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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산책] 김기림 <금붕어>, 김기택 <새>

길들여짐에 대한 모더니즘의 질문

[문학산책] 김기림 <금붕어>, 김기택 <새>

“산업사회의 이야기, 다시 말해 행복을 추구하려 산업에 종사하는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A story of industry, of individual enterprise-humanity crusading in the pursuit of happiness)”
1936년 찰리 채플린(1889~1977)이 주연, 감독, 음악 작업을 맡았던 영화 <모던타임즈(Modern Times)>의 첫 장면에 나오는 위 자막은 인상적이다. 이미 100여 년 전에 자본주의의 실체를 꿰뚫어 본 채플린은 이 영화의 주제를 이렇게 한 문장으로 요약했다.
생산의 효율성을 높이려 도입된 ‘포드주의’에 의해 분업화가 진행되고, 노동자들은 단순 노동에 종사한다. 현대의 CCTV처럼 화면으로 노동자들의 생산 현장을 감시하는 자본가가 나오는 이 영화의 장면들은 지금 봐도 놀랍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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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 문명은 인간을 소외시킨다. 영화 예술이 그랬던 것처럼 한국의 시문학도 현대 문명을 우회적으로 비판한다. 이런 문학적 경향은 꾸준히 지속되며 생산된다. 1930년대부터 최근 시들까지도 이런 경향성은 반복되고 변주된다. 김기림(1908~ ?) 시인과 김기택(1957~ ) 시인의 시들을 통해 어떤 방법으로 시가 현대 문명을 어떻게 비판적으로 성찰하고 있는지 살펴본다. 

1930년대, ‘모던 보이’ 김기림의 등장

오래 전 이야기를 끄집어 내보자. 이제는 고색창연한 용어가 되었지만 우리 시단(詩壇)에 모더니즘이라는 말이 유행한 적이 있었다. 1930년대의 일이다. 그 당시에 시는 거의 시조이거나 한시였다. 시조는 고려 말에 발생한 문학 갈래이다. 따져보면 고려 후반기와 조선 500년을 거쳐 해방 정국까지 이어온 대표적인 시가 형태이다. 대략 600년 이상의 전통이다. 이런 600년의 문학적 전통을 깨고 나온 것이 한국의 현대시이다.
시조는 글자 수와 4음보의 율격을 맞춰 ‘짓던’ 문학이다. 그 오래된 옷을 벗어던지려 몸부림치던 1930년대의 지식인들의 몸짓은 절실했다. 새로운 것이어야 했고, 서구 문명의 물결에 우리도 동참해야 한다는 계몽적 사고가 깔려 있었을 것이다. 모더니즘은 그렇게 우리 땅에 수입되었다. 시의 형식부터 깨뜨려야 했다. 시조라는 오래되고 무거운 옷을 벗고 자유롭고 새로운 형태로 시를 ‘써야’했다. 이른바 자유시의 등장이다.
이들을 모더니스트라고 불렀다. 그 중 주도적인 역할을 했던 사람이 시인이자 평론가로 활동한 김기림 시인이다. 한국 전쟁 중에 납북된 것으로 알려져 사망 연도가 정확히 밝혀지지 않았다. 최초로 모더니즘 문학 운동을 주도하며 이와 관련한 문학 이론을 들여온 장본인이다.
지금 시각에서 보면 현대의 자유시라는 형태가 당연한 것으로 여겨지지만 당시에는 그렇지 않았을 것이다. 창조적인 파괴가 아니면 새롭지 않았고, 파격적인 형식에 새로운 내용을 담지 않으면 ‘모던’하지 않았다. 시조가 추구하던 물아일체의 전형적 사고를 바꾸지 않으면 새로운 문학이 설 자리는 없었다. 화자의 주관이 자연물에 일방적으로 개입하던 화법을 바꾸어야 했을 것이다. 한국 현대시는 시조와의 틈바구니를 벌리면서 자라났다. 당대 많은 시인들이 이에 호응하면서 현대시는 태동기를 보냈다. 

