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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페의 서재
[산티아고 길노래]

하나의 사랑(One love) _ 순례길의 레게 뮤직

나는 밥 말리를 좋아한다. 처음 <엑소더스(Exodus)>를 들었을 때의 충격을 잊을 수 없다. 성경에 나오는 모세의 출애굽을 다룬 <엑소더스>는 무려 7분 40초짜리 노래다. 그 긴 노래를 단 한 개의 코드만으로 연주하는데 처음부터 끝까지 지루할 틈이 없다. 밥 말리의 목소리와 여성 코러스인 웨일러스의 화음, 일렉트릭 기타와 키보드, 그리고 브라스밴드가 기막히게 주거니 받거니 7분 40초를 꽉 채운다. 귀가 확 열리는 충격이었다. 지금도 뭔가 좀 답답하게 막히는 느낌이 들 때면 무조건 <엑소더스>를 튼다. 일렉 기타의 첫 리듬이 나오면 신기하게도 몸이 풀리기 시작한다. 춤은 하나도 못 추지만 그냥 고개가 편안하게 까닥거려지고, 볼트와 너트가 꽉 죄인 것 같던 몸이 윤활유라도 친 듯 느슨하게 풀리고 부드럽게 움직인다.  

리듬도 흥겹고 선율은 아름답고 노래는 자유롭다. 사회문제를 다룬 직설적인 노랫말도 마음에 들었다. 저항을 말하면서도 흥겨움을 잃지 않고, 불의와 싸우라고 하면서도 다툼 앞에선 평화를 노래한다. 노래로만 그친 것이 아니라 자메이카에서 열린 <One Love Peace Concert>에서는 당시 자메이카의 총리와 반대편 정당 대표를 무대로 초대해 ‘3자 악수’를 연출하며 평화로운 해결을 중재하기도 했다. 그런 밥 말리가 좋아 자연스럽게 레게 문화에도 관심이 갔다. 에티오피아 황제를 신으로 모신다는 라스타파리즘(Rastafarianism)이나 ‘레게 파마’로 알려진 드레드록(dreadlocks) 같은 요소들은 신기하고 멋져 보였다. 물론 직접 시도해 볼 마음은 나지 않았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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밥 말리의 음악이 큰 성공을 거두었던 1970년대부터 세계의 수많은 음악인들이 레게음악을 해왔으니 스페인 산티아고 순례길에서 밥 말리의 노래가 흘러나오는 카페를 만나는 것도 전혀 이상한 일은 아니었다. 카페 돌담 한구석에 아프리카를 상징하는 빨강, 노랑, 초록이 칠해져 있고 입구에 놓여있는 분홍색 기타도 취향저격이었다. 갈리시아(Galicia)주의 제법 큰 도시인 사리아(Sarria)에서 만난 이 집은 카페와 더불어 알베르게도 운영하니 당연히, 여기서 묵어야지!  

호스피탈레로는 드레드록이 아니라 평범한 머리모양을 하고 있었지만 아주 유쾌한 사람이었다. 흘러나오는 레게 음악을 흥얼거리며 춤추듯 서빙을 하고 있었다. 밖에 걸린 분홍색 기타를 좀 쳐봐도 괜찮겠느냐고 물으니 “물론이지!” 하며 냉큼 가져다주었다. 밥 말리에 이끌려 들어왔지만 시설도 나쁘지 않았다. 카페 안쪽의 숙소는 조금 어두웠지만 숙소와 이어진 뒷문을 열고 나가자 꽤 넓은 도로가 나왔다. 사람이 거의 다니지 않는 호젓한 길이라 빨래를 널기에 안성맞춤이었다.  

빨래를 널고 들어오자 옆 침대에 필립이 와 있었다. 필립은 독일에서 대학을 나온 이탈리아 친구로 영어와 독일어, 스페인어에 능통했다. 며칠 전 산마르틴 델 카미노(San Martin del Camino)의 알베르게에서 처음 만나 맥주를 한 잔 하면서 안면을 텄는데 여기서 다시 만나니 반가웠다. 카페 주인장하고도 금세 친해진 듯했다. 필립은 누구와도 쉽게 친해졌는데, 능숙한 4개 국어 덕분이 아닐까 생각했다.  

필립의 옆 침대에 앉아있던 덩치 큰 친구는 이반이라고, 키가 2m는 됨직한 거구였다. 작은 키가 아닌 나도 악수를 하며 고개를 들고 얼굴을 쳐다봐야했다. 이반은 로마에서부터 걸어왔다고 하는데 어깨에 메는 배낭 대신 바퀴달린 카트에 짐을 실어 끌고 다녔다. 먼 길에는 안성맞춤이다 싶었다. 산티아고 순례길도 여러 번 걸었던 베테랑이라고 필립이 소개했다.  

셋이서 저녁을 먹고 같이 와인을 한 잔 하기로 했다. 언젠가 산티아고 길에서 어느 나라 사람이 술을 제일 잘 마시는지 이야기를 나눈 적이 있다. 대체로 이탈리아인이 제일이라는 데 의견이 모이지만, 마음먹고 마시면 한국인이 남는다는 우스개도 들었다. 흥 많기로 이름난 이탈리아인 둘과 한국인의 조합이다. 같은 반도여서 그런 걸까? 그렇다면 이베리아 반도의 스페인도 만만치 않겠다 생각했는데 결국 이 3개국 조합이 만들어졌다.  

