하다.

참고로 난 삼봉이 정의한 경중미인(鏡中美人: 거울 속 미인처럼 우아하고 단정한), 경기도 사람이다. 슉슉, 어디서 돌 날아오는 소리가….

글 | 지준호
지준호 님은 전직 광고맨(오리콤, 제일기획 등), 10년차 제주이주민으로 구좌 세화리 부티크 제주민박 살롱드탱자와 유쾌한 제주돌집 탱자싸롱을 운영 중입니다.‘바삭한 주노씨’란 작가명으로 브런치(httP://brunch.co.kr/@junoji)에 재치 있는 에세이와 패러디 광고를 쓰며 조용히 살고 있습니다.
[탱자 가라사대] ‘내멋대로 논리’와 정도전의 논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