객관적 거리두기와 우의적 진실

모더니즘 시는 과거의 전통적인 형식인 시조와 차별화를 선언하며 새로움을 추구하는 예술적 경향에 영향을 받아 창작된 작품들이다. 모더니즘의 특징 중 하나는 현실을 객관화하는 경향성을 바탕으로 한다는 점이다. 이를 구현하기 위해 객관적인 시각에서 의도적으로 현실과 거리를 두었다. 표현 형식이 이렇게 자리를 잡아가는 동안 자유로운 시 형식 안에는 현대 문명에 대한 비판을 담기 시작했다.
대표적인 시적 방법이 우의적인 장치를 설정하고 현실을 우회적으로 비판하는 방법이다. 큰 틀에서는 알레고리의 방법을 쓰기도 한다. 알레고리는 어떤 주제를 드러내기 위해 주제와 관련 있는 직접적인 상황이나 인물을 내세우지 않고 연관된 상황을 설정해 주제를 돌려 말하는 방식을 말한다. 우화에 나오는 동물은 결국 인간 사회를 비판적으로 풍자하는 방식으로 알레고리가 활용된다. 김기림 시인이 발표한 다음의 시는 이런 모더니즘의 기법이 잘 반영된 작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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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붕어는 어항 밖 대기(大氣)를 오를래야 오를 수 없는 하늘이라 생각한다.
금붕어는 어느새 금빛 비눌을 입었다 빨간 꽃 잎파리 같은
꼬랑지를 폈다. 눈이 가락지처럼 삐여저 나왔다.
인젠 금붕어의 엄마도 화장한 따님을 몰라 볼게다. 

금붕어는 아침마다 말숙한 찬물을 뒤집어 쓴다 떡가루를
흰손을 천사(天使)의 날개라 생각한다. 금붕어의 행복은
어항 속에 있으리라는 전설(傳說)과 같은 소문도 있다. 

금붕어는 유리벽에 부대처 머리를 부시는 일이 없다.
얌전한 수염은 어느새 국경(國境)임을 느끼고는 아담하게
꼬리를 젓고 돌아선다. 지느러미는 칼날의 흉내를 내서도
항아리를 끊는 일이 없다. 

아침에 책상 위에 옮겨 놓으면 창문으로 비스듬이 햇볕을 녹이는
붉은 바다를 흘겨본다. 꿈이라 가르켜진
그 바다는 넓기도 하다고 생각한다. 

금붕어는 아롱진 거리를 지나 어항 밖 대기(大氣)를 건너서 지나해(支那海)*의
한류(寒流)를 끊고 헤엄쳐 가고 싶다. 쓴 매개를 와락와락
삼키고 싶다. 옥도(沃度)빛 해초(海草)의 산림속을 검푸른 비눌을 입고
상어에게 쪼겨댕겨 보고도 싶다. 

금붕어는 그러나 작은 입으로 하늘보다도 더 큰 꿈을 오므려
죽여버려야 한다. 배설물(排泄物)의 침전(沈澱)처럼 어항 밑에는
금붕어의 연령(年齡)만 쌓여간다.
금붕어는 오를래야 오를 수 없는 하늘보다도 더 먼 바다를
자꾸만 돌아가야만 할 고향(故鄕)이라 생각한다.
_ 김기림, <금붕어>
*지나해 : 일본에서 말레이반도 남단에 이르는 태평양 해역

이 시는 어항 속에 갇힌 금붕어라는 특정 대상을 소재로 한다. 고향을 잃고 좁은 공간에 갇혀 길들여지고 있는 존재를 형상화하고 있다. 물고기는 모든 물길이 모여드는 근원적인 공간인 바다에서 살아갈 때 자유와 생명성을 가진다. 원초적인 생명성과 자유를 상실하고 어항 속의 삶에 맞춰 길들여진 채 살아가는 금붕어는 현대인의 삶을 우의적으로 드러낸다. 금붕어가 회복해야 할 본성과 생명력은 그저 ‘전설(傳說)과 같은 소문’과 같은 일로 치부되고 있다.
모더니즘 시들의 또 다른 특징은 공간적 이미지를 통해 현대 문명을 바라본다는 점이다. 이 시에 나타나는 어항과 대기 밖의 하늘, 바다는 현실의 억압된 공간과 자유와 생명성을 회복할 수 있는 근원적 공간으로 그려진다. 어항의 물을 매일 아침 갈아주고, 먹이를 주는 ‘하얀 손의 천사’는 평온한 삶을 금붕어에게 제공하지만 금붕어로부터 원초적인 자유를 박탈한다. 시인은 ‘유리벽에 부대처 머리를 부시는 일이 없’는 금붕어의 행위에서 꿈꾸는 것조차 쉽게 허락되지 않는 금붕어의 현실에 대해 비판적 태도를 드러낸다.
이는 궁극적으로는 현대 문명에 길들여져 가는 현대인을 나타내며 억압적이고 폭력적인 현대 문명의 속성을 제시함으로써 문명 비판적인 의식을 드러낸다. 특히 ‘금붕어는 그러나 작은 입으로 하늘보다도 더 큰 꿈을 오므려 죽여버려야 한다’는 문장은 어쩌면 근대 자본주의 문명이 당대인들에게 내린 선언문이 아니었을까. 찰리 채플린이 그러했고, 김기림이 그러했듯이 자본주의를 중심으로 확장된 현대사회는 결국 인간을 소외시키리라는 것을 그들은 1930년대에 미리 꿰뚫어 보았다. 