필립이 주인과 어떻게 이야기를 했는지 주인장과 주인장의 딸, 필립과 이반, 그리고 나 이렇게 다섯이 모였다. 스페인, 이탈리아는 둘씩인데 나만 혼자니 이 승부는 내가 조금 불리하다. 카페 옆에는 단독주택에 둘러싸인 마당이 하나 있었는데 거기서도 영업을 하는 듯 테이블이 몇 개 놓여있었다. 그 한가운데 모닥불을 피우고 와인이 돌기 시작했다. 안주는 살라미(Salami), 이탈리안 스타일이다. 스페인은 초리소(Chorizo), 독일은 부어스트(Wurst), 같은 재료로 나라마다 다른 소시지를 만든다는 게 재미있다. 갑자기 나의 소울푸드, 순대가 그리워졌지만 꾹 참았다.  

커다란 칼을 든 이반이 몇 종류의 살라미를 슥슥 썰어서 내준다. 데면데면한 분위기로 시작된 술자리는 빈 와인병이 하나 둘 쌓이고, 집주인이 스피커를 가져와 밥 말리를 틀면서 달궈지기 시작했다. 이반이 젬베를 꺼내오더니 여행하다 배운 아프리카 리듬이라며 젬베를 두들기며 목청껏 노래를 불렀다. 일체의 기교 없이 씩씩하게 부르기, 아프리카의 추장 같다. 다들 웃으며 박수를 따라 친다. 옆 건물에서 덧문을 쾅 닫는 소리가 들려오지만 아무도 신경 쓰지 않는 분위기다. 그래, 스페인도 ‘흥’ 하면 빠지는 곳이 아니지. 투우와 플라멩코를 보면 알 수 있잖아?  

레게 카페답게 밥 말리의 <One Love>에서 합창이 되었다. 모두 같이 따라 흥얼댄다. ‘원 러브~ 원 하트~ 렛츠 겟 투게더 필 올라잇’ 밤은 깊어가고, 내일 영업을 위해 주인장이 먼저 들어가자 이탈리아 가곡의 향연이 시작됐다. 스마트한 필립은 어느 새 이반과 어깨를 걸고 전 유럽을 정복했던 씩씩한 로마 군단으로 환생한 듯 목청껏 이탈리아 가곡과 오페라곡을 불러댔다. 조금씩은 들어본 가곡과 오페라곡이다. 이탈리안과 와인으로 달리는 술자리는 이렇게 마무리된다는 것을 경험한 밤이었다.  

이번 ‘비정상 회담’은 이탈리안 승리! 한국 대표는 나 혼자여서 처음부터 불리했다. 기분 좋게 파한 술자리 뒤에 딱 하나 아쉬운 건 베드벅스, 침대 벼룩이었다. 산티아고 길을 걷는 동안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침대 벼룩에 물렸다. 다음 날 내내 온 몸을 벅벅 긁으며 걸었던 것만 빼면 다 좋았던 하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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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티아고에서 밥 말리의 <One Love>를 다시 만났다. 종착지인 산티아고 음식점마다 막 도착한 순례자들이 북적거렸다.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의 경제가 돌아가는 원동력이다. 이 힘으로 이슬람을 몰아낸 거겠지 생각하고 지나치는 순간, 어느 가게에서 ‘원 러브, 원 하트’ 합창이 울려 나왔다. 어떤 친구들일까 돌아보니 순례길 초반 주비리(Zubiri)에서 잠깐 만났던 스페인 친구가 술이 거나해져 동료들과 목청껏 노래하고 있었다. 얼핏 보니 나 같은 동양인도 있고 흑인 친구도 끼어서 흥겹게 춤을 추며 노래를 부르고 있었다. 나와 눈이 마주치자 그는 반갑게 손짓하며 날 불렀다.  

순간 주비리에서 그 친구에게 프랑코에 대해 물어보았던 일이 떠올랐다. 그는 ‘프랑코’라는 이름을 듣자마자 표정이 어두워지더니 이야기를 피했다. 그때는 스페인 사람들에게 프랑코에 대해 물어보는 일이 어떤 의미인지 미처 몰랐다. 그런데 여기 산티아고에서 저렇게 밝은 표정으로 ‘원 러브’를 노래하며 나를 부르고 있었다. 그래 좋아, 나도 산티아고에 온 것을 축하하고 싶었어. 그 친구와 어깨를 걸고 처음 만난 사람들 사이에 끼어 신나게 노래를 불렀다. ‘원 러브 원 하트, 렛츠 겟 투게더 필 올라잇!’  

그래, 하나의 사랑, 하나의 마음으로 다 같이 모이는 건 이렇게 멋진 일이야. 너도 나도 800km를 무사히 잘 걸어왔다. 이제 기분을 좀 내도 괜찮을 거야. 노랫말에도 있잖아. 한 사랑 한 마음으로 주님께 감사와 찬양을 드리면 기분이 좋아질 거라고.
 

글 | 안석희
안석희 님은 ‘유인혁’이라는 필명으로 1990년대를 풍미한 <바위처럼>을 비롯해 많은 노래를 지었습니다. 2016년 산티아고 순례길을 걸었고, 여행에서 만든 노랫말에 곡을 붙였고, 2019년 《산티아고 길노래》를 출간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