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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리수리 정가이버] 전자폐기물에 대한 소소한 대응

수리의 쓸모

[수리수리 정가이버] 전자폐기물에 대한 소소한 대응.

안 좋은 버릇이 있는데 물건을 사용하면 제자리에 두지 않고 사용한 곳에 여기 저기 널어놓는다. 좋은 기술자라면 미국 드라마에 나오는 차고의 모습처럼 공구들을 종류별로 가지런히 정리해 놓은 모습이 떠오르지만 오랜 습관이라 잘 고쳐지지 않는다. 필요한 공구나 부품을 찾느라 시간을 허비하다가 일을 시작하기도 전에 지쳐버릴 때면 스스로도 한심한 생각이 든다. 그래서 요즘은 조금씩 정리하는 습관을 들이려고 하는데, 정리하다 보면 청소한지 오래돼서 뭉친 먼지덩어리들이 보인다. 물건들이 여기 저기 널려 있으니 자연스레 청소도 하지 않게 되는 것이다.  

정리하다 말고 무선청소기 배터리 교체

그런데 물건을 정리하며 사용하기 편리한 소형 무선청소기가 배터리 성능이 떨어졌는지 충전을 해도 늘어진 엿가락처럼 힘없이 잘 돌아가지를 않는다. 정리를 하다 말고 서비스센터에 수리비용을 알아보니 배터리 교체비용만 4만 원이 넘고 출시한 지가 오래된 제품이라 부품을 가지고 있지 않아서 시간도 많이 걸릴 거라고 했다.  

검색해 보니 새 제품을 5만원 남짓에 판매하는 곳도 있었다. 수리를 맡기는 비용이면 차라리 새 제품을 사는 편이 나을 것 같아서 직접 수리를 해보기로 했다. 흡입력은 떨어졌지만 다행히 동작하는 상태라 수리하기도 어렵지 않을 것 같았고 실패해도 손해 볼 것이 없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간단해 보이는 것도 막상 실행에 옮겨 보면 생각만큼 단순하지는 않다. 조심스럽게 분해를 하고 교체용으로 사용할 배터리를 구매하기 위해서 장착되어 있던 배터리의 사양을 확인했다. AA크기에 1.2V 1,300mAh의 용량을 가지는 니켈-수소(Ni-MH) 충전용 배터리 6개를 이용해 7.2볼트(1.2×6=7.2)로 동작했다. 니켈-수소 배터리는 휴대전화 배터리나 자동차용 배터리처럼 재충전이 가능한 2차 전지(납축전지, 니켈-카드뮴, 니켈-수소, 리튬이온, 리튬폴리머, 인산철 등)에 속하지만 무한정 재충전이 가능한 것은 아니고 약 500회 정도 사용할 수 있다고 하니 수명이 다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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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선 청소기 분해

기왕 수리하는 것이니 성능을 업그레이드 해보면 좋겠다고 생각해서 규격이 약간 다르지만 자전거 전조등 같은 곳에 사용하는 3.7볼트 리튬이온 배터리 두 개를 연결해 보기로 했다. 리튬이온 배터리는 니켈-수소 배터리보다 더 비싸지만 가볍다. ‘메모리 현상’으로 일컫는 성능저하도 적은 진보된 배터리라 더 오래 쓸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3.7볼트, 2개이니 7.4볼트여서 기존 7.2볼트와 0.2볼트 밖에 차이가 나지 않고 용량은 3,000mAh이니 동작만 한다면 사용시간이 두 배 이상이 될 거라고 예상했다. 그런데 정확한 이유는 알 수 없었지만 안타깝게도 결과는 실패였다. 

다시 검색해서 본래 장착되어 있던 배터리와 나머지 사양은 같고 용량만 조금 더 큰 2,000mAh 니켈-수소 배터리를 한 개당 1,600원 정도에 구매할 수 있었다. 2,000mAh 제품이니 기존의 1,300mAh의 배터리보다 한번 충전해서 청소기를 1.5배 정도는 더 오래 사용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6개의 배터리들은 스폿용접이라고 하는 전기용접 방식으로 연결되어 있었지만 스폿용접기가 없으니 평소에 사용하는 방법인 납땜으로 연결하고 다시 조립했다. 한번 실패한 후라 이번에도 또 실패하면 어쩌나 하는 걱정을 하며 조심스레 스위치를 켰다. 청소기는 다시 생명을 얻은 듯 힘차게 위~잉, 소리를 내며 잘 동작했다. 야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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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터리 교체

전기자동차의 충전회로를 설계하는 일을 하고 있는 친구와 대화를 하면서 처음에 사용한 리튬이온 배터리의 용량이 너무 큰 것이 오히려 문제가 된 것 같다는 결론을 얻었다. 순간적으로 흐르는 전류가 너무 커서 보호회로가 전류를 차단한 것 같았다. 남이 만들어 놓은 제품을 함부로 개조하는 것은 좋은 방법이 아니라는 것을 다시 확인했다. 자칫하면 2,000mAh용량의 배터리로도 동작하지 않았을 수도 있었다.  

이런 일은 본업인 전자 장비를 개발하면서 회로를 설계하고 프로그램을 작성하는 일에 비하면 쉬운 일에 속하고 일을 통해서 얻을 수 있는 경제적인 이득도 그리 크지 않다. 하지만 작업을 마치고 기대한 대로 잘 동작할 때는 마찬가지로 기쁨과 보람을 느낀다. 그리고 무엇보다 버려질 상태에 놓인 물건의 생명을 연장해서 쓰레기를 줄였다는 사실이 가장 기분 좋다. 

디지털문명이 남긴 전자폐기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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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공지능이 대세가 된 21세기를 디지털문명이라고 자랑스럽게 표현하기도 하지만 전자제품은 인간이 만든 도구 중에 수명이 가장 짧은 물건에 속하지 않을까 한다. 때로는 사람들이 빈티지(vintage)라고 해서 오래된 물건에 의미를 부여하기도 하지만 전자제품에 한해서는 빈티지라고 하는 개념이 존재하지 못할 것 같다. 빈티지가 되기도 전에 수명이 다하거나 기능이 업그레이드된 제품에 밀려 생명이 다하기도 전에 버려지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버려진 전기, 전자제품을 전자폐기물이라고 하는데 전 세계에서 단 한 해에 버려지는 양이 인류가 지금까지 생산한 상업용 항공기를 모두 합친 것보다 많다고 한다. 

가끔은 전자분야에 종사하는 것이 처치 곤란한 쓰레기들을 만들어 내고 있는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 때도 있다. 그래서 고장이 난 물건을 고쳐 쓰는 것에 더 큰 의미를 부여하고 있는 지도 모르겠다. 또 하나 확인한 것은 크고 강한 것이 언제나 좋은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적당하다는 것은 대충하거나 아무렇게나 한다는 뜻이 아니라 너무 크지도 너무 작지도 않은 것이니 다른 말로 바꾼다면 ‘안성맞춤’이 될 듯하다.

글. 정한섭
1994년부터 통신과 방송 관련 장비를 개발하는 전자 엔지니어로 일하고 있습니다. 재택근무를 하며 아빠로서 두 아이의 육아를 담당하기도 했습니다. 요즘은 아이들에게 수학과 코딩을 가르치는 일을 겸하고 있습니다. bearfeet@naver.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