새장 속의 새는 비상을 꿈꾸지 않는다

문명 비판을 기조로 이어가는 현대시의 창작 경향은 현재 진행형이다. 조금 더 세련되어졌고, 다양한 상황에서 주제 의식을 밀고 나아가지만 본질적인 성격은 많이 바뀌지는 않아 보인다. 현대인의 다양한 삶의 층위를 여러 모습으로 표현하고 있는 시인들이 지속적으로 등장하고 시의 내용 또한 변주되고 있다는 점은 현대 문명의 폐해가 여전하다는 방증이다. 알레고리는 이런 방증을 밝히는 데에 아주 유용한 문학적 장치로 보인다. 1980년대에 등단해 활발한 활동을 하고 있는 김기택 시인의 시에서도 알레고리가 보인다. 이 시에서 현대인의 우울한 일상은 새장에 갇힌 새로 치환되어 표현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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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는 새장 밖으로 나가지 못한다.
매번 머리를 부딪히고 날개를 상하고 나야 보이는,
창살 사이의 간격보다 큰, 몸뚱어리.
하늘과 산이 보이고 울음 실은 공기가 자유로이 드나드는
그러나 살랑거리며 날개를 굳게 다리에 배달아 놓는,
그 적당한 간격은 슬프다.
그 창살의 간격보다 넓은 몸은 슬프다.
넓게, 힘차게 뻗을 날개가 있고
날개를 힘껏 떠받쳐줄 공기가 있지만
새는 다만 네 발 달린 짐승처럼 걷는다.
부지런히 걸어 다리가 굵어지고 튼튼해져서
닭처럼 날개가 귀찮아질 때까지 걷는다.
새장 문을 활짝 열어놓아도 날지 않고
닭처럼 모이를 향해 달려갈 수 있을 때까지 걷는다.
걸으면서, 가끔, 창살 사이를 채우고 있는 바람을
부리로 쪼아본다, 아직도 벽이 아니고
공기라는 걸 증명하려는 듯.
유리보다도 더 환하고 선명하게 전망이 보이고
울음 소리 숨내음 자유롭게 움직이도록 고안된 공기,
그 최첨단 신소재의 부드러운 질감을 음미하려는 듯.
_ 김기택, <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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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시가 던지는 메시지는 분명하다. 새는 일상의 편안함과 따뜻함에 길들여진 현대인을 의미한다. 자유를 억압하는 현실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알레고리를 통해 원초적 생명성과 자유를 잃어버린 현대인을 표현한다.
새장 안에서 벌어지는 새의 행동에 관한 묘사는 충격적이다. ‘창살의 간격보다 넓은 몸은 슬프다’고 인식하는 화자의 시선은 냉정하고 객관적이다. 자유로워질 수 있는 가능성마저 외면한 채 ‘새장 문을 활짝 열어놓아도 날지 않고 닭처럼 모이를 향해 달려갈 수 있을 때까지 걷는’ 현대인의 뒷모습은 연민보다는 경멸의 감정이 생길 정도이다.
그러나 이런 상황에서 자유의지를 가지고 현실을 벗어나기 위해 몸부림치는 현대인은 많지 않다. 오히려 ‘그 최첨단 신소재의 부드러운 질감을 음미하려는’ 새의 행위는 아이러니컬하게도 편안해 보일 뿐이다. 새의 날개는 하늘을 비상할 때 빛을 발하고 제 역할을 다한다. 힘찬 날갯짓을 잃어버린 인간의 모습은 시시하고 매력이 없지만 그 보상으로 주어지는 길들여진 삶은 달콤하기만 하다.
그러니 이제 우리는 어찌할 것인가? 1930년대의 김기림 시인이 어항 속에 길들여진 금붕어를 통해 던진 질문은 21세기의 김기택 시인에 의해 변주되어 나타났다. 이 질문에 우리가 답할 차례가 되었다.

글 | 오